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의 제왕 조용기가 한 평생을 마치고 처음에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갔다. 우리 모두가 같은 여정을 거칠 것임을 알고 우리는 조용기가 남긴 다양한 족적들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 우리도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갈 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필자는 고인이 되신 영계의 제왕 조용기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글들을 종종 올렸다. 성경을 말하고 전파하면서 교묘하게 성경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버리는 고인의 사상과 신학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고인이 되신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이 때에 여전히 같은 내용의 글을 쓴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문론 앞으로 우리의 신앙의 건전하고 성경적인 지속과 유지를 위해 계속 해야할 일이지만, 당분간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종교의 제왕으로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정도의 뜨거운 신앙심과 영성으로 살다간 조용기의 좋은 면 하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80년대 초에 했던 설교의 일부를 보여주는 다음의 영상을 보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었을 때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로 꽉 채우고, 그곳은 상함도 없고 해 함도 없는 진선미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저주와 가난이 다가오게 된 것은 우리 조상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네게 된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저주의 가시를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 아래 있는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이중으로 ... 가시관을 쓰심으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림으로 여러분과 나의 저주를 모두 다 속량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정상적인 가난과 저주의 노예가 되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중략)”
 

필자는 이 영상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세계 종교의 제왕 조용기가 인류의 불행의 원인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었을 때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로 꽉 채우고, 그곳은 상함도 없고 해 함도 없는 진선미의 세계였습니다. 오늘 날 이 저주와 가난이 다가오게 된 것은 우리 조상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네게 된 비정상적인 것입니다.”(조용기)

청교도 개혁주의는 영생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도 받지 못한 상태로 창조된 에덴 동산의 주인공들이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면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받기로 하나님과 언약했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아담이 그리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영원히 죽었다고 가르친다.

조용기는 에덴 동산의 주인공들이 영생,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그 외의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완전하게 주어진 지복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에덴 동산의 주인공들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반역죄를 범하여 그 모든 것을 잃고 저주를 받았다고 가르쳤다.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선악과의 의미와 종교의 제왕 조용기의 신학의 선악과의 의미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선악과는 영생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녔느냐의 상징이다. 조용기의 신학이 가르치는 선악과는 영생, 하나님의 자녀됨, 그 외의 모든 완전한 은혜 안에서 창조된 에덴 동산의 주인공들이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것인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반역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의 증거인 것이다.

선악과를 다르게 보는 청교도 개혁주의와 조용기의 신학의 차이는 구원론에 이르러서 완전하게 길을 달리하였다. 청교도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해 사람으로 성육신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가 같았다. 그러나 아담이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율법을 대신 완벽하게 실천하여 우리 대신 영생을 누릴 자격, 의로움을 인정받기 위해 성육신했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칭의 교리이다.

조용기는 하나님이 죄로 죽은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방법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반역죄를 범하여 저주 받았으므로 그 반역죄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라고 조용기는 가르쳤다. 조용기는 반역죄를 범한 당사자들은 그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므로 하나님이 친히 그 죗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보았다.

조용기는 하나님 자신이 죽은 자기 백성들의 반역죄를 대신 감당할 수 있는 무죄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시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셨다고 보았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죗값으로 대신 죽으시니 우리의 반역죄가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었고, 반역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가 해결됨으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저주의 가시를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 아래 있는자라 하였음이라’”(조용기)

조용기의 구원에 대한 이해를 보니 세계 종교의 제왕으로서 한 세상을 그리스도를 능가는 믿음과 열정으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이것이로구나 하는 감탄이 생기려고 한다. 조용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했다. 청교도 개혁주의가 가르치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여 영생에 들어갈 자격, 즉 의로움을 얻으셨다고 보지 않았다. 

조용기의 입장에서 볼때, 만일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을 누릴 자격인 의로움을 얻은 분이라면, 그는 불교에서 잠시 기독교 속으로 나들이 나온 종교 선생이다. 그런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정대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신 성자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과 달리 조용기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바르게 이해했다. 문론 조용기의 문제가 없거나 약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신칭의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바르게 파악했으나, 이신칭의를 주는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신으로 변질시킨 사람이 조용기이다.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에 의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고, 우리의 노력과 열정에 의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더 받거나 덜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이신칭의에 대한 그의 이론적 올바름이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랬건 저랬건 조용기는 영계의 제왕으로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두며 살았던 역사의 인물이다. 큰 홍수의 탁류와 같이 쏟아지는 세상의 위로를 넘치도록 받고 있는 고인의 유족들과 그를 사랑했던 많은 분들에게 부디 하나님의 위로도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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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