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회)

이창모 목사의 저서 표지사진

베드로와 120여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성령은 세 가지 특이한 현상을 동반하면서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하셨다. 성령이 그들 위에 처음 임하셨을 때 동반된 세 가지 특이한 현상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한 것’과 ‘그들이 다른 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령은 왜 이런 현상들을 동반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일까?

첫 번째 현상인 ‘바람 같은 소리’는 오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청각적인 신호(sign)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성령을 경험한 자가 없었다. 따라서 영이신 성령이 아무런 신호 없이 조용히 오셨다면 그 누구도 성령의 오심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제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면서 오신 것이다. 뛰어난 필력으로 거짓방언을 아주 그럴싸하게 기술하는 책을 저술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을 어지럽히는 김우현 PD는 이 장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1)

“오순절에 임한 ‘급하고 강한 바람’은 하나님의 보좌 가운데서 강력한 천사들이 이 땅에 임한 것이다. 이사야가 보았던 그 천사들의 날갯짓이 얼마나 강렬하면 강한 바람처럼 들어왔겠는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그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의 통치와 그 역사들을 이루고 복종하기 위해, 믿음의 후사들을 도와 놀라운 능력과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이 역사가 나타난다.”

성령(루아흐)이 오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루아흐) 같은 소리가 온 방에 가득했다. 이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때문에 순간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바람(루아흐) 같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령(루아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바람’의 의미도 있지만 ‘성령’을 의미하기도 한다(요3:8 참고). 성령은, 성령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제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루아흐)이 지금 여기에 오셨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바람(루아흐) 같은 소리로 신호를 보내시며 오셨던 것이다.

두 번째 현상인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은 단지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shape)만이 아니라 활활 타는 불의 모습(appearance)이었다면, 그것은 오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이다. 여기서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문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란 표현이 무엇을 묘사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불은 하나님의 현현 또는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출3:2; 13:21-22; 19:18; 신4:12; 삼하22:13; 시105:39; 겔1:4; 말3:2).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한 것’은 오신 성령이 이제부터 이들 각 사람 속에 들어가 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시각적인 증표(sign)였다. 방옹자(거짓방언 옹호자)들은 ‘혀’가 헬라어로 ‘글롯사’(glw/ssa)라는 이유만으로 ‘방언’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의 갈라지는 모양이 마치 혀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 모양을 묘사하기 위해 ‘글롯사’를 사용했을 뿐이다.

제자들은 바람(루아흐) 같은 소리로 성령(루아흐)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불의 모양으로 그 성령이 하나님이신 줄 알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신 성령이 자기 속에 들어와 거하신다는 것은 감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신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이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와 거하신다는 믿지 못할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확실한 시각적인 증표(sign)를 주신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귀신들이 자신의 몸에서 나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돼지 떼를 시각적인 증표로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막5:1-15 참고). 성령은 이렇게 분명한 증거들을 이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제자들이 확신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야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다음 명령인 ‘땅 끝까지의 증인’ 사역(행1:8)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성령 오심의 세 번째 현상인 제자들이 ‘다른 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지 성령을 잘 모르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양’의 두 가지 증표(sign)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성령은 왜 이들에게 ‘다른 언어(방언)들로 말’하는 또 다른 특이한 현상을 행하셨을까?

이것도 다른 두 가지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신 증거였을까? 오순절주의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의 주장대로 방언 현상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면, 방언 현상이 있을 때마다 방언보다 더 명백한 성령세례의 증거인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동반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순절 날 이후 방언 현상이 있었던 어떤 경우에도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동반되었다는 성경 기록은 없다.

오순절주의자는 오순절 날 이후부터 성령이 임하실 때는 방언 현상만 그 증거로 나타났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오순절 날 이후 성령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 현상이 나타나지 않은 경우들(예를 들면 사마리아 지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오순절주의자는 사마리아 지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방언 현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말이다.2)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인가?

오순절주의자는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 현상을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처음 임하셨을 때 제자들이 방언을 했으며, 다른 곳에서도 성령이 임하실 때마다 사람들이 방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근래에 오순절주의(제3의 물결)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가 아닐 수 있고, 성령 세례의 증거일지라도 유일한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 발 물러서기는 했다.3)

하지만 그들의 집회 현장이나 저서들 속에서는 여전히 방언을 성령 세례의 유일한 증거로 내세우며 방언과 구원을 직접 관련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받도록 종용하고 있다. 오순절주의에서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주장을 은연중에라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것이 누구나 방언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한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켜 주며, 교세 확장이라는 이익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방언은 오순절주의자의 주장대로 정말로 성령세례의 증거일까?4) 아니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는 아닐지라도 성령세례의 여러 증거들 중 하나이거나 성령 충만의 증거임에는 틀림없는 것일까? 오순절주의자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몇 번 있은 방언 현상을 근거로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먹을 때 커피를 함께 마셨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다음날에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또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단 두 번의 이런 현상을 지켜 본 종업원이 그것을 근거로 ‘저 사람은 샌드위치를 먹을 때는 반드시 커피를 마신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다음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커피 대신 홍차나 우유를 마실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 현상이 몇 번 있었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실 때마다 반드시 방언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판단이다. 만약 성령세례 때 방언이 필연적인 현상이라면,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이 중요한 사실을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너희 속에 성령이 계시므로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고전3:16) 깨닫도록 상기시킬 때 당연히 방언을 그 증거로 내세웠을 것이다. 또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신 모든 경우에 예외 없이 방언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순절 날 이후 사마리아에서는 성령이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방언 현상은 없었다. 물론 방옹자들은 누가가 방언 현상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마리아에서도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5) 그러나 이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방언이 성령이 임하신 명백한 증거라면, 방언 현상은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 현상이 있었음에도 누가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은 별로 신뢰할 수 없는 문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런 실수를 했을리가 없다. 누가는 고넬료의 집과 에베소 지역에 성령이 임하실 때 있었던 방언 현상은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누가가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기록할 때 방언 현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누가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서는 방언 현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 현상이 왜 불규칙적으로 일어났는가

사마리아 지방에서 한 번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이것은 사실상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대부분 경우에는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 현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의 방언 현상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특이한 현상이다. 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와 고넬료의 집에서와 에베소에서의 경우를 보면, 성령이 임하셨을 때 방언 현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방언은 오순절주의자의 주장대로 성령세례의 증거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한 발 물러선 또 다른 자들의 주장처럼 방언이 성령세례의 유일한 증거는 아닐지라도 성령세례의 여러 증거들 중 하나이거나 적어도 성령 충만의 증거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성령 오심의 증거로는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오순절주의자의 주장대로 방언도 성령 세례의 증거라면, 오순절 날 이후 다른 곳(사마리아 지방, 고넬료의 집, 에베소 지방 등)에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도 오순절 날 때처럼 방언과 함께 방언보다 더 분명한 증거인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 이후 성령이 임하실 때, 종종 방언 현상은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은 없었다. 그러므로 성령 오심의 가장 분명한 증거들인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 없이 나타난 방언 현상은 당연히 성령 오심의 증거일 수 없다.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 지방, 빌립보의 간수의 집, 바울의 회심 때, 갈라디아 교회에 성령이 임했을 때 등 대부분의 경우에는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뿐 아니라 방언 현상도 없었다. 물론 요즈음 성령 집회 같은 곳에서 더러 부흥사들이 강단에서 마이크에 입을 바짝 갖다 대고는 ‘쇄애~액, 슈우~욱’ 하는 인위적인 바람소리와 ‘불로, 불로~’를 수없이 반복하며, 괴음의 방언기도까지 유창하게 하므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셨던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성령이 임하시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종교 사기꾼들이 만들어낸 성령 쇼에 불과하다.

그러면 오순절 날 때와는 다르게, 성령이 다른 곳에 임하셨을 때는 방언 현상은 더러 있었어도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의 증거는 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이 공항에 도착할 때 자신을 마중 나온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처음 만날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는 어떤 표식(sign)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후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알리는 팻말이나 빨간 옷 따위의 표식을 그대로 가지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처음 오셨을 때는 제자들이 처음 만나는 성령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성령은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양’의 증거(sign)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성령이 임하실 때는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을 더 이상 나타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성령이 처음 오신 오순절 날 이후에 성령 받은 사람들은, 처음 있었던 가시적인 증거들이 없다할지라도, 이미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날의 증거들을 알고 있고, 또 성령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자신의 언어로 말하든지 방언으로 말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높이는 것만으로도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의 증거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실 때 처음 한 번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후 성령이 임하실 때는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 현상도 성령세례의 증거가 사실이라면 오순절 날 이후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방언 현상은 오순절 날 이후에도 불규칙적이기는 했지만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났다. 왜 일까? 그 이유는 방언 현상이 성령세례의 증거는 아니지만 성령의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는 성령 오심의 명백한 증거인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양’은 무시하고 단독으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을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고넬료의 집에서, 그리고 에베소 지방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방언 현상이 있었음을 근거로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방언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면서 “방언은 성령세례의 증거이다”라는 공식을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사마리아 지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는 방언 현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는 사마리아에서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았을 때에 방언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방언 현상이 성령세례의 증거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바람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만으로도 성령세례의 증거로 충분했다면, 왜 성령은 제자들에게 굳이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 고넬료의 집에서와 에베소 지방에서는 방언 현상이 있었는데 왜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방언 현상이 없었을까? 이제부터 방언 사건의 최초 현장인 오순절 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사도행전의 본문을 따라가며 방언 사건을 재수사함으로 이 질문들의 답을 찾아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실 때 동반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눅24:49, 요14:16; 15:26; 16:7,13; 행1:5,8 등)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증거였다면, 방언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사명(행1:8)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이들에게 주신 능력이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있었던 주의 제자들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아람어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람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겠지만, 사마리아를 넘어가서 아람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증인 사역을 막 시작한 제자들이 단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마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의 증인 사역은 이들에게 아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은 제자들에게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으로, 아람어가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큰일을 전할 수 있게 하셨다. 방언은 주님의 대사명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놀라운 선물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건 현장 재수사를 통해 앞에서 진술한 사실, 즉 방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이 주신 외국어 능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ㅡ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행 2:4-13).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처럼, 그날 예루살렘에 임하신 성령도 주의 제자들이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 전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날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었으며, 매년 이때만 되면 원근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아람어를 잘 모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으며, 아람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바데인, 메대인, 엘람인, 그레데인, 아라비아인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아람어가 통하는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약 열여섯 지역에서 온 이방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세 종족(바대 인, 메대 인, 엘람 인)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으며, 브루가아와 밤빌리아는 그리스어를 사용했다.6) 따라서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그리고 나머지 지역에서 온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다 합치면 열한 가지가 되는데,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아람어로, 그리고 열한 제자는 나머지 지역의 열한 가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전했다면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진다. 물론 꼭 열한 제자들만 방언으로 말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필자의 상상대로 열두 제자들이 아람어를 포함한 열두 가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했던 것일까?7)

아무튼 성령은 예루살렘에 온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아람어를 비롯해 각국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성령의 초자연적인 방언 현상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이들은 새 술에 취했다고 제자들을 조롱했으며, 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도가 되기도 했다(행3:41 참고).

그런데 방옹자들은 그날에 있었던 모든 결과(특히 신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진 일)들이 단지 방언의 신비한 소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오순절 날 이후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부흥도 이런 방언 때문이었다고 상상한다. 옥성호 형제도 만약 방언이 없었으면 오순절 사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8)옥성호 형제의 이런 생각은 고전 14:22절에서 방언의 정의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소위 부흥하는 곳에는 방언의 역사가 있고 방언을 부정하는 곳에는 퇴보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오순절주의 교회의 비정상적인 비만(肥滿) 현상을 부흥이라고 여기며 그 원동력이 방언이라고 생각한다.9) 정말 이들의 생각이 맞는 것일까?

--- 각주 ---

1)김우현, <하나님의 이끄심>(서울: 규장, 2009), p.65.
2)방옹자들 중 드물게 김신호 목사는 방언 현상이 기록되지 않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방언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김신호, <성령 세례 받으면 방언하나요?>(서울: 서로사랑, 2011), p.63.
3)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서울: 규장, 2009), pp.65-66, pp.161-162.
4)아우구스티누스도 방언이 지금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령세례의 증거였다고 말했다. 다음을 참고하라. 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 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143.
5)대부분의 방옹자들은 이렇게 믿고 있다. 방폐자(초대교회 이후 방언이 폐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인 옥성호 형제도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방언 현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41, p.54.
6)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44 각주 7에서 재인용.
7)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을 지역별로 분류하면, 카스피해 지역(바대인, 메대인), 이란 지역(엘람인), 메소포타미아(메소포타미아와 유브라데 강 사이) 지역, 갑바도기아(지금의 터어키) 지역, 본도(흑해 남쪽) 지역, 소아시아 지역(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이집트) 지역, 아프리카 지역(구레네), 이탈리아 지역(로마), 지중해 지역(그레데), 아라비아 지역(아라비아)이다. 따라서 이들과 아람어를 쓰는 유대 지역을 합치면 열두 지역이 된다. 한 홍, <지금은 성령시대>(서울: 규장, 2012), p.97.
8)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43.
9)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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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