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성우 목사(이후 정성우)의 <청교도 준비교리란 무엇인가>의 2장 “준비교리의 전제”를 살펴보자. 2장에서 정성우가 주장하는 것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정성우는 구원 이전에 죄인이 죄를 깨닫고, 영적인 비참함과 불행을 인식하고 한탄하는 과정이 먼저 진행된다고 한다. 정성우의 주장을 직접 읽어보자.

“죄인들에게 중생의 은혜를 주시기 전에 죄의 각성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이 악으로 가득함을 보게 하시면, 죄에 짓눌려 마음이 가난해지도록 하시면, 애통을 일으시키고, 지독한 자기 교만과 자신의 모든 존재가 무너지도록 인도하신다.” (정성우, 39)

“준비교리는 위의 과정 가운데 율법의 기능, 즉 죄의 각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통회로 나오기 전 죄로 인해 짓눌리는 상태까지를 지칭한다.” (정성우, 40)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 죄를 깨닫고 영원한 저주를 받아 지옥에서 끝없이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과 처지를 인식하고 한탄하는 단계를 먼저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 정성우가 주장하는 회심준비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과정은 사람에게 언제, 그리고 얼마나 오랜동안 지속되는 것일까? 여기서 정성우는 말하지 않았으나, 다른 청교도 회심준비론자들에 의하면 길게는 몇 십년, 짧게는 몇 주 동안이라고 한다.

청교도주의자들은 이것을 영적각성이라고 한다. 영적으로 각성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다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지에 대해 청교도주의자들은 그것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분명한 사실은 청교도 회심준비론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 전에 영적으로 각성되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지옥으로 향하는 자신의 불행을 슬퍼하고 한탄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것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회심준비론주의자들은 자기의 죄를 혐오하면서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쉽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뿐, 진정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과연 성경에서 정성우의 구원 사상의 사례를 찾을 수 있을까? 정성우가 주장하는 것처럼, 먼저 죄와 영적인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난 후 구원을 위해 노력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찾아가서 구원에 이르는 사례를 성경에서 찾을 수있을까?

먼저 사도 바울의 사례를 보자. 정성우는 사람이 먼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에 관하여 매우 특별한 열심을 가졌던 사울(훗날의 바울)은 계속 율법에 소망을 두었을 뿐이다.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죄와 불행한 처지를 깨닫고 슬퍼하면서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자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박멸하는 일에 특별하게 헌신하였다. 그리스도가 직접 사울에게 자기를 계시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정성우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을 통해 사울이 죄를 깨닫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하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정성우는 사울이 율법에 대해 박사급 지성인이었을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으므로 영적각성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후 성령과 동행하였던 바울이 자신의 선교와 목회 현장에서 정성우처럼 회심준비를 일으키는 율법의 기능을 활용하였었는가?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자기의 죄에 대해 절망한 후 구원을 위해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그리스도를 찾아가서 구원에 이른 사람의 사례를 찾을 수 있는가?

죄에 대한 각성을 거친 후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정성우의 회심준비론과 사도 바울의 목회는 완전히 무관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정성우는 중생(구원)은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상당히 길고 연속적인 과정이라고 한다. 정성우의 주장을 직접 읽어보자.

“준비교리 또는 율법의 기능은 중생의 과정과 연결된다.” (정성우, 39)

정성우는 중생이 단번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렇지 않다면 ‘중생의 과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성우의 다음의 말을 보면,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순간적 사건이 아니고 일정한 기간을 통해 발생되는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청교도들은 회심을 단번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면서 이러한 회심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성우, 400)

정성우의 회심의 개념이 무슨 내용인지 매우 궁금한다. 정성우의 글을 자주 접한 사람으로서 내가 그의 회심 개념을 추측하자면, 구원과 무관한 사람에게 “나 같은 영원히 멸망받기에 합당한 죄인이 살길은 오직 예수 믿고 죄용서 받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만 하겠다!”라는 마음이 떠오르는 것이다.

과연 정성우가 말하는 회심이 이런 것이라면, 무엇이 문제일까? 정성우가 자연인에게서 “예수 믿어야 하겠다”는 생각(결단)이 일어나는 것과 중생이 동일사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의 역사로 죽은 영혼이 소생되지 않으면 “예수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 없다. 죄로 죽은 상태로 태어난 죄인이 성령의 역사로 중생되지 않으면, “예수 믿고 죄용서 받고 구원 받아야 하겠다!”는 믿음이 나타나지 못한다. 그것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성령의 중생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정성우가 사람이 구원 이전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깨닫는 긴 과정을 거치고 순차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죄용서 받아야 하겠다는 믿음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영혼이 살아나기 전에 사람이 자기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알미니안들의 거짓된 신앙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근본적 죄, 하나님께 반역한 죄를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영혼이 중생되는 것은 각기 다른 사건이 아니고 동시에 일어나는 동일 사건이다. 절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니다. 그리고 정성우가 사람이 자기의 모든 죄들을 깨닫고, 매우 슬퍼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을 하나하나 다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반역한 죄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대속하였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중생이 일어난다. 결코 우리가 범한 모든 죄들을 깨닫고 인정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죄들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는 구원 이후 평생 진행되는 성화의 과정이다.
 

3. 정성우는 죄인에게 먼저 율법이 역사함으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스스로 찾아가게 된다고 한다. 정성우의 주장을 직접 읽어보자.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초등 교사라고 증거한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회심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성우, 39)

정성우와 청교도 회심준비론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율법이 신약 시대의 개인들을 그리스도에게 몰아가서 구원을 얻게 만드는 기능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신약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율법을 전하면 성령이 그들에게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회심을 일으킨다고 한다. 근거로 정성우가 거론한 갈라디아서 3:24절을 직접 읽어보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4)

이 내용만 보면 정성우의 주장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앞 구절과 뒷 구절을 보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5)

믿음이 오기 전까지 율법이 지배하였고 믿음이 오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율법(초등교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시대가 도래함으로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는 옛 신앙의 길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말하는데, 왜 정성우는 신약의 사람들이 구원을 위해 먼저 율법을 배우고 들어야 한다고 하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율법을 보내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고, 그리스도가 오시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향한 율법의 요구대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셨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신약 시대의 개인들의 구원의 여정을 말한 것이 아니고,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했다.

정성우가 주장하는 율법의 기능을 통한 회심준비, 즉 개인에게 죄를 깨닫게하여 스스로 그리스도를 믿도록 준비시키는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은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이 정성우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인정되고 있으면, 그곳에 이단이라는 괴상한 꽃이 그곳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단독 기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성우가 구원 받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를 발견하게 하는 율법(말씀)의 기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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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