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창조, 모든 것의 출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딤후 3: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받은 계시의 책이다. 이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한다(계 10:6).

창세기 전반부(1-3장)는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는 창조에 대한 자기 선포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성경의 첫 말을 ‘태초’(bereshith)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관자요 시간의 창조자임을 나타낸다. 시간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므로 하나님 이외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함부로 단정적 어조로 미래와 종말을 예언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사 47: 12-14).

​시간은 창조된 것이므로 세상은 우리 사람의 육체처럼 유한하며 끝을 가진다(계20:11). 세상의 종교 사상들이 우주와 세계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는 순환적 시간관(circular view of time)을 가진데 비해, 기독교가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을 가지는 이유다.

이 특징을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은 교부 어거스틴(St. Aurelius Augustinus, 354-430)이었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 두 가지 시간관을 구분한다. 시간을 보는 관점이 시간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한다(벧후 3:8). 공간과 물질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삼위일체적 완성된 세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세상은 시작되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19세기 말 이 말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것이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성경이든 과학적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창조 신앙으로 본 과학, 창조의 질서를 다루는 하등학문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인 성경과 하나님의 경륜의 책인 자연)이 늘 불필요한 긴장을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 하셨다면 과학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성경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은 오류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긴 하나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비록 성경이 과학의 언어로 쓰여지지는 않았으나 과학의 이름으로 탐색하는 일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즉 과학은 창조의 질서를 탐구하는 하등학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적 해석이 필요한가와 더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성경은 창조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이 창조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우주의 연대 문제는 과학적으로도 관심 영역이므로 과학적 논증의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과학책은 아니다. 따라서 과학의 언어로 모든 성경을 환원하고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반과 토끼는 일반적으로 되새김 동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사반을 되새김질 동물이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반과 토끼를 반추동물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금새 모순을 발견한다. 이 해석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성경이 말하는 되새김의 범위를 훗날 생물학자들이 만든 분류학(taxonomy)의 틀에 갖다 넣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를 훗날 성립된 생물분류학의 틀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멸종된 생명이나 검증 불가능한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론과 무신론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성경에 나타난 리워야단이나 탄닌(Tannin), 라합, 비히못 등을 공룡이나 어룡 등 과거에 멸종해버린 자연적 동물로 보느냐(the naturalistic perspective) 아니면 신화적 동물로 보느냐(he mythological perspective) 상징적인 존재로 보느냐(the emblematic perspective)에 따라 해석 전반에 대한 다양한 단면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역사적 동물이냐 상상 동물이냐 아니면 역사적 동물이기는 하나 멸종된 이후 그 이미지가 변색되어 온 것인가 그런 부분들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관점이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가 하는 사실이 중요할 수 있다. 즉 과학적 해석 자체가 성경의 권위 내지는 무오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같은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먼저 계시로서의 성경과 세속적 신화 사이에 어떤 충돌과 연속성이 있었는지를 배우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관련된 이러한 성경 해석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논쟁, UFO와 외계생명체 논쟁, 생명공학 논쟁, 의약 분쟁, 생명의료윤리, 코로나19 전반에 대한 기독교적 판단 등 여러 이슈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들 주제들을 판단해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즉 여러 부분에서 과학을 도구로 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이 금 새 드러나게 된다.

​과학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이밖에도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생태적 환경과 관련한 과거의 역사를 탐색하는 부분과 특별히 초과학의 영역이랄 수 있는 태초의 창조를 수용하는 데 있어 과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진화론에서는 제임스 허튼 이래로 동일과정적인 지질학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성경은 대격변론적인 홍수의 역사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하고 구분해야 하는 가하는 점 등이 바로 성경의 일반 계시 영역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볼 수 있다.

​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과거 해석자들보다 훨씬 풍부한 이해의 범위와 경험을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신학자 슐라이엘 마허가 말한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최소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 선이해(preunderstanding)가 넓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즉 계시의 점진성 아래에서 과학적 자료들은 성경 해석에 일부분 공헌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과학적 방법과 성경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은 먼저 관찰의 대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관측하여 자료를 분석하고 필요하면 실험한다. 시간과 상황과 조건을 달리하여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실험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나면 비로소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여기서 일반적 과학적 방법이란 성경적 해석에 많은 제한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창조의 사실에 대해 관측하고 실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의 한계가 과학적 설명 즉 성경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필요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성경 해석처럼 과학적 방법 자체가 가진 논리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비록 창조를 관찰한 사람이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을 재현(再現) 하거나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과학적 해석은 가능한 것이다.

​과학적 해석의 유용성과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은 과학적 방법의 틀 안에서 성서 해석의 한계를 가진다. 과학 자체의 한계가 있다. 기원에 대한 과학적 입증 자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성서가 말하듯 믿음의 영역으로 남는다. 창조와 진화도 입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에 있어 과학은 분명 제한적이다. 기독교는 과학의 영역이 “영원히 자연에 순종하는 과학”이 아니라 때로는 창조주인 신이 직접 개입하여 그 질서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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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