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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호 목사. 휴가를 맞아 이국 땅에서 가족과 함께 ... 

 

우리는 대중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기독청년들은 21세기라는 토양 위에서 이 땅에 기독교 문화를 심어야 하며 기독교 문화로서 대중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수적인 사항이 현대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이며 기독교적 비판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게 대중문화의 악한영향 속에 스며들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방어적 지식이기도 하다.

현대인에게서 문화의 차이는 세대차로 나타나며 이러한 세대차는 다만 지식의 변화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자동화기기에 대한 적응력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대차는 분명 가치관과 윤리의 변화조차 포함하고 있다. 결국 '신세대'가 일컫는 '구세대'에 의해서 '신세대'와 '구세대'로 나눠지게 되고 다시 신세대는 X-세대'와 '신세대'로 분리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문화의 급격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밑바탕에 무엇이 있는지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재미'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와 함께 노동의 분화, 단순화, 인간성의 상실, 자유시간의 증가 등으로 인해 '생에 대한 권태와 공허감'이라는 문제가 주어졌다. 이러한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와 공허감에서 벗어나려는 현대인이 '삶의 짜릿한 그 맛'을 제공하는 것이면, 그것이 직접경험이든 대리경험이든 상관없이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 불과했던 등산과 낚시가 인기 있는 여가선용으로 등장한다든지, 단순쾌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비디오 게임의 확산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쾌락이든지 빈도를 거듭해서 일정수준에 다다르면 그로 인한 충족감은 감소하기 때문에 좀 더 강렬하고 색다른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바로 거기서 현대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근대 이전의 고급문화(high culture)는 진선미(眞善美)라는 절대 가치를 표현해야 하고, 민중문화(folk culture)는 한 공동체의 공유 된 가치와 열망, 그리고 애환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그 생성 원칙과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현대문화는 '무조건 팔리면 된다.'는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철저히 지배된다.

'재미만' 있으면 되고, 그래서 팔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선정적이든 퇴폐 이든 비교육적이고 야만적이든 저열하고 비도덕적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재미가 문화의 생성원리가 되고 목적이자 결과이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인 '재미'가 문화의 전 영역에 확산되는데 있다. 정치가도, 성직자도, 언론인도, 운동선수도, 교육자도, 사업가도 모두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현대의 문화다.

재미에의 추구는 또한 그 대상과 방식에 성역을 두지 않는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로움을 소거할 수 있으면, 그것이 타인에게 있어서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죽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든, 허무적이고 말초적이든, 즐거움과 웃음을 유발시킬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결국 '재미'에 중독된 현대인은 윤리와 규범에 구애됨이 없이 어떻게든 기발하고 새로운 재미를 찾는데 인생을 보내고, 대중문화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면 된다는 새로운 문화논리로 그 존재를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인기'이다.

과거의 문화가 규범과 전통과 의미의 준거의 틀(frame of reference)로서 사회 구성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면, 현대의 대중문화는 그와는 반대로 대중의 취향에 의해서 생성되고 퇴락 하는 셈이다. 팔려야만 존재가치가 있고, 인기가 없는 문화는 도태된다. 그 결과 인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에 존재가치를 부여하는 또 다른 문화논리가 탄생한다.

예를 들면, 많이 읽히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고 곧 양서가 아니냐는 식의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현상이나 사실 그 자체가 윤리적 당위성의 근거가 되어버리는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다. 결국 현대의 대중문화는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재미'와 '인기'의 미명아래 현대문화는 소비자 중심주의로 흐르게 되고 또한 나의 판단과 경험자 느낌을 절대시하는 '직관적 주관주의'에 접맥하게 된다. 산업화가 가져온 도시생활은 과거의 가족이나 공동체, 혹은 종교기관과 같은 일차적 사회화 기관의 쇠퇴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사회적, 문화적 전통과 도덕적 규범은 급속히 약화되고, 현대인은 일종의 문화적 진공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 규범적 공백을 채우며 쉽사리 그 세력을 굳히는 것이 바로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 "라는 자유주의이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고, "어느 누구도 나를 판단할 수 없다.

대중문화의 이 같은 자유주의적 주장은, 이성을 배격하면서 경험과 느낌과 직관 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와 쉽게 연결된다. "추구해야 할 생의 또 다른 위대한 목표는 느낌과 감각이다. 이것이 남에게 직접적 피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부추겨대는 대중문화의 논리가 바로 낭만주의를 답습하는 것이다.
 

 

셋째는 '즉각적 충족감'이다.

대중문화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충족감을 지향하도록 한다. 테크놀로지의 경이적인 발전은 먹고 마시는 일에서부터 보고 듣고 물품을 구매하는 일까지 거의 모든 일에서 그 행위로 인한 충족감을 즉석에서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즉시적인 만족을 주며 접근이 용이하고 아무런 심미적 자질을 요구하지 않는 대중음악과 VCR, 비디오 게임, 나아가서는 신간, 베스트셀러까지 요약녹음으로 단 수십 분 안에 들어 버릴 수 있는 오늘의 현실이 '무엇이든지 쉽게 그 자리에서' 그 충족감을 만끽시키려는 현대의 문화풍조를 잘 대변한다.

단 몇 분 동안 텔레비전을 보아도 맘에 들지 않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가차 없이 "리모컨"을 눌러대는 문화적 조급성을 모든 문화행위에 적용하려는 현대인과, 그러한 현대인의 욕구에 편승해서 모든 영역에서 즉각적 충족감이 가능하도록 형식과 내용을 개조하고 있는 대중문화, 문제는 양쪽 모두에게 있다.

이로 인한 심각한 병폐는, 즉시적 충족감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그렇지 않은 문화를 외면하고, 심지어는 아예 문화로서의 유용성이 없는 것으로까지 치부하고 마는 사실이다.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모든 '의미 찾기'를 거부하는 '문화적 유아들의 전성시대'로 세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는 '몰지성적 경향'이다.

현대인의 즉각적인 충족감의 추구는 현대문화의 여러 흐름들과 융합되면서 반지성적(anti-intellectual) 혹은 비이성적(irrational)경향이라는 또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인 것조차 기분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데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렵거나 지적인 노력이 요구되면 배척해버리는 문화적 감수성이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 확산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화 풍토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즉, 이성과 지성과 논리, 그리고 윤리와 가치를 "복잡하고 골치 아픈 것", "어렵고 피곤하게 따지는 것", "꽉 막히고 답답하고 '고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인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반지성적 태도를 일종의 유행으로 혹은 시대적 풍조로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그 결과 피상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원초적인 감정추구가 전 문화영역을 휩쓸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들이 심각성을 거부하게 되는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다섯째는 '스타 지향'이다.

과거의 전통사회에서의 한 개인은 가족과 공동체가 제공하는'소속감'과 '독립심'에 의해, 공동체의 일원인 동시에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확고한 자아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핵가족화로 인하여 공동체 속에서 의 개성을 상실하게 되자 현대인들은 고립감과 소외감을 완화시켜 주는 '만인의 벗'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인이 추앙하고 싶은 모형으로서 스타를 각광하게 된다.

이러한 명사 추종 현상은 끊임없이 명멸하는 운동경기의 스타와 연예인들, 그리고 사회 각계 명사에 대한 시시콜콜한 신변잡기에서부터 애정편력까지 시작도 끝도 없다. 그것이 내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라도,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이 자기가 추앙하는 스타라면 잠시나마 열을 올려보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인정받고 드러나서 구별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때로는 빈정거림을 통해서, 때로는 동일시로, 때로는 대리만족을 통해서 해소해 보겠다는 현대인의 슬픈 모습이라고나 할까?

여섯째, 보이지 않게 스며든 인본주의, 물질주의, 실용주의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경향이 대두하는가 하면, 어제 두각을 나타냈던 풍조가 바로 오늘 퇴조하기도 하는 현대의 대중문화는 다원적인 문화요소들이 융합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가지고는 그 의미를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현상 밑에 존재하는 문화논리들이 그 외양처럼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이제껏 살펴본 것들은 실제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몇 가지 사상에서 파생된 현상들에 불과하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은 인본주의, 물질주의, 실용주의이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의식을 점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문화 근원으로서 오늘의 문화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러한 사상들이 얼마나 기독교적 진리에 부합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인간의 위치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물질주의는 물질에 대한 가치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영적 진리보다도 우선적으로 둔다는 점에서, 실용주의는 신앙의 실체조차도 실용성의 안목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사상들이 비기독교적인 것이 분명하고 또 우리 일상의 문화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밝히 드러낼 뿐 아니라 철저히 벗어 버려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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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호 목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대표, Ph.D)이며, 총신 신대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Liberty University, Ashland University, Bethany University(Ph.D)에서 상담학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