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호 선교사(KPM)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18년전 어느 날 저녁 우리 집 가정 예배가 떠오른다. “에스라서”를 읽고 말씀을 나눌 때였다. 우리 집 큰 얘가 갑자기

“ 아빠, 김선일씨가 누군지 알 어?” “물론 알지” “죽었대” 하였다. 나는 선교사가 꿈이었던 그가 이라크에서 참살(2004.6.22) 당한 뉴스의 스토리를 죽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우리 아이는 다시,

“우리 나라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70여년간 바벨론 포로의 시련을 통과하고 큰 소리로 찬양하는 백성이 된 것처럼 우리나라도 뭔가 있어” “그게 뭔데?” “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는 은혜가 아닐까”

뭣도 모르고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에 올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철없던 아이들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대한 긍정적인 자화상(自畵像)을 갖고 자란 아이들이 참 감사하고 대견스러웠다.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말로 지구촌 한복판에서 유난히도 오뚝 하나님의 필(FEEL)이 꽂혀버린 백성이 바로 코리아가 아닌가?

1950년6월25일,

동족의 비극, 민족상잔(民族相殘) 6.25가 발발했던 날이다. 약 100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거나 사상(死傷) 또는 납치되었고 전국이 초토화되어 버렸었다. 잿더미 속에서, 그야말로 절망 가운데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눈물을 삼키며 다시 일어서보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한편으로는 가난과 싸웠고, 또 한편으로는 무지, 불신앙과 싸웠다.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우리 또래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참담하였다.

전후(戰後) 몇 년간은 왠 일로 밭에는 먹을 것이 잘 자라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즐겨 먹거리를 찾는 섬의 바닷가와 푸르른 바다도 전쟁의 재앙을 맞은 한 민족을 외면하는 듯하였었다. 그래서 겨울에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양말은커녕 신발도 없어 구멍 난 교실 바닥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었다. 어머니들은 근근이 모은 마른 멸치, 문어 등을 싸 들고 명절과 특별한 날 쓸 쌀을 교환하러 육지에 도붓장사를 나서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아플 때는 계란 찜이나 꽁보리밥 위에 한 줌 얹혀 있는 하얀 쌀밥이 최고의 보약이었다.

바위 틈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먹을 물도 귀했고,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아 늘 코를 질질 흘리며 살았고, 겨울철엔 손등이 쫙쫙 다 갈라져 피가 나곤 하였다. 머리에 하얀 부스럼이 없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고, 어디 좀 아파서 사먹을 약이나, 찾아갈 병원은 상상도 못하였고, 속수무책 죽음을 기다리며 눈물짓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남해의 작은 섬에서 자란 나는 어느 날 학교의 착한 아이로 뽑혀 “낙도 어린이 육지 구경”이라는 프로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책보자기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좀 쑥스러웠지만 선물로 받아온 운동화를 신고 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 세대들이 들으면 전혀 이해가 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insect)가 얼마나 많이 득실거렸든지 매일 밤마다 손톱과 입으로 이를 잡고는 영하(零下)의 바깥에 널어서 이가 얼어 죽도록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어떤 분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꿀꿀이 죽을 다시 씻어 끓여 먹고 살았다고 한다. 요즘 좀 사치스럽게 붙여진 보신탕, 영양 탕이라는 것도 배가 부른 서구 사람들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봄철 보리가 팰 무렵 보릿고개 때에는 아직 여물지도 아니한 보리를 베어 불에 그슬러 손에 비벼먹기도 하고, 괜찮게 익은 상 싶은 이삭만을 골라 베어 살살 도구 통에(절구) 찧어 채로 까불고 밥을 하면 아직 솥에서 익기도 전에 푼 보리 특유의 풀 냄새가 진한, 그래도 싫지 않은 향긋한 깡 보리밥이 어찌도 그리 맛이 있었던지, 이런 시절 우리의 보통 인사는“밥 먹었냐?”가 되었다. 아니 그냥 “너, 먹었냐?”가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서라도 아무리 어려워도 학교를 안 가면 죽는 줄 알았었고, 주일에 교회를 늦거나 안 가면 어머니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 칠판과 백묵뿐인 학교였지만 정직, 근면과 성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로 행복한 학교였다. 이렇다 할 주일공과나 프로그램도 없는 주일학교는 예배 그리고 성경구절 암송, 초학 문답과 요리문답을 암송시키는 말씀과 기도의 용장들로 인해 가고 싶고 기다려지는 뜨거운 교회였다.

왠 주의 은혜, 주의 사랑이란 말인가?

6.25 일흔두 돌이 지나는 오늘, 우리 민족은 부분적으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자랑스럽게 세계 열강의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우리 민족에겐 뭔가 남다른 게 있는 모양이다. 어떤 분들은 “한(恨)”이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은근과 끈기”라고 한다.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열정”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전쟁의 폐허 속에 이 민족은 성경의 하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더욱 발견했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눈물을 닦아주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 품임을 체험하였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국가 경제도 성장했고, 세계를 섬기고 먹이는 요셉의 창고로 성장하고 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기독교 신앙은 삶의 전 영역에서 열정으로 폭발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은 물론 마침내 세계 시장을 누비는 초 인류 기업들을 바라보게 하였고 영적인 측면에서도 세계 최강의 교회 (가장 핍박이 심한 북한의 지하교회)와 세계 최강의 선교강국(宣敎强國, 한국 교회)으로 5대양6대주(五大洋 六大洲) 167개국에 22210명(KWMA2022)의 전사자들이 복음 증거 영적 전투의 일선에 있다.

이지러진 비극의 지난 역사는 우연(偶然)의 산물이 아니었다. 한국교회가 통과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역사(歷史)를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그의 구속사(救贖史) 성취를 위해 개인, 교회 그리고 국가를 그 수단으로 사용하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아, 코리아, 세계를 받은 위대한 한국 교회여,

소수의 동성애 운동(LGBTQ, 퀴어신학 이단신학사상)에 의해 처참하게 정복당한 미영, 구라파 교회들이 비참하게 시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라. 성경적 자유를 이유로 그 신앙을 따라 법적으로 기독교 국가로 만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자부하던 미국도, 마침내 그 자유를 남용하여(고전10) 이제 정부가 법적으로 성경의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고”여호와께 악을 행하는 자리를 꽤 찼다.(사사기6) 이것은 겉모습, 이름만 번지르르한 신학교에서 배출된 박사, 목사들, 그들이 거짓 진리에 동조, 옹호하면서 뿌린 씨앗의 당연한 열매였다.

화란의 개혁주의 교회, 그 진리의 용사들이라는 자들이 정교분리, 합리주의라면서 침묵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국 교회는 이단신학에 이미 무너져 내린 저 “서구 신학” 타령에 더 이상 목메지 않고 분별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요, 지혜이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한국교회가 범 교단적으로 기도하면서 함께 일어나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증거하는 교회를 파괴하려는 목표를 가진 이 사악한 악령의 차별금지법 쓰나미에 대항하여 힘차게 싸워 끝까지 이김으로 세계 교회에 멋진 본(Example)을 보여줌으로, “우리도 한국교회처럼 다시 영적 전투에 일어서자”라는 지구촌의 마지막 사명자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샤론의 꽃 예수(Rose of Sharon, 무궁화꽃)로 활짝 핀 그대 코리아, 새벽마다 용광로 같은 기도의 열정(熱情)으로 저 얼어 붙은 북녘 하늘을 이제 녹여버려라. 온 세상 만민에게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깃발을 힘차게 들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도전으로 한국교회 그 진리의 영적 전투 용장들은 다시 일어나 세계 선교의 열정에 불을 댕겨 폭발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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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