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성사제도와 성적자의 사죄권에 관련된 문제는 개신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개신교회가 2가지 성례만(세례, 성찬) 인정하는데 반해 가톨릭교회는 7가지 성사(세례, 성찬, 신품, 고백, 견진, 혼인, 종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외형상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에 비해 성사제도가 5가지 더 많다는 차이보다도 성사제도에 대한 두 교회의 내적인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훨씬 더 심각하다.

이 차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직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사죄권이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이다. 개신교회 목사에게 사죄권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판단하실 겁니까?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우리들의 죄는 가톨릭의 사제들에 의해 사죄 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원죄가 사죄되고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들의 자범죄가 사죄 된다. 또한 종부성사 때 우리의 눈과 귀 와 입과 손과 발에 기름을 바르고 신부가 기도가 있으면 이 땅에 서 지은 죄가 완전히 사죄 되고 완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 성직자들의 사죄권은 마 16:19과 요 20:21-23에 근거되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만 용서 받을 수 있는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가? 오늘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죄의 사람은 고백성사로만이 아니라 전례의 기도와(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나) 신심기도로써도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단, 여기에는 반드시 통회가 따라야 하며 큰 죄는 고백을 꼭 해야 한다"「가톨릭 교리서 해설」-

위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신심기도로써 직접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큰 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는 마지막 부분에 붙어 있는 중요한 언급이다. 결국 가톨릭교회의 주장은 작은 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큰 죄는 반드시 사죄를 통해서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결론은 지극히 위험하고 우려할만한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가톨릭교회에서는 큰 죄는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용서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가톨릭 교리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 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기 위해 사제에게 가야한다고 한 번도 가르치신 적이 없다. 여러분 혹시 성경을 보면서 그런 내용을 본적이 있나요? 저 자신도 신학을 10년 이상 공부하면서 성경을 수 없이 읽어 보고 연구하고 묵상해 보았지만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용서함을 받고 거듭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의 만남의 사건도 사제들의 세례가 결단코 아니다.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사제들의 세례를 통해 비로소 원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에 이상하리만큼 집착하고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즉, 죄의 용서와 칭의는 일차적으로 말씀의 사건인 동시에 믿음의 사건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개혁자들이 목청 높여 그들의 잘못을 질타했다. "이싱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교황과 교회의 무오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교황 피우스(Pius) 9세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희에서 확정된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도 계속적으로 추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의 가톨릭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무오성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그 첫째는 교황의 무오성이고 둘째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는 주교단의 무오성이다. 이 무오성은 내용적으로 교황이 주재한 공의희의 무오성을 의미한다. 셋째의 무오성은 전체교회의 무오성이다. 이 3가지 무오성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이 3가지 무오성은 내용상으로 살펴보면 결국은 교황의 무오성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무오성은 하나님의 속성 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라는 잘못된 교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교황이 교황의 보좌에서 행하는 일을 무오한 그리스도의 일과 동일시 함으로써 교황의 보좌에 앉은 교황을 신격화 시키는 대단히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를 지극히 제한할 뿐만 아니라 이런 연구를 통해 밝혀지는 탄압받을 심각한 위협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멀어진 가톨릭에도 변천의 바람은 불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면서 "서구의 갈라진 교회와 교단"'이라는 항목 에서 개신교회에 대해 긍정적 관점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들은 개신교회 성도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0항).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죄인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놀라운 변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가 성경을 존중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기리고(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1항),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사랑과 덕행을 행하고자 하는 것(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제23항)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긍정성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회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형제적 대화로써 점차로 일치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제18항).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변화가 야기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다준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해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성경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고 성경의 번역도 금지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룩한 가히 혁명적인 업적이었다.

종교개혁시대에 그토록 억압했던 모국어 성경의 번역과 평신도들의 성경읽기가 오늘의 가톨릭에서는 모두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개신교정신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은 또한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를 허용함으로써 개신교회의 설교와 약간 유사한 말씀의 선포가 공적 미사 속에 등장한 것도 매우 긍정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성경 번역과 읽기가 허용되고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너무 크게 생각해 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제시하는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개신교회에서는 성경과 그 선포(케리그마)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를 우선하는 권위인데 반해 가톨릭은 그 반대로 교회의 권위가 다른 권위를 압도한다는 점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적 문제점이 오늘에 있어서도 가톨릭교회 내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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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호 목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대표, Ph.D)이며, 총신 신대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Liberty University, Ashland University, Bethany University(Ph.D)에서 상담학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