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30)

 

글을 시작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농부의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21:33-46; 막12:1-12; 눅20:9-19). 그런데 문제는 이 비유의 내용 중에 막12: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의 진술이 마21: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과 눅20: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의 진술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21:39과 눅20:15에서는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아 포도원 밖에서 죽였는데 반해, 막12:8에서는 농부들이 포도원 안에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여서 포도원 밖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두고 상당수의 학자들은 막12:8은 마가가 원래의 전승 그대로 기록한 것이고,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것을 알고, 그것을 반영해서 마가복음의 본문을 수정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흠집을 내는 이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이들 학자들의 말이 옳다면,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것을 알았는데 마가는 그것을 몰랐다는 말이 되며, 또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이 마태와 누가에게 감동한 것과 다르게 마가에게 감동했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마가복음이 원형이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비유에서 아들이 포도원 안에서 죽었다고 말씀하신 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성경관에 심각한 상처를 내어 성경의 무오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서로 모순이 없다. 단지 성경의 본문들이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필사자들의 실수와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그렇다면 막12:8이 마21:39과 눅20:15과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뭔가 모순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번역 성경들의 오역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번역 성경이 막12:8의 헬라어 원문을 바르게 번역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막12:8의 바른 번역은 무엇인가?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막12:8)

위 본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평행본문 마21: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과 눅20: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과 상이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막12:8에서는 아들을 포도원 안에서 죽여서 시신을 포도원 밖으로 내던진 것에 반해서, 병행 본문들은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쫓아내고 난 뒤에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일부 학자들의 이해대로 마태와 누가가 막12:8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번역 성경들이 막12:8의 원문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로 오역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필자가 검토한 모든 번역 성경이 이런 실수를 범했다. 아래 소개한 몇몇 번역 성경들을 보라. 하나같이 오역했다.

*공동번역: 그를 잡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졌다.

*새 번역: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현대인의 성경: 그를 잡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버렸다.

*NIV: So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KJV: And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cast him out of the vineyard.

*NASB: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막12:8의 오역은 번역자들이 막12:8에서 “내던졌느니라”로 번역된 동사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의 특징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헬라어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의 원형 “ἐκβάλλω”(에크발로)는 “쫓아내다, 몰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타동사로서, “~로부터, ~에서, ~로” 등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 “ἐκ”(에크)와 “던지다”(throw)의 의미를 가진 동사 “βάλλω”(발로)의 합성어로, 폭력적이고 강제적으로 “쫓아내다, 몰아내다”(drive out, expel lit. throw out)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동사 “ἐκβάλλω”(에크발로)의 중요한 특징은 이 동사는 시체와 같은 무생물을 목적어로 취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체만을 목적어로 취한다는 것이다(번역자들이 놓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도 예외 없이 “ἐκβάλλω”(에크발로)는 살아있는 생명체만을 목적어 취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 예를 두 가지 소개하면, 막5:40(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ἐκβαλὼν/에크발론/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11:15(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ἐκβάλλειν/에크발레인/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이다.

따라서 막12:8의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은 “내던졌느니라”보다는 막11:15에서처럼 “내쫓았느니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내던졌느니라”는 시체 등 무생물의 어떤 물체를 내던진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정교하지 못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사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은 반드시 살아있는 생명체를 목적어로 취하므로, 농부들이 포도원 밖으로 내던진(내쫓은) 것은 죽은 아들의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진 것은 그들이 죽인 아들의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아들이라는 것은 “죽여”로 번역된 “ἀπέκτειναν”(아펙테이난)의 목적어와 “내던졌느니라”로 번역된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의 목적어가 “αὐτὸν”(아우톤/him)으로 동일하다는 것에서도 입증이 된다. 만약 살아있는 아들을 죽여서 그 시체를 내어던졌다면, “죽여”(ἀπέκτειναν/아펙테이난)의 목적어는 살해당하기 전의 살아있는 아들이므로 “αὐτὸν”(아우톤/him)이 당연하지만, “내던졌느니라”(ἐξέβαλον/엑세발론)의 목적어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내던진 것이므로, 바로 앞에서 살아있는 대상에 사용한 목적어 “αὐτὸν”(아우톤/him)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내던졌느니라”의 목적어가 “죽여”의 목적어와 동일하게 “αὐτὸν”(아우톤/him)이 사용된 것은 “내던졌느니라”의 목적어 “αὐτὸν”(아우톤/him)이 “죽여”의 목적어 “αὐτὸν”(아우톤/him)과 동일하게 살아있는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가 오역이라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성 밖으로 끌려가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의 시신이 예루살렘 도성 밖에 내던져지지 않고,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장사되었기 때문이며, 이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미리 아셨고, 예수의 죽으심을 직, 간접적으로 목격한 마가도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거나, 마가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막12:8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막12:8의 헬라어 원문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앞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막12:8(καὶ λαβόντες ἀπέκτειναν αὐτὸν καὶ ἐξέβαλον αὐτὸν ἔξω τοῦ ἀμπελῶνος/카이 라본테스 아펙테이난 아우톤 카이 엑세발론 아우톤 엑소 투 암펠로노스)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쫓았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고”로 번역된 “καὶ”(카이)는 앞의 사건과 시간적으로 긴밀하게 연속될 때도 사용하지만, 시간의 연속과 상관없이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이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하는 접속사이다. 본문의 첫 번째 “καὶ”(카이)는 전자의 의미이며, 두 번째 “καὶ”(카이)는 후자의 의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막12:8을 다시 설명하면,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였는데,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서 죽였다’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막12:8이 다른 병행본문들과는 달리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 문두에 있는 까닭은 마가(또는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가 아들의 내쫓김보다 그 아들의 죽음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였다”(λαβόντες ἀπέκτειναν αὐτὸν/라본테스 아펙테이난 아우톤)를 도치해서, “그를 포도원 밖으로 내쫓았다”(ἐξέβαλον αὐτὸν ἔξω τοῦ ἀμπελῶνος/)보다 먼저 언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12: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의 “καὶ λαβόντες ἀπέκτειναν αὐτὸν καὶ ἐξέβαλον αὐτὸν ἔξω τοῦ ἀμπελῶνος”(카이 라본테스 아페크테이난 아우톤 카이 엑세발론 아우톤 엑소 투 암펠로노스)과 마21: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의 “καὶ λαβόντες αὐτὸν ἐξέβαλον ἔξω τοῦ ἀμπελῶνος καὶ ἀπέκτειναν”(카이 라본테스 아우톤 엑세발론 엑소 투 암펠로노스 카이 아페크테이난)과 눅20: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의 “καὶ ἐκβαλόντες αὐτὸν ἔξω τοῦ ἀμπελῶνος ἀπέκτειναν”(카이 에크발론테스 아우톤 엑소 투 암펠로노스 아페크테이난)이 서로 사소한 표현의 차이와 어순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동일한 의미의 문장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이 무생물의 목적격을 취하지 않는 “ἐξέβαλον”(엑세발론) 동사의 특징을 잘 알지 못하고, 막12:8을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로 오역함으로써,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 행위를 하고 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번역자들의 오역으로 인해서, 성령은 마가에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죽어서 성 밖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감동시켜 악한 농부의 비유를 기록하게 하고, 마태와 누가에게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던져진 후에 죽은 것처럼 감동시켜 악한 농부의 비유를 기록하게 한 것처럼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바른 번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번역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번역 성경에서 오역된 말씀을 읽었다면, 오역된 말씀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것이며, 특히 오역이 기독교를 좌우할 만한 중요한 교리에 관한 것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런 오역의 틈을 악용해서 이단을 만들어 내며, 많은 사람들은 오역된 말씀에서 생성된 왜곡된 이단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단의 미혹에 빠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의 ‘방언기도’, 김성로의 ‘부활복음’,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 옥성호의 ‘야고보를 찾아서’ 등 허접한 그의 책들,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하물며 신천지의 비유 풀이 등까지도 성경의 오역과 직, 간접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 목회자 등 성경 교사들은 이 부분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끝으로 번역 성경의 오역의 심각성에 대한 예를 한 가지 더 든다면, 막13: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이 또 하나의 실례가 될 것이다. 한글개역과 개역개정은 막13:29의 원문의 “γινώσκετε ὅτι ἐγγύς ἐστιν ἐπὶ θύραις”(기노스케테 호티 엥귀스 에스틴 에피 뒤라이스)를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로 번역했다.

그러므로 이 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이 가리키는 종말의 때를 제자들이 알 수 있다는 의미가 되며, 또한 막13:29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막13: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의 ‘무화과나무 비유’도 막13:29과 연계되어 종말의 때에 관한 비유가 되고 만다.

28절의 ‘무화과나무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제대로 신경만 쓴다면, 종말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단들이 오역된 막13:28-29을 제시하며, 자신들이 종말의 때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13:29의 헬라어 원문에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는 문 앞에 “가까이 ~ 이른”으로 번역된 “ἐγγύς ἐστιν”(엥구스 에스틴)에서 동사 “ἐστιν”(에스틴) 안에 ‘3인칭 지시대명사’, 또는 ‘3인칭 인칭대명사’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번역자들은 이 ‘3인칭 대명사’를 친절하게도 “인자”로 의역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미궁의 혼란 속으로 친절하게 인도했다. 이 부분은 “성경의 오역과 오석(31)”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아무튼 번역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오역들이 있으며(영어성경보다 한글성경에 오역이 더 많으며, 한글성경 중에 특히 한글개역과 개역개정에 화가 날 정도로 오역이 더 많다), 특히 중요한 교리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말씀에 대한 오역도 더러 있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맡은 자들은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더욱 더 예민하게 성경 본문에 바르게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도 번역 성경의 오역과 또 바르게 번역했다 할지라도 잘못 해석한 오석들을 찾아 바로잡는 일에 힘닿는데 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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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