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설교의 일부 내용) .... (중략)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라는 말을 하나님을 위해 ‘노래 부른다’와 일치시킵니다. 우리에게 찬송은 곧 노래입니다. 그러면 범죄 이전에 아담의 하나님을 위한 찬송과 경배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아담도 노래를 부름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했을까요?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노래를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담의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를 그의 삶과 연관시지키 않고 단지 아담이 어떤 바위에 앉아서 노래만 부르는 형식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위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를 불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예배와 찬송은 그의 24시간의 삶과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활동 그 자체와 연관되었지, 지금 우리들처럼 정해진 시간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담의 찬송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타락하기 전에는 죄가 없었으므로 아담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예배와 찬송이 24시간 내내 모든 대화와 모든 활동과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관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고 찬송이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아담의 모든 말 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있었고 아담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담의 순정 상태라고 말합니다. 지금 구원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는 것을 보면 범죄 이전의 아담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순정상태의 아담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아담의 예배였고 찬송이었던 것입니다. 범죄 이전의 아담의 예배와 찬송은 하나님을 모시고 죄와 무관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예배의 순서를 만들어서 시행하게 된 것은 타락한 후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예배하는 날이 정해지고, 정해진 날에 예배하면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어떤 기도를 하고 ... 이런 것은 타락 이후에 죄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하나님 섬김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았으나 여전히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삶 자체가 예배와 찬송이 되지 못하므로 어쩔 수 없이 예배하는 한 날을 정하였고, 그날 예배하는 동안 어떤 노래를 부름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사는 성도들입니다.

범죄 이전의 아담의 예배를 생각하면, 천국에서는 성도의 찬송이 어떤 형태일 것인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과 분리된 노래가 천국의 찬송의 중심 요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범죄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그의 삶이 예배이고 찬송이었던 것처럼,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천국의 성도들의 찬송도 단순한 노래 정도가 아닐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찬송은 우리의 새로워진 인생과 삶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신자들이 기독교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 자체가 가장 귀한 찬송이고 예배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전문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은 교회가 이방종교로 변했다는 증거입니다. 로마교회를 보십시오. 초대교회 이후부터 로마교회는 이상한 마리아 여신, 교황에 대한 이상한 사상, 성찬에 대한 이상한 사상, 미사에 대한 이상한 사상 ... 이미 성경을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찬송이라고 하는 전문적인 노래를 발전시켰습니다. 엄청난 파이프 오르간이나 여러 악기들을 동원하여 아주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가진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찬송이 아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이 아닙니다. 언제나 애기 예수를 품에 안고 키우는 마리아 여신, 교황 아버지 사상, 십자가를 허무는 미사 ... 그런 것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찬송이 아닙니다.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믿으면서 사는 것이 찬송의 기본입니다. 음악성이 없고 목소리가 안 좋아도 하나님은 먼저 그 성도의 바른 신앙의 향기를 받으시고 바르게 사는 삶의 찬송을 받으십니다. 거기에 찬송이라는 노래도 있으면 더 좋은 것이구요.

그런면에서 청교도 교회들의 시편찬송을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일단 청교도 신학은 원죄, 구원, 전도 방식에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목회 교회에서 신앙을 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신앙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이단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대체 성경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면 하나님께 기뻐하실까요?

그리고 청교도 교회들의 시편 찬송은 지금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의 음악과 아무 연관성이 없는 500년 전 중세시대의 음악입니다. 중세시대의 느릿느릿하고 처치는 듯한 리듬과 박자는 지금 우리들에게 너무 생소하여 배우기 쉽지 않습니다.

생소한 중세 시대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은 마치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말 버리고 미국말, 프랑스 말로 기도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우고 익힌 모국어, 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기도의 방식입니다. 왜 기도하기 위해 일본말을 배워야 합니까? 왜 기도하기 위해 프랑스 말이나 이태리 말을 배워야 합니까?

500년 전 중세 시대의 음악으로 찬송해야 한다는 시편 찬송 제일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부르는  찬송이 최고의 찬송입니까? 우리 나라 말 기도보다 이상한 나라의 언어라는 방언기도를 해야 한다는 오순절 사이비들의 이론과 전적으로  다른가요?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새롭게 재창조된 나에게 새로이 형성된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진정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내 말과 내 음악과 내 문화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왜 500년 전에 유럽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 왜 500년 전 유럽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발전키신 음악으로 우리가 찬송을 해야 합니까? 시편찬송 제일주의는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교리적으로 성경에서 멀어져 이단의 길로 가게 하면서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포장하는 것이 시편 찬송입니다. 실질적으로 시편 찬송이 그렇게 쓰여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중세 음악을 배우는 학당도 아닌데, 왜 교회가 옛날 중세 시대의 고풍스러운 음악을 배워서 찬송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신 은혜 안에서 가꾸어진 우리의 현재적 경건이 아니고 거짓으로 짜 맞추는 경건입니다.

시편찬송의 가사들 대부분이 시편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문구들이고 표현들이니 좋은 것이지요. 그러나 시편이 아무리 좋아도 아직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쓰여진 성경입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예상하면서 신앙생활하라고 주신 내용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구약 성경들과 시편이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오시어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죄에서 해방된 성도들입니다. 시편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될 날을 고대하는 성도들의 찬송입니다.

시편 가사로만 지은 찬송이 신약의 성도에게 아주 안 맞는 것은 아니지만, 신약의 성도에게는 시편의 가사 이상의 찬송의 말들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시펀의 내용에만 얽매여야 하는 것인가요? 왜 500년 중세시대 유럽 사람들의 음악으로, 구약의 시편에 나오는 내용들로만 구성된 노래를 불러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왜 그것이 가장 좋은 찬송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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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