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1)

 

글을 시작하며

신약성경의 번역자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지시 대명사나 인칭 대명사를 번역할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6).

위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로 번역된 헬라어 “λέγει”(레게이)는 “말하다(say)”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λέγω”(레고)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그가 말씀하신다.”인데, ‘개역개정’에서는 ‘3인칭 대명사’ “그가”를 “예수께서”로 의역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영어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는 의역하지 않고, 그대로 직역한다).

물론 인칭 대명사나 지시 대명사를 바르게 의역하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그러나 잘못 의역하면 오히려 독자들의 이해를 그르쳐 버린다. 그러므로 인칭대명사나 지시대명사를 엉터리로 의역할 바엔 차라리 영어 성경에서처럼 원문대로 대명사를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본 글에서 다루려는 개역개정 막13: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에서 “인자가”는 ‘대명사’를 엉터리로 의역한 대표적인 심각 사례일 것이다.

막13:29의 헬라어 원문에는 “인자”, 즉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라는 어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럼에도 ‘개역개정’은 막13:29의 ‘현재 3인칭 단수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를 친절하게도 “인자”로 의역함으로써,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전체의 의미를 오리무중 안개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역이 발생했을까?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막13:5부터 막13:33까지에서 제자들이 질문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까지 번갈아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이 이를 놓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막13:29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은 종말에 관한 말씀으로 보았기 때문에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를 “인자”로 잘못 의역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막13장을 읽을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번갈아가며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대해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번갈아 가며 말씀하신 까닭은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예루살렘 멸망의 때가 곧 종말의 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함께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도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중복해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서 종말의 징조로, 또 종말의 징조에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로 주제가 바뀔 때 언급되는 ‘역접 접속사’ “δὲ”(데/but)로 알 수 있다(물론 이런 용도 말고도 막13장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된 “그러나”가 더 있다). 즉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에서 종말로, 종말에서 예루살렘 멸망으로 주제를 바꾸실 때마다 “δὲ”(데/but)로 말씀을 시작하심으로써, 듣는 자들이 주제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막13:5-23은 제자들이 질문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가 곧 종말의 징조라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24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하시면서, 27절까지에서 종말의 징조는 이러하며, 그때 인자가 재림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예수님은 28절에서 “그러나”로 다시 예루살렘 멸망의 주제로 돌아가시면서, 31절까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예루살렘 멸망의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32절에서 “그러나”로 다시 종말의 때에 관해 교훈하시면서, 37절까지에서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주의하며 깨어있도록 경계하셨다.

여기서 참고로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인다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는 예민하게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가 있을 때는 그곳을 피해 도망하기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막13: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그러나 종말의 때의 징조는 예민하게 감지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종말의 징조는 그 징조와 함께 예수님이 바로 재림하시기 때문에, 종말의 징조를 보고 종말을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막13:24-26/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이렇게 종말의 징조는 설령 사람들이 감지했다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할 시간이 없으므로,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김없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막13: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를 감지하면 대비하고 피해야 하지만, 종말의 때는 이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막13: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항상 깨어서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재림의 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와 종말의 징조를 번갈아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번역자들이 놓치므로, 막13:29-31이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의 단락 막13:24-27의 종말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므로 29절도 막13:24-27의 종말 이야기의 연속이라고 여겼으므로, 번역자들은 앞 단락 26절(그 때에 인자가/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의 “인자”와 연계해서, 29절에서도 마지막 날에 문 앞에 있을 그 무엇도 당연히 “인자”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를 “인자”로 의역한 것은 종말의 때를 말하고 있는 26절과 연계해서 볼 때에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막13:24-27은 종말에 관한 가르침인 반면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포함된 막13:28-31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심각한 오역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오역 때문에 30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의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종말의 때를 착각한 단순한 허풍쟁이 인간으로 예수님을 치부해 버렸고, 정통 보수 신학자들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와 모순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30절을 터무니없는 억지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막13:29의 원문 “οὕτως καὶ ὑμεῖς, ὅταν ἴδητε ταῦτα γινόμενα, γινώσκετε ὅτι ἐγγύς ἐστιν ἐπὶ θύραις”(후토스 카이 휘메이스 호탄 이데테 타우타 기노메나 기노스케테 호티 엥귀스 에스틴 에피 뒤라이스)의 바른 번역은 무엇일까?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바른 번역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13:29)

위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γινώσκετε ὅτι ἐγγύς ἐστιν ἐπὶ θύραις”(기노스케테 호티 엥귀스 에스틴 에피 뒤라이스)인데,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는 “인자”(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라는 어구는 찾아볼 수 없다.

본문에서 “가까이 ~ 이른”으로 번역된 “ἐγγύς ἐστιν”(엥구스 에스틴)에서 “ἐγγύς”(엥구스/가까이)는 ‘성’(性)이 없는 ‘부사’이다. 이는 “ἐγγύς”(엥구스) 만으로는 뒤에 있는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의 성(性)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른”으로 번역된 동사 “ἐστιν”(에스틴)은 “~이다, ~이 되다”(be, become)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εἰμί”(에이미)의 ‘3인칭 단수 현재’로서,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는 “그(he)”, “그녀(she)” 또는 “그것(it)”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되어 있는 주어의 성(性)이 무엇인지는 전후문맥에 맞게 결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른(있는)”(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는 “그(he)” “그녀(she)”, “그것(it)” 중에서 어느 것이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막13:29의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인 앞 단락 막13:24-27과 같은 주제의 연속이라면, 앞 단락에 “그 때에 인자가/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휘오스 투 안드로푸/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가 있으므로, 29절의 ‘3인칭 단수 동사’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는 당연히 “그(he)”이며, 이를 의역하면 “인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막13:24-27은 종말에 관한 말씀인 반면에,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포함된 막13:28-31은 종말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므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오역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여기서 “문(들) 앞에”(ἐπὶ θύραις/에피 뒤라이스)는 무엇인가가 곧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관용어이며, 또 “이른”은 원문대로 “있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아무튼 “δὲ”(데/그러나)로 시작하는 28-31절까지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이므로, 이 단락은 막13:24-27이 아니라 막13:5-23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ἐστιν”(에스틴)에 포함된 주어인 ‘3인칭 단수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막13:5-23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를 염두에 두고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인 ‘3인칭 단수 대명사’가 정말 “인자”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비유(막13: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에서 여름이 문 앞에 있다는 결정적인 징조는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막13:5-23에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예루살렘 멸망의 징조들 중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14절)이 예루살렘 멸망이 문 앞에 있다는 징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이 코앞에 있다는 이 징조를 보거든 지체 없이 도망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따라서 막13:29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막13:14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28절)에 해당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29절)은 성전 멸망이 문 앞에 있다는 결정적인 징조인 14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14절)을 가리킨다.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것이 여름이 곧 온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곧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막11장에서 예수님의 저주로 인해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사건에서 무화과나무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상징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28절 이하의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깊은 관련이 있는 비유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께 질문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4)에서 “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이 예수님의 말씀인 29절(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과 동일하다는 데서도 앞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29절에서 “이런 일”로 번역된 “ταῦτα”(타우타)가 4절에서 제자들이 질문한 성전이 멸망의 징조(이런 일/ταῦτα/타우타)에 대응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또 29절의 “너희가~ 보거든”(ὅταν ἴδητε/호탄 이데테)과 14절의 “(너희가) 보거든”(Οταν [δὲ] ἴδητε/호탄 [데] 이데테)이 같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 한다. 그렇다면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인 ‘대명사’는 “그(he)”, “그녀(she)”, “그것(it)” 중에 ‘중성 지시대명사’ “그것(it)”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이 코앞에 있다는 징조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므로,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키는 ‘중성 지시대명사’ “그것(it)”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의 주어 “그것(it)”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징조로 하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 번역 성경들에서는 29절의 “ἐστιν”(에스틴)을 모두 다 “인자가 이르다”의 의미로 오역했으며, 영어 성경에서는 둘로 갈린다. ESV, NASB, NJB, RSV 등에서는 “He is near”로 오역했고, KJV, NIV, TNIV, WEB 등에서는 “it is near”로 원문대로 제대로 직역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번역 성경에서 “ἐστιν”(에스틴)을 “인자가 이르다(있다)”로 오역했기 때문에, 30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을 해석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30절을 근거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단순한 인간으로 치부해 버렸다. 인간 예수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종말이 온다고 큰 소리쳤지만, 잘못 짚은 허풍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통 보수 신학자들은 막13:30의 “이 세대”는 재림 전의 모든 세대를 가리킨다고 억지를 쓴다.

그러나 “이 세대”로 번역된 “ἡ γενεὰ αὕτη”(헤 게네아 하우테)는 당시의 그 세대, 즉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인 예수님 당시의 세대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보통 성경에서 말하는 한 세대는 약 45년이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심판의 예언과 예루살렘 멸망 사이의 간격이 약 45년 정도가 된다.). 그러면 막13:30을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아니라, 그것(it), 즉 “예루살렘 멸망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의 문맥 속에서 살펴보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로 번역된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 μέχρις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 메크리스 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에서 “οὐ μὴ”(우 메/never)는 부정의 강조를 나타내며, “전에”에 해당하는 “μέχρις”(메크리스)는 “~할 때까지, ~까지” 등의 의미를 가진 ‘접속사’로서, ‘종속 구문’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직역: 이 일이 다 일어나기까지)를 ‘독립 구문’에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문장의 강조점은 ‘독립 구문’인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직역: 이 세대가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에 있다.

따라서 “οὐ μὴ παρέλθῃ ἡ γενεὰ αὕτη μέχρις οὗ ταῦτα πάντα γένηται”(우 메 파렐데 헤 게네아 하우테 메크리스 후 타우타 판타 게네타이)를 직역하면,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때까지는(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NIV: this generation will certainly not pass away until all these things have happened.)가 될 것이다. 이는 이 세대, 즉 예수님 당시의 세대가 반드시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나타낸다.
 

글을 마치며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번역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인간의 번역에 오역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특히 기독교를 결정짓는 중요한 교리를 왜곡시킬 수 있는 오역은 반드시 피해야 하며, 만약에 이런 오역이 있다면, 빨리 찾아서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본론에서 다룬 막13:29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가 오역인줄 모른다면, 이 말씀에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즉 종말의 때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되므로 종말의 때를 안다고 하는 자들이 등장해서 막13:29을 들이대면, 지극히 성경적이므로 할 말이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도 강조하신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13:32-33)는 말씀은 괜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대강 적당하게 살다가도,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그때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인자를 맞이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은 특히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13:35)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