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투스 선교회 대표 정성우 목사의 회심준비론 (서문)

정성우 목사(이후 정성우)는 현재 인천의 ‘예수안에하나교회’의 담임목사인데, 청교도 회심준비론 목회로 인해 예장 합동 이대위의 조사대상이 되어 있는 인물이다. 정성우는 자신이 이대위 조사를 받게 되자 급히 회심준비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소신을 담은 책 <청교도 준비교리란 무엇인가: 율법의 용도와 은혜의 준비교리>를 출판하였다 (21년 10월).

그런데 정성우는 자신이 이 책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이대위 조사가 더 탄력을 받게 될 것임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사상을 한 눈에 파악하여 더 쉽게 조사하도록 책으로 출판해 주었다는 점, 둘째 이 책을 위해 추천의 글을 쓴 사람들까지 이대위가 한 그물에 엮어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저자 소개를 보면, 정성우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중1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 교육 받았고, 미국의 Jericho Christian Colleage and Seminary를 졸업했다. 나는 미국에서 20년 정도 살았으나, Jericho Christian Colleage and Seminary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정성우의 문제의 사상과 이 학교가 연관되어 있어 보이지만, 이 학교에 대한 정보가 없으므로 더 말하기는 어렵다.

오늘은 정성우가 쓴 이 책의 서문으로 쓴 내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회심준비론에는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인간 스스로 구원을 준비시킬 수가 있다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스스로 구원을 절대 준비시킬 수가 없고 성령께서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죄의 각성을 일으키시고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달아 주님게 달려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견해이다. 필자는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첫 번째 견해를 부인하며, 역사적으로 인정해온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정성우)

정성우의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로마교회, 알미니안 신학과 청교도 준비론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정성우의 말처럼, 로마교회는 인간이 완전히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길을 준비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초기 도움의 은총’ 또는 ‘도움의 은총’을 베푸심으로 사람이 구원에 대해 자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한다고 가르친다. 로마교회는 초기 도움의 은총은 다음과 같은 개념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은총 안에 살도록 도와주는 은혜. 은총이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요, 하느님 자신이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인간이 받아들이고 응답하도록 초대하여 주신다. 인간이 이 응답의 생활을 하도록 도움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도움의 은총이라 한다. 즉 하느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당신 도움의 은총을 거절치 않으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할 수 있게 하며, 자신을 준비하고 개방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인간 자유의 편에서 힘이 되어 주는 현실적인 도움을 도움의 은총이라 한다. 이 호칭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화(聖化)의 은총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이 은총이 인간의 자유를 도우면서 함께 작용하는 은총이라 하여 협격의 은총(gratia cooperans)이라고도 하였다.” (인터넷 카톨릭 백과사전 GoodNews, ‘도움의 은총’)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도움의 은총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단지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로마교회는 도움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공히 허락되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믿음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로마교회는 구원을 향한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고 도움의 은총은 “하늘(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의 의미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움의 은총이 먼저 주어져서 사람이 구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질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구원론이다.

정성우가 주장하는 청교도 회심준비론 또는 준비교리도 사실상 이와 동일하다. 로마교회의 도움의 은총 개념과 정성우가 주장하는 회심준비론의 ‘영적각성’ 개념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성우와 다른 청교도 준비론자들은 먼저 율법이 선포될 때 성령이 신자들에게 영적각성을 일으킨다고 한다 (정성우의 조엘 비키 번역 책 참조).

정성우와 회심준비론자들이 말하는 율법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각성은 영혼을 중생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단지 사람이 자기의 죄와 지옥에 가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을 자각하고 겸비한 자세로 구원을 갈망하게 되는 영적인 상태이다. (참고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부흥은 바로 이 상태를 추구하는 심각한 사이비적인 부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정성우는 회심준비론의 핵심적 개념 ‘영적각성’에 대해 네 번이나 직, 간접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성령께서 ... 죄인들에게 죄의 각성을 일으키시고” (16 페이지)

“성령의 역사로 겸비케 하시는 역사” (16 페이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각자에게 참된 각성이 있는 것” (17 페이지)

“성도들의 참된 각성을 통하여 교회가 더욱 거룩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17페이지)

정성우가 이와 같이 말하는 영적각성은 구원의 상태가 아니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갈망하게 되는 상태이니,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초기 도움의 은총과 같다. 도움의 은총을 경험함으로 로마교회 사람들은 그때 비로소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믿음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자유의지를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길을 택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길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 가지기를 거부한다. 청교도들도 율법과 성령의 역사로 영적각성이 일어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영혼의 의사’인 청교도 목사들이 그들을 잘 인도해야 했고, 또한 그들이 잘한따르고 배워야 영적각성이 구원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같다. 영혼의 의사들인 청교도 목사들과 하나님의 사제들인 로마교회의 신부들의 구원에 대한 역할과 기능이 동일하다. 

알미니안 신학도 구원 이전에 선행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한다. ‘알미니안들의 5개항론’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선행(先行)하시는, 깨우치시는, 계속되는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은혜란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선행되는 은혜가 먼저 있으므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반응하고 협력함으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알미니안 신학이다. 알미니안 신학의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나 청교도 준비교리의 영적각성이나, 로마교회의 도움의 은총은 동일한 개념이다.

알미니안 신학의 또 다른 형태인 웨슬리안 신학도 구원 이전에 하나님의 ‘선행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하고, 사람이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그것에 대해 반응하고 협력함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웨슬리안 신학의 선행은혜, 청교도 준비교리의 율법과 성령의 영적각성, 알미니안 신학의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 로마교회의 도움의 은총은 용어의 차이이지 내용상의 차이가 아니다. 모든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일부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를 깨워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다. 
 

2)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장로교회)가 청교도 준비론은 언제 인정했는가?

정성우는 “역사적으로 인정해 온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라고 말하였다. 정성우가 말한 두 번째 견해는 "인간 스스로 구원을 절대 준비시킬 수가 없고 성령께서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죄의 각성을 일으키시고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달아 주님게 달려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견해"라는 내용이다. 마치 청교도들의 준비교리가 개혁교회(장로교회)의 역사적 신앙인 것처럼 둘러치기 했다.

그러나 구원이 사람에 의해 준비된다는 신학이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인정되었다는 정성우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성우가 로마교회와 알미니안 신학의 구원론을 거부한다고 하니, 아마 독자들은 순간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수있는 틀린 내용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거짓 사상을 올바른 것인양 들이미는 술책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장로교회)는 율법과 성령이 주는 영적각성을 받은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게 된다는 신학을 만들고 가르친 적이 없다. 개혁교회의 신학의 원리와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2) 공교회가 결정한 성경적 교리들이다.

3) 초대교회의 속 사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4) 칼빈과 다른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공통적인 가르침들이다.

5)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칼빈이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친 내용들이다. 

6)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유럽의 개신교회들에게 정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들 속의 대부분의 올바른 내용들이다.

정성우가 주장하는 청교도 준비교리는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먼저 율법이 전파되어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 받는 길이 준비되어 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위의 개혁신학(장로교회)의 원칙들 어디에서 그런 주장이 설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1)

성경은 율법과 성령이 준다는 영적각성을 받아야 사람이 구원을 향하여 달려간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정성우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언제 율법을 대표하는 구약의 할례를 언제 받았는지 질문한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믿어 의인이 된 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그 육체에 표시했던 것이 할례였다고 성경은 정성우에게 말한다. 기독교는 은혜를  따라 믿으면 구원을 얻는 종교이다. 칭의를 얻기 전에 율법이 먼저 작용한다는 정성우의 주장은 기독교에서 헛소리에 불과하다. 

정성우가 회심준비론이 성경에 근거하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신앙에 합당하다고 우기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율법을 대표하는 할례를 받아 의인되었고, 그 후에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성경을 개작하는 것과 같다. 율법이 먼저 작용하여 구원의 복음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는 정성우는 성경을 향하여 머리를 치켜드는 독사의 모습이다.

다음의 웨신서의 말씀들도 정성우의 주장을 반박하고 물리친다.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에 대한 웨신서의 말씀들 어디에도 율법이 먼저 전파되어야 구원을 주는 복음이 제대로 역사하게 된다는 내용이 없다. 정성우는 내가 웨신서도 안 믿는다고 핑계를 잡았다고 하는데, 왜 자신은 웨신서와 다른 구원론을 주장하는가?

웨신서는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이 구원이라고 한다.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영혼 속으로 영접되기 위해 율법이 먼저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내용이 혹시 있는지 정성우는 웨신서를 읽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필자는 청교도한다면서 웨신서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청교도한다고 자랑하려면 먼저 웨신서나 철저하게 읽고 따르기를 바란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은 그것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 때문에 말씀 속에 계시된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다고 믿으며; 그것의 각 구절이 담고 있는 바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니, 명령들에는 순종하며 경고들에는 떨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한 약속들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구원얻는 믿음의 주된 행위들은 은혜 언약에 의해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여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며 의지하는 것이다.” (WCF 14:2)

“이 믿음은 정도에 있어서 서로 달라 약하거나 혹은 강하고; 자주 그리고 여러 방식으로 공격을 당하며 약화될 수 있으나 승리를 얻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한 확신에 이르니,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완성자이시다.” (WCF 14:3)

한국 교회의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복음보다 율법을 먼저 선포하라는 청교도 준비교리를 전적으로 반박한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이해하였다. 복음의 도입을 위한 준비과정이 율법의 수여이다. 율법으로 구원이 불가능함을 말하고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보이기 위해 율법이 도입되었다. 율법은 본래 지킬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고 율법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 구원은 율법을 행함에 있지 않고 율법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신학서론, 201)

“율법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이후에는 율법이 구원의 길에서 전적을 배제되었다. 처음부터 복음만 선포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루터의 전통에 선 사람들은 계시가 율법과 복음으로 나타났으므로 이 둘을 늘 함께 상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진로를 계시하고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복음선포 전에 율법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서론, 201)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전가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범죄하므로 율법은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죗값을 갚으시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수하셨다. 계명을 범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피로 갚으셨으므로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다. 그리고 피로써 이루신 죄용서 곧 의를 믿음으로 받았다. 따라서 율법준수의 요구가 믿는 자에게서 다 성취되었다. 율법이 계명을 범한 죗값을 다 받았으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요구할 것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율법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신학서론, 202)

“율법은 구원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역사한다. 본래 율법은 언약 백성들의 생활규범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활규범이고 구원의 길은 전혀 아니다.” (신학서론, 202)

정성우는 어서 율법을 먼저 선포하여 구원을 주는 복음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평안히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준비교리를 가르쳤다는 황당무개한 소리를 계속하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불쌍한 추종자들의 영혼들이 성경을 향하여 머리를 들이밀다가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는 독사의 신세가 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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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