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대운 목사(이후 정대운)의 황금사슬 12회에 대해 녹취하여 보내주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한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이처럼 오래 이어간 적이 없습니다. 그만하자는 생각이 자주 들었으나, 하나님께서 정대운의 설교를 매우 좋아했던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시었고, 오히려 널리 알리기 위해 힘써 녹취하여 저에게 보내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두 번 남았네요.

5:05~6:37분>
“설교로서는요, 제가 대한민국에서 처음이에요. 대한민국에서요. 여러분 유튜브가서 ... 그런데 거기에서 황금사슬은 저희 교회만 설교하고 있습니다. 황금사슬 안에 뭐가 있습니까? 견인이 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견인 설교도 안 해요. 왜 견인 설교를 안 하냐면, 우리 한국은 견인의 교리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게 값싼 믿음이에요. 값싼믿음!

즉 견인은 뭐냐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하는 순간 영원한 구원이에요. 이걸 우리는 값싼 믿음, 값싼 구원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이 값싼 구원, 값싼 은혜가 이미 많은 교회에 범람해 버렸기 때문에 견인이라는 주제로 지금 저는 3주 동안 설교를 하는데, 그래도 할게 많은 데, 미안해서 저는 3주로 줄인거에요. 4번하면 화 낼까봐! 그래서 3번으로 했는데, 보편적으로는 견인을 5분도 못합니다.

왜냐 그러면, 견인을 말할 때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이게 다에요. 이게 다입니다. 더 이상 없어요. 그러니깐 무슨 견인을 주제로 가지고 설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이렇게 설교가 안되다 보니깐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에 값싼 믿음으로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상 말씀드리지만, 이 견인이란 단어를 한문으로만 알아도 값싼 은혜, 즉 구원받았으니깐 나는 이제 구원자격 획득, 완전히 구원 ...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아요.” (정대운)

 

 

정대운의 이 설교는 어떤 면에서 볼 때 맞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일반화시키면서 자신의 '성도의 견인'에 대한 이론을 강조하니 문제입니다.

신앙과 구원의 원리를 바르게 아는 성도들 가운데, 정대운의 설교한 것처럼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했으므로 이미 영원한 구원을 따 놓았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믿으면서 부끄러운 방종과 그릇된 자유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사역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정대운이 정상적인 교회 신자들에게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마치 보편적인 일처럼 말하는 이유를 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대운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란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율법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또한 구원을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율법의 기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정대운은 퍼킨스-웨신서가 주장하는 1)아담과 하나님의 행위언약, 2)그리스도의 능동순종, 3)청교도 준비교리(회심준비론)를 중요한 기독교 신앙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1) 행위언약은 죄도 없고, 동시에 완전한 생명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 백성도 아닌 ‘변종으로 창조된 아담’(또는 ‘보호관찰 대상자 아담론’, ‘수습기간 아담론’, ‘에덴마을 단기세입자 아담론’)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과 하나님 백성 자격을 얻었어야 했다는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2)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는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그리스도가 모두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의 자격을 획득하여 우리의 것이 되게 했다는 비성경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입니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영생의 자격을 얻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청교도주의자들은 웨신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웨신서 속에 그런 내용이 있을지라도 (또는 없을지라도), 우리의 영혼의 운명과 신앙의 근거는 언제나 성경 66권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구원과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웨신서가 아니고 성경 66권을 통하여 그리하셨습니다. 

웨신서는 1600년대 영국의 개혁자들이 그 성경을 이해하는 그 시대의 방식이 진하게 베여있는 좋은 신앙 문서입니다. 저도 웨신서를 사랑합니다. 사는 동안에는 웨신서를 늘 머리 맡에 두고 살고, 죽을 때에는 웨신서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웨신서가 성경 위에 있거나 성경과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이 웨신서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1600년대 영국 청교도 개혁자들 추론하여 말한 것을 절대적 진리로 믿고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은 미련한 행동입니다. 그런 모습은 신천지나 동방번개와 달리 하나님이 고급지게 저주하신 자들의 특징이고 '짐승의 표'와 상관되는 우상숭배입니다. 웨신서의 일부 성경적이지 못한 내용과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만든 과거의 학자들의 이름들에다 영혼을 거는 것은 미련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3) 회심준비론(청교도 준비교리) 죄를 지적하는 율법의 기능을 통해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음을 주어 구원받게 하신다는 지독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 등의 믿음의 사람들은 율법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심준비론은 거짓 사상입니다. 

정대운처럼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목회자는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도 특별한 강조와 열정을 보입니다. 율법이 준수되어지는 삶과 성도의 견인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 속에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성도의 자세와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재창조하여 살리신 성도는 다시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성도의 견인 교리입니다. 요일 2:19절이 말하는 것처럼, 중간에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이단, 타종교 속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것이지 중간이 구원을 잃고 지옥으로 간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19)

개혁교회의 성도의 견인 교리의 핵심은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받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배반하거나 복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실수라고 넘어질 수는 있어도 영권히 그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힘과 노력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을 택하시고 복음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해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위대한 웨신서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이러한 끝까지 견딤은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값없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사역의 효력과; 그들 속에 성령과 하나님의 씨의 거하심과, 은혜 언약의 본질에 의존하며, 이 모든 것들로부터 또한 그것의 확실함과 무오(無誤)함이 나타난다.” (WCF 17:2)

정대운이 지적한 것처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강조하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오도하면서 나쁜 자유와 방종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만들어서 가르친 선조들의 의도와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청교도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정대운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대운의 이전의 설교에서 확인된 것처럼, 정대운 믿는 사람의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교묘하게 부정합니다. 믿고 교회에 나온 후 구원에 대해 계속 공부한 후에나 구원의 확신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가르치지 않으므로 결국 성도의 견인교리가 값싼 구원의 빌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지 않으면, 즉 회개와 선한 행실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대운이 말한 것처럼, 성도의 견인 교리를 구원파적으로 악용하여 죄짓기를 담대히 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더 심각한 문제는 정대운이 구원을 지속적인 행위(율법준수)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면, 바로 그 순간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부정하고, 대신 교회에 나와 계속 공부한 후에나 구원의 확신이 가능하다고 설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합당한 행위(율법준수)가 이어져야 구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관점에서 성도의 견인을 설명하니 맞으면서도 틀린 내용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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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