질문>
정이철 목사님! 웨신서에 나오는 ‘행위언약’을 믿고 주장하는 어떤 분이 창세기에 생명나무가 존재한 이유가 아담의 생명이 영구한 생명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네요.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얻은 후 그 나무를 삶아서 또는 씹어서 먹음으로 생명과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1) 선악과를 먹지 않았는데, 아담이 죽는 존재라면, 죽음은 죄의 결과(삯)라는 성경과 충돌합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

2) 에덴의 생명나무를 범죄 전(무죄)에 아담이 따먹었다면 범죄 전의 아담에게 생명나무는 어떤 영향을 줍니까?

3)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생합니까? 아니면 생명나무 먹는 것과 상관없이 무죄한 아담은 죽지 않습니까?

 

정이철 목사의 답변>
웨신서가 가르치는 행위언약 이론은 매우 비성경적입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다 믿으면, 우리의 신앙이 성경 66권 중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태초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아도 길게 생명을 누리기 못하고 머지않아 죽을 사람이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의 전체 구조가 성경에서 벗어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왜곡됩니다.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하겠습니다.
 

질문1에 대한 답변>
“선악과를 먹지 않았는데, 아담이 죽는 존재라면, 죽음은 죄의 결과(삯)라는 성경과 충돌합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

범죄가 없었으면 죽음도 없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아담에게 범죄가 없었으면 처음에 창조된 그 몸으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다고 믿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아담이 가변적으로, 파편적으로, 임시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율법을 잘 지킴으로 영생의 몸으로 격상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성경에서 벗어나는 비성경적인 사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사망은 죄의 삯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생명(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론은 사망이 죄의 삯으로 나타났다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경적 믿음과 거리가 멀어지게 합니다.
 

질문2에 대한 답변>

“에덴의 생명나무를 범죄 전(무죄)에 아담이 따먹었다면 범죄 전의 아담에게 생명나무는 어떤 영향을 줍니까?”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영생을 준다는 이해는 고대 중국인들의 천도복숭아 개념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게 덧입혀진 것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훔치거나 빼앗거나, 무슨 방법으로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몸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방삭이인지 ... 어떤 사람이 3천 년을 넘게 살았는데, 몸이 늙기는 해도 죽지는 않았다는 합니다.

만일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아담이 먹음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었다면,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등장하는 생명나무도 우리가 먹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9).

요한계시록은 장차 우리가 생명나무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영생을 위해 먹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생명나무에 참여한다는 것은 생명나무의 의미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영원히 우리의 기업이 된다는 뜻입니다.

웨신서의 행위언약을 문자대로 믿는 사람들은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되어 결국 죽어야 하는 아담이 영생을 위해 하나님이 제시하는 율법을 잘 준수하는 공덕에 근거하여 생명나무를 삶아 먹거나 이빨로 씹어 먹도록 허락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독교 판 천도복숭아(생명나무)를 먹어야 아담이 영생하는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생명나무 속에 영생을 주는 성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 속에 죽음을 주는 성분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과 상관된 것들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찬송하는 자기 백성을 가지시고자 아담을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를 유지하자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웨신서의 행위언약처럼, 앞으로 율법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식이 되게 해 준다는 조건적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된 아담이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고, 하나님도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으로 계시겠다는 내용의 언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아담과 하나님의 그 언약의 상징물들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 때 주어지는 언약의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지 않고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영생과 모든 은혜가 영원히 보장된다는 사실이 생명나무를 통해 지속적으로 선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선악과는 아담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결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면 영원한 죽음과 저주가 있을 것임을 경고(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범함은 곧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다는 의사표시였으므로,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라고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파기하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 자체가 언약 안에 머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아름다운 선물들이 박탈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범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담보물이었던 생명나무의 기능과 의미는 상실되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여전히 푸르고 싱싱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더 이상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복을 상징하는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성찬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새 언약의 담보물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실상 믿지 않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실질적 불신자에게 그 떡과 포도주는 전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나무를 이와 같이 성례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참된 신학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아담은 뒤늦게 자기 범죄를 후회하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자 발악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웨신서의 행위언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처럼, 아담은 필사적으로 생명나무를 향하여 달려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생명나무를 꺽어서 이빨로 씹어서 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실질적 불신자가 죽지 않는 몸을 얻고자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남들보다 더 많이 먹으려고 난동을 부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런 무의미한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아담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고 칼빈은 해석했습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기독교강요, 4.14.12).

그러나 웨신서의 행위언약을 문자대로 믿는 사람들은 범죄한 아담이 생명나무로 다가가서 얼른 그 가지나 잎사귀를 꺾어서 씹어 먹었으면, 저주받은 죄인의 상태로 영생을 누리게 되엇을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유치한 발상 아닙니까?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2).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계 22:14).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9).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천국에서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생명나무 가지과 잎사귀를 꺾어서 씹어 먹어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아담의 언약 파기 범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없었던 것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아담의 죄가 완전하게 치유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전에 예고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아담이 파기한 언약이 다시 복구되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온 세계 열방의 백성들이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기독교 판 천도복숭아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질문3에 대한 답변>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생합니까? 아니면 생명나무 먹는 것과 상관없이 무죄한 아담은 죽지 않습니까?"

생명나무를 먹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아담은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보호관찰 기간’ 또는 ‘수습기간’ 안에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사변입니다. 아담이 ‘임시적인 상태’, ‘가변적인 상태’, ‘파편적인 상태’로 창조되어 스스로 온전한 행위를 통해 영생의 몸을 얻었어야 한다고 믿는 것도 비성경적인 사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아담이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되었으므로 그에게 필연적으로 사망이 올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위의 성경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예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이 섬길 수있는 힘과 능력도 다 주셨습니다. 다만 아담이 교만해져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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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