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백금산 목사(부흥과개혁사 대표)를 바르게 지도해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백금산 목사가 번역하여 보급한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 1964~)의 책 <언약신학>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이클 호튼은 현재 생존한 신학자로서 기독교를 심각하게 대적하는 창조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호튼은 창조언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창조 자체에 기초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부왕으로 임명된 인간 사이에  처음 맺은 언약은 창조언약, 자연언약, 율법언약, 행위언약들로 다양하게 불려져 왔다. 이 모든 용어들은 잘 어울린다. 이 언약은 한 의롭고 거룩한 인간 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언약조항들을 지킬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순종에 근거한 복과 불순종에 근거한 저주를 약속한다. 이것은 은혜의 상태가 아닌 무흠한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성에 관계된다. " (마이클 호톤 <언약신학>(백금산 역), 118)

호튼이 말하는 무흠 상태의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 영생의 복을 누리고,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에 처해지기로 창조 자체를 통해 언약되었다는 창조언약 개념은 성경과 무관한 신학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실패하여 저주받은 아담으로 인해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로 자신과 우리의 영생을 확보했다는 능동순종 교리는 이단사상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율법을 그러한 용도로 아담에게 주셨다는 말씀이 없다. 구약 시대의 많은 구원 받은 사람들 가운데 구원을 얻기 전에 먼저 율법을 지켜 구원의 자격(율법의 의)을 얻으라고 요구받았던 사례도 없다.

성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율법이 먼저 와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했다고 한다. 율법의 끝이 없는 정죄를 당하는 죄인들이 율법의 요구대로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유도하기 위해 율법이 먼저 왔다. 율법은 한 번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영생의 의를 약속한 적이 없고 단지 토끼몰이 하듯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몰았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 3:1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능동순종 교리가 성경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있다. 능동순종 교리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설명하는 바른 신학이면, 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 증거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용서를 주시기 위해 꾸준하게 사역하신 행적들만 소개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의 영생을 위해 율법 조항들을 지켜 영생의 의를 얻으시려고 시도하신 흔적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지 않고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구원신학은 이단사상이다.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얻지 못하는 영생의 자격(율법의 의)를 하나님이 대신 얻어주려고 성육신하여 인성을 취하셨다고 한다. 마이클 호튼도 율법을 지켜 영생의 의를 얻으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셨다고 했다. 

“개혁파 정통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 안에서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언약적 후손을 위한 구속을 성취하는 데 있어 그리스도의 인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 언약신학(백금산 역), 130)
 

백금산(부흥과개혁사) 목사가 번역한 마이클 호톤의 책
백금산(부흥과개혁사) 목사가 번역한 마이클 호톤의 책

 

그런데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 조항들과 씨름하셨다고 볼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기껏 그리스도의 인성이 옹알이하던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성전에 나갔다는 것 정도가 성경에 나온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 즉 장차 성육신하여 자기 백성의 죗값을 대신 갚으실 작정을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 이미 구원을 누리고 있는 구약 성도의 삶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부모님이, 또는 옹알하는 인성의 상태에 계셨던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한 율법을 준수하신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이 자라 성인이 되셨을 때에도 영생의 의를 얻으려고 의도적으로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셨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중요한 내용들을 누락하신 것일까? 귀한 금이 지표면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땅 속을 헤집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헤집어야 그리스도의 참 구원의 방식인 능동순종을 볼 수 있는 것인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으셨다고 볼 내용은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청교도주의자들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 구절들을 멋대로 해석하면서 억지 주장을 할 뿐이다. 능동순종주의자들이 오용하는 대표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가 끝없이 죄를 지적하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 죄인과 동일한 인성을 입고 오시어 자기 목숨으로 율법의 저주를 대신 감당했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친히 우리의 죄값을 갚으셨다는 단순한 내용이다. 그런데 능동순종 이단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이런 구절을 오용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를 주장하고자 청교도주의자들이 오용하는 성경 구절이 또 하나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7)

마이클 호톤도 다음과 같이 이 구절을 오용하면서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능동순종으로) 영생의 의를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마 3:1, 5:17) 아버지께 완전히 순종하는 33년의 생애에 관련되다.” (마이클 호톤, 130)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철저하게 율법준수하려고 성육신했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율법은 자기에게 순종하여 영생의 의를 얻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구약의 모든 율법들과 선지자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죄를 지적하는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당하시는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이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5,6)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은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의 죗값을 대신 감당하여 하나님의 죄용서를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성육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명하는 구원의 특별계시였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이 율법 조항들을 철저하게 지켜 영생의 의를 마련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궁극적 메시지대로 자기 목숨으로 우리들의 죗값을 갚으시겠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의 정당성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능동순종 이단 교리는 대체 어떻게 개혁교회 속으로 스며들었을까? 필자가 지금까지 연구한 바에 의하면, 거짓된 언약 신학의 산물이다.

1) 능동순종은 칼빈 이후 시대의 유럽의 개혁교회 신학자들, 종교개혁이 회복한 신앙을 교회에 정착시키던 시대의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창조언약’ 개념의 산물이다. 능동순종은 그것과 짝을 이루는 거짓 구원의 교리이다.

2) 창조언약 개념은 나중에 윌리암 퍼킨스에 의해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되어 칼빈의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과 달리 사람의 준비, 노력, 참여를 강조하는 청교도 개혁운동의 신학적 동력원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동시에 복음보다 먼저 율법의 기능으로 회심을 이루어낸다는 회심준비론도 청교도 목사들의 목회신학으로 시작되었다. 

3) 창조언약(자연언약) 개념으로 먼저 등장하여 퍼킨스에 의해 행위언약으로 공식화된 것이 영국의 청교도혁명 시대에 탄생된 작성된 웨신서(wcf, 1647)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이후 요하네스 코케이우스와 후대의 바빙크 등 거의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그것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이 물리친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쓴 왕관으로 변신하여 다시 기독교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호튼은 특이하게 생명나무를 먹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합당한 자격을 획득하여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영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담은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순수한 상태에서 창조되었다. 그래서 적합한 인간 파트너로서 자격이 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완전한 순종을 명령하시고, 이러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권리(선물이 아니라)를 약속하신다.” (마이클 호튼, 125).

호튼이 아담이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내용은 틀리지 않다. 칼빈과 우리는 그 상태에서 반역하는 범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아담이 살면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라고 본다. 생명나무는 먹어서 영생을 확보하는 수단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 백성으로 모든 은혜와 죽지 않는 생명으로 창조되어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로 하나님과 언약한 아담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과 복에 대한 언약의 상징물(담보물)이었다.

칼빈과 참 개혁신학자들을 생명나무를 그렇게 본다. 칼빈은 아담이 자격을 얻어 생명나무를 먹었으면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칼빈은 생명나무가 처음 창조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원히 보장된 생명을 상기시키는 성례전적 상징물이었다고 가르쳤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기독교강요, 4.14.12)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호튼은 범죄 이전의 아담이 순종을 테스트 받은 시험 기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했다. 만일 아담이 시험 기간을 잘 보냈으면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얻어 영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시험 기간 아담론’ 또는 ‘에덴동안 단기 세입자론’이라며 웃는 아담에 대한 이상한 이론의 출처가 마이클 호튼이었던 것이다. 호튼의 말을 보자.

“창조 자체는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안식일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시험 기간 동안 충성스럽게 순종한 것에 대한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 125)

“타락 이전, 아담 안에 있는 인간성은 죄성도 없었고 의롭다고 확정되지도 않는 상태였다. 아담은 시험 중에 있었다.” (마이클 호튼, 119)

세상에 이런 유치한 성경 해석이 또 어디에 있는가? 아담이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또한 타락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영원한 언약을 맺지 않았다면, 대체 죽게된 아담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대신 죽으시면서 그를 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설명하지 못하는 창조, 원죄 이론은 결국 문선명의 창조, 원죄 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왜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모르는가?

원죄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반역한 것이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하나님 백성의 원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니,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죄용서-칭의에 대한 바른 신학이 나오지 못하였다. 그것이 마이클 호튼과 다른 개혁신학자들의 현주소이다.

“타락 이전, 아담 안에 있는 인간성은 죄성도 없었고 의롭다고 확정되지도 않는 상태였다. 아담은 시험 중에 있었다.” (마이클 호튼, 119)

호튼은 아담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하나님 백성도 아닌 상태로 창조되어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얻는 시험 기간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아담이 하나님 백성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죽으면 그냥 두시고 다시 흙으로 하나를 더 만드시면 그만이었다. 왜 하나님께서 범죄가 일어난 바로 그날 그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심으로 그의 죄를 회복하겠다고 예고(창 3:15)하셨을까? 

종교개혁 교회에 거짓된 언약신학이 들어와서 종교개혁이 허물어졌다. 하나님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는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하나님 백성도 아닌 이상한 것을 만드셨다고 한다. 그 이상한 것이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 시험 기간을 잘 통과하면,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주기로 했다는 창조언약(자연언약, 행위언약) 개념은 허구이다. 그 이상한 것에 합당한 구원론으로 제시된 것이 능동순종이다.

그런 내용이 어떻게 칼빈의 신학과 같은 신학인가? 이렇게 다른 내용인데, 그들은 칼빈의 신학이 이후 칼빈의 계승자들에 의해 더 세련되게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호톤도 그렇게 억지를 부렸다. 

“칼빈과 칼빈 이후의 해석자들 사이의 상반되는 차이는 인정될 수 없다. 말하자면 칼빈의 사상은 칼빈의 신학적 계승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기 보다 세련되어지고 발전되었다.” (마이클 호튼, 120)

백금산 목사가 이 책도 번역하여 부흥과개혁사를 통해 한국 교회에 보급하였다. 백금산 목사가 전파한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청교도들의 거짓된 신학이 이제는 거대한 아나콘다가 되어 한국 장로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백금산 목사는 영원히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이클 호톤의 이 책을 보급하면서 백금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이클 호통의 <언약신학>을 원서로 처음 읽은 것은 2006년 유럽지역 코스타 강사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습니다. 약 열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며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백금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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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