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의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1회)

피터 와그너는 80년대부터 ‘성령의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of Holy Spirt)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피터 와그너는 제 3의 물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제 3의 물결은 60년에 일어난 은사 운동이나 1900년대 초에 시작된 오순절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복음주의 교회들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성령의 물결이다. 제 3의 물결의 기원은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나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90년대 말에 크게 꽃을 피웠다고 본다 ... 제 3의 물결에도 성령은 이전과 같은 동일하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나, 그 특성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제 3의 물결 시대의 성령의 사역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제 1의 물결과 제 2의 물결의 성령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므로 마땅히 이 모든 성령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동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제 3의 물결의 가장 명백한 특징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에 있지 않다.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절름발이들이 다시 걷고, 귀신이 떠나고, 그 외의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제 3의 물결 시대의 성령의 역사하심의 특징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에서도 나타났다.

재 3의 물결의 특징은 성령세례와 성령세례를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방언에 대하여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 자신은 사람들이 나를 은사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나를 은사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 내가 속한 교회,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곳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에 관하여 마음을 활짝 열고 있는 복음주의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피터 와그너의 제 3의 물결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80년대에 일어난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와 가까이 교제하였고, 플러신학교에서 함께 공동강의를 맡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존 윔버에 의해서 주도된 그 강의에서는 빈야드 운동에 관한 이론과 더불어서 실습도 이루어졌다. 공동강의자로서 존 윔버의 모든 강의에 참여하였던 피터 와그너는 존 윔버를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이적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령의 물결이 일어났다고 느꼈다. 피터 와그너는 그것이 제 1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 제 2의 물결인 은사 운동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새로운 성령이 역사하시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이름을 '성령의 제 3의 물결'이라고 하였다.

 

신사도 운동이 제 3의 물결

제 3의 물결의 선두주자는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을 시작한 존 윔버(John Wimber)이다. 그리고 성령이 일으키시는 대량의 ‘기사와 이적’(Signs and Wonders)들을 통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전도하고 신자들의 신앙을 키울 수 있다는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라는 존 윔버의 신학이 제 3의 물결의 실체였다. 신사도 운동을 한국 교회에 전파하는데 많이 공헌한 예영수 박사가 제 3의 물결에 관하여 했던 말을 읽어보자. 예영수 박사도 제 3의 물결의 시작은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이었고, 그 뒤를 이었던 90년대의 모든 빈야드-신사도 운동가들이 일으킨 거짓된 부흥운동들이 모두 제 3의 물결에 속한다고 하였다.

“제3의 물결이 일어난 것은 존 윔버(John wimber)목사의 빈야드(Vineyard)교회였으며, 빈야드 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물결은 ‘토론토 브레싱(Toronto Blessing)’으로 알려진 존 아놋(John Arnot) 목사의 토론토에어포트교회로 이어졌으며, 이 물결은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의 브라운스빌교회로 연결된다.”

제 3의 물결이라는 말은 곧 신사도 운동을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 3의 물결의 시작은 빈야드 운동이었으나, 빈야드 운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사도 운동으로 통합되어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이 신사도 운동으로 발전된 것은 마이크 비클(Mike Bickle)이라는 인물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82년부터 미조리 주 캔자스(Kansas)의 예언자들과 함께 활동하였던 마이크 비클은 예언자 무리들을 이끌고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연합하였다. 존 윔버의 무리들과 마이크 비클의 무리의 연합은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졌다. 이들이 연합이 깨어진 것은 존 윔버와 토론토 쪽의 다른 빈야드 운동가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존 윔버가 다른 빈야드 운동가들과 결별하여 분열할 때 존 윔버와 친밀했던 마이크 비클도 함께 떨어져 나왔고, 존 윔버는 그 다음 해인 1997년에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이들의 연합은 지금의 신사도 운동이 나타나고 발전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의 ‘기름부음’(anointing) 사상과 마이크 비클과 캔자스 시티의 예언자들의 예언, 계시, 사도, 선지자 사상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신사도 운동의 중요한 골격이 형성되었고 급진전되었다. 또한 이후 존 윔버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세계적인 신학자 피터 와그너가 다양한 신사도 운동 이론들을 수립하여 가르침으로서 신사도 운동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피터 와그너가 주장하는 ‘성령의 제 3의 물결’은 곧 세계적 이단운동인 신사도 운동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제 3의 물결의 거짓 방언

피터 와그너는 오순절 운동(제 1의 물결)과 은사 운동(제 2의 물결)의 뒤를 이어서 일어난 제 3의 물결은 많은 면에서 이전의 물결들과 같으면서도 또 다르다고 한다. 제 1의 물결과 제 2의 물결의 핵심은 성령세례였다. 이미 성령을 받아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에게 다시 두 번째로 성령세례가 임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언이 성령세례와 긴밀하게 연결된 증거라고 하였다. 오순절 운동에 비해 은사 운동에서는 방언에 대한 강조가 조금 약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방언이 성령세례의 가장 일반적인 증거라고 주장되었으므로 근본적으로 은사 운동이 오순절 운동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피터 와그너의 핵심적인 주장은 제 3의 물결에서는 방언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성령세례에 관련하여 방언이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제 3의 물결 시대에서는 방언이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상이라고 피터 와그너는 주장한다. 그 대신 방언 외의 다양한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방언을 가장 중요한 성령세례의 증거로 이해하였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다음은 제 3의 물결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령의 은사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방언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자신의 아내의 사례를 설명하는 피터 와그너의 말이다.

“나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신실하게 노력하고 구하였으나 끝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매우 성숙한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자매들을 알고 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한다 하여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또한 목회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일에 해당된다. 나의 아내 도리스(Doris)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는 방언에 대해서 열려있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아내를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녀에게는 귀신을 내어 쫓는 은사는 있으나 방언하는 은사는 없는데, 오순절 은사주의 신앙을 가진 형제들과 자매들이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피터 와그너는 자신의 아내에게는 귀신을 추방하는 은사가 있음에도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순절 은사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관점에 의하면 자신의 아내가 성령세례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말이다. 방언을 성령세례의 거의 절대적인 증거로 보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피터 와그너가 하는 말에 대해서도 수긍할 수 없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성령께서 마치 시대의 어떤 유행이나 바람을 타시는 것 같다. 이전의 한 때에는 성령세례와 함께 꼭 방언이라는 현상을 일으키셨고, 근자에 들어서는 방언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일으키시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과연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역사하시는 방법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것일까?

참으로 진리가 혼탁해진 이 시대에 온전한 믿음의 길을 찾고자 소원하는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다음의 질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방언은 어떤 방언이었을까? 둘째, 초대교회 이후 사라졌던 방언이 어떻게 갑자기 1906년에 이르러서 봇물 터지듯이 터져 온 세상에 퍼졌을까? 셋째, 그런데 어찌하여 그 방언이라는 것이 1980년대부터는 다시 별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넷째,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종류의 괴상한 현상들을 방언의 자리를 대체하였다는 피터 와그너의 주장은 과연 진실인가?

참 믿음의 길을 발견한 성도라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미혹하면서 영혼들을 사냥하는 사탄이 변화무쌍하게 장난하였다는 것이다. 그릇된 영성과 믿음을 분별할 줄 모르는 대 다수의 사람들이 속임당하며 불행하게 놀아났던 것이다. 결코 다르게 해석하고 변명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진리는 유행을 따라가는 양복의 칼라와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이 불과 100년 만에 이렇게 자주 변하였다면, 이후에는 또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또 앞으로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믿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새로 떠오르는 그럴싸한 운동들과 이론들에 현혹되어 쉽게 자신의 신앙의 노선과 스타일을 바꾸는 사람들만 불쌍하여 질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항상 먼저 현혹되어 앞장서 가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유명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 다음은 많은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영향을 미친 예영수 박사의 말이다.

“제3의 물결은 제1, 2 물결의 내용을 받아들이면서 성령 충만을 통한 성령의 능력(power)을 강조한다. 제1, 2, 3의 물결이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역사 하시는 분이 같은 하나님의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제3의 물결에서는 병자가 치유 받으며, 절름발이가 걸으며, 귀신이 쫓겨나며, 신약시대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능력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에서도 여러 해 동안 나타났다. 제1, 2의 물결과 제3의 물결이 구별되는 중요한 변화는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표식으로서의 방언의 역할과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는데 있다.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보지만 제3의 물결에서는 방언을 은사중의 하나라고 본다.”

국내외에서 많은 치유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온누리 교회의 손기철 장로도 존 윔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제 3의 물결의 핵심사상인 기름부음을 한국 교회에 크게 전파하였다. 특이한 방언현상은 손기철 장로의 사역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방언현상을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는 손기철 장로의 방언에 대한 이론은 오순절 운동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방언에 관한 손기철 장로의 입장은 피터 와그너의 제 3의 물결의 입장과 같다. 다음은 방언에 관한 손기철 장로의 말이다.

“성령세례를 받으신 분들 가운데는 방언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방언은 모든 은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언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일부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못 받은 것이다’라는 말까지 합니다. 방언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방언 받지 못했다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제 3의 물결의 '성령충만'

피터 와그너는 제 3의 물결의 중요한 특징이 성령충만이라고 하였다. 그는 제 3의 물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충만이라고 설명하였다. 피터 와그너는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이 가르치는 성령세례에 대한 내용이 그릇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핵심은 이미 성령으로 중생한 신자에게 두 번째 성령의 은혜, 즉 두 번째의 축복으로 임하는 성령세례를 받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성령세례라는 말 자체가 그릇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라고 이전의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잘못 가르쳤다고 했다.

“나는 성령으로 충만게되는 일은 한 번이며 마지막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 생애를 통해 자주 반복되도록 기대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믿는다. 성령세례의 사건은 우리가 거듭 날 때 한 번이며 마지막 경험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채워지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성령세례(baptism)란 표현보다는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filling)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실 성서적으로는 오순절 날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보다는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다’(행 2:4)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피터 와그너는 제 3의 물결은 결코 성령세례를 받는 운동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방언을 중시하면서 방언을 받으라고 한다거나, 성령세례를 받도록 가르치는 것은 결코 제 3의 물결의 성령론이 아니라고 한다. 다음은 피터 와그너가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제 3의 물결 그룹 안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다든지, 다른 은사보다 방언을 중시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성령세례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사건이라고 이해한다. 성령을 받은 신자가 또 다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그런 사상을 가르치는 이론은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바로 이점에서 피터 와그너가 주장하는 제 3의 물결은 이전의 물결들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이전의 성령의 물결들에서는 성령을 이미 받은 신자들이 다시 성령의 은혜를 입는 성령세례를 강조하였으나, 피터 와그너는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은 다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만 남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은 성령으로 중생하게 되는 것과 같은 단회적은 사건이 아니고 일평생 동안 자주 반복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내용을 표면적으로 보면 피터 와그너는 성령의 세례에 대해 건전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전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그릇된 성령세례 사상으로 인하여 많은 오해가 일어났던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오늘 날의 방언이라는 소리내는 현상과 성경의 방언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는 것만 빼면 그의 성령사상은 우리들이 크게 염려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피터 와그너가 여전히 비판을 받는 것일까? 왜 이전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약간 모습을 달리하면서 여전히 그릇된 성령세례 운동을 전개한다고 비판받는 것일까? 왜 제 3의 물결도 결국 구원받은 신자가 다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그릇된 사상을 추구하는 운동에 불과하고, 다만 방언이 이전의 운동들처럼 강조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폄하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피터 와그너가 여전히 비성경적인 관점에서 ‘성령세례’,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를 혼동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오순절 운동의 관점에서 ‘성령세례’라는 말과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오순절 운동에서는 이 두 용어의 의미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오순절 운동에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은 곧 성령세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오순절 운동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이미 성령을 받았지만(요 20:22) 성령충만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문론 요한복음 20:22절은 결코 예수의 제자들에게 신약의 성령이 임하였음을 의미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앞에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 4)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 2장의 이 구절을 통하여 성령충만을 설명한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약 50일이 지난 사도행전의 오순절 날에 강림하신 성령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충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충만하여 지는 것이다. 성령세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즉 성령세례를 경험하면서 성령으로 더 채워지는 것이 곧 오순절 신학의 성령충만이다. 이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방언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운동의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이 채워지는 개념으로 '성령충만'을 말하고 있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하게 나아가는 개념임을 염두해야 한다.

오순절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제 3의 물결인 신사도 운동에서 사용되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성령세례, 성령체험, 성령세례의 체험, 기름부음 ... 등의 다양한 용어들과 호환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용어들 사이에 특별한 차이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예수 믿음으로 성령받아 중생한 신자에게 다시 나타나는 성령의 임재하심(성령세례)을 뜻하는 말들이다.

한국의 신사도 운동가인 온누리 교회의 손기철 장로가 그렇게 강조하는 기름부음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그는 ‘영육이 온전히 성령님께 사로잡혀서 그 분을 통해 삶의 인도함을 받는 상태’가 성령충만이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의 상태’가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의 이러한 주장은 자기의 느낌과 상상에 근거하였을 뿐이지,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한국의 오순절 신학을 대표하는 순신대학교 총장이었던 박정렬 박사도 성령충만을 반복되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박정렬 박사의 책을 보니 한국과 세계의 오순절 운동을 대표하는 조용기 목사가 박정렬 박사에게 이 책을 쓰도록 오래전부터 권면하였고, 마침내 이 책이 출간되어 매우 기쁘다면서 기꺼이 장문의 추천사를 썼다. 이것을 보면 오순절 운동에 관한 박정렬 박사의 학문과 가르침은 매우 큰 신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박정렬 박사가 성령충만에 관하여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성령충만 속에 그리고 성령충만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세례를 ‘성령충만’ 혹은 ‘성령의 충만’이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순신대학교의 총장이었던 박정렬 박사도 성령세례 안에서,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더 받고, 경험하는 것이 곧 성령충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언제나 병행하는 개념이다. 조용기 목사도 성령충만에 관하여 동일하게 가르치고 있음을 보았다. 그의 책「4차원의 영성」에서 성령충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조용기 목사도 중생 이후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임하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충만이 얻어진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입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구원 받은 후에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성령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련회나 부흥회 등에서 뜨거운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방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는 일시적인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의 임재가 계속되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며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때 온전히 성령이 중만한 복음의 능력을 입은 사람으로 살 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운동과 그 연정선상에서 일어난 제 3의 물결인 신사도 운동에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가 반복됨으로 성령충만이 얻어진다는 매우 비성경적인 성령사상임을 우리는 주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성령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무형의 ‘기운’을 받는 것 같은 오해를 유발하게 된다. 단전호흡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우주의 기운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늘 힘과 정성을 다해 깊은 호흡에 몰두한다. 기를 받아서 몸 안으로 축적하는 것이 단전호흡을 통한 수련의 본질이다.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은 성경이 이러한 방식의 성령충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서철원 교수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충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충만은 물독에 물이 가득 담기듯 가득한 의미로서의 성령충만은 성경에 없다는 진리이다. 성령이 머리끝까지 우리 몸을 가득 채우는 식의 이해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 이해는 다분히 비 영적이고 물리적인 사고가 들어있다.”

 

'성령충만'이란?

그렇다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죄를 사하시고, 정결과 거룩을 얻은 신자의 몸과 영혼에 성령을 부으심이 곧의 성령의 세례이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입어 죄 사함을 받는 순간 성령이 임하심으로 성령세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는 일생 동안 단 한번 뿐이며, 한번 우리 안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행 16:6,7)은 우리 속에서 영속적으로 거하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욱 온전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고 본받게 되는 성령의 인격적인 다스림을 누릭 되는데, 이 상태가 곧 성령충만이다.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인격적인 지배하심을 받으므로 신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재현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또한 성령충만의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성령을 더 받고, 또 체험하고, 기름부음이라는 개념으로 또 넘치도록 받고, 그래서 무슨 괴이하고 특이한 현상과 체험이 또 생기고 ... 이런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 내용은 그릇되고 이단적인 성령충만 사상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4,15)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장차 오실 성령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위의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대로 예수를 높이고 사랑하는 올바른 성도가 되어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스럽게 섬기는 자세가 곧 성령충만한 성도의 모습이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니, 성도들이 신실한 복음전파의 도구로 쓰여지는 것 자체가 성도의 성령충만의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으니, 이단 사설을 전하는 요망스러운 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바른 복음을 전하는 신실한 목사의 설교의 진가를 알아보고 따르는 신자들을 성령충만하다고 칭찬해야 한다. 기름부음, 성령체험 ... 등의 허탄한 짓들을 장려하는 불건전한 사람들의 집회를 기웃거리지 않고 바르게 예배하는 진실한 믿음의 교회를 택하여 꾸준하게 예배하면서 올바른 가르침을 달게 받는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내세우면서 우리를 은근하게 속였다. 자신이 주장하는 제 3의 물결이라는 것이 이전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그릇된 성령사상과는 확실히 다른 것처럼 주장하였다. 1906년의 아주사의 특이현상으로부터 시작된 오순절 운동을 거부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시도한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자신들의 주장과 운동을 이전에 있었던 것들과는 다르게 특화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있었다. 60년대에 은사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오순절 운동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도 방언에 대해서만 약간 다르게 주장하면서 마치 모든 것이 오순절 운동과 다른 것처럼 선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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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