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4)

 

글을 시작하며

이국진 목사는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라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제목에서처럼 유나아가 여사도라고 주장한다. 그가 유나아를 여사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롬16: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에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가 통상적인 번역처럼 “그들은 사도들 사이에서 탁월하게 여겨지고”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정이철 목사가 <WEA 옹호하는 분의 성경에 여자 사도있다는 주장, 우연일까?>라는 글에서 “거의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유니아도 사도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처럼, 필자가 조사한 번역 성경들도 모두 다 이와 동일했다), “그들은 사도들 중에 탁월한 사도로 여겨지고”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전자보다 후자가 “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의 의미로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국진 목사는 이 주장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열거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었다고 표현하려면 “사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교회(성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굳이 사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할 이유가 없다.

둘째로, 유니아가 바울 사도의 친척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συναιχμαλώτους μου)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 사도와 똑같은 역할을 했고 바울 사도와 똑같이 고난을 받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소스톰(347-407)도 유니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표현하였다.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이국진]

“첫째로, 그들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었다고 표현하려면 “사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교회(성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굳이 사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할 이유가 없다.“라는 이국진 목사의 설명은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다.

롬16:7에서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당시에 사도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실제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국진 목사는 바울의 진술을 부인하면서 이는 사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교회(성도)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며, 굳이 사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할 이유가 없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물론 ‘성도’와 ‘사도’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보다 사도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이 더 명예스러운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사도들 사이에서 특별한 명성이 있음을 로마서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라고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국진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서 바울의 진솔한 묘사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또 “둘째로, 유니아가 바울 사도의 친척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συναιχμαλώτους μου)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 사도와 똑같은 역할을 했고 바울 사도와 똑같이 고난을 받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국진 목사의 설명도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바울 사도와 똑같은 역할을 했고 바울 사도와 똑같이 고난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도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소스톰(347-407)도 유니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표현하였다”는 이국진 목사의 변은 참고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그럼에도 ‘크리소스톰’은 인간이며, 또 그의 성경 해석 중에 잘못된 것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증거가 교부들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유니아가 여사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결코 될 수 없다(차라리 지금도 탁월한 주석가로 인정받고 있는 칼빈이 유니아가 여사도라고 말했다면. 교부들의 의견보다는 칼빈의 의견이 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국진 목사가 유니아가 여사도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위의 세 가지 이유들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허접한 것들이어서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국진 목사가 유니아가 여사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내세우는 헬라어 원문의 설명들을 검토해 보자.
 

롬16:7에서 바울은 유니아가 여사도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

이국진 목사는 롬16:7의 “그들은 성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의 헬라어 원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Daniel B. Wallace와 Michael H. Burer는 ἐν 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라는 표현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famous to the apostles)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문법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ἐν + 여격”이 사용될 때에는 불포함 관점 (exclusive view)이고, 소유격이 사용될 때에는 포함 관점(inclusive view)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만일 유니아가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포함관점으로 표현하려면 “ἐν + 여격”을 사용하기보다는 소유격을 사용하여 표현했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Daniel B. Wallace와 Michael H. Burer가 제시한 예문 중에 이미 예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교부들이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유니아를 사도로 보았다는 점은 이들의 논리를 약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신약에서 “ἐν + 여격”이 포함 관점(inclusive view)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οὐδαμῶς ἐλαχίστη εἶ ἐν τοῖς ἡγεμόσιν Ἰούδα(마 2:6)은 “유다 통치자 중에 가장 작은 (통치자)가 아니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ἐν + 여격”은 베들레헴이 통치자들 가운데 들어있는 포함관점을 나타낸다. 마 2:6은 정확하게 롬 16:7과 같은 방식이다. 이와 같이 “ἐν + 여격”이 포함 관점(inclusive view)으로 사용된 예는,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 11:11)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ἐν γεννητοῖς γυναικῶν μείζων Ἰωάννου τοῦ βαπτιστοῦ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세례 요한 보다 큰 자는 여자가 낳은 자(ἐν + 여격)에 포함된다. 베들레헴이 통치자(고을)들 중에서 가장 작은 통치자(고을)가 아닌 것처럼, 유니아는 “사도들 중에 아주 유명한 사도”로 볼 수 있는 똑같은 구조이다.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이국진]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는 고대 언어여서 현대 언어처럼 문법적으로 정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종종 어떤 문장은 A로 해석할 수도 있고 B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해석자들은 두 가지의 해석의 가능성을 다 인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즉 요3;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에서 “거듭”으로 번역된 부사 “a;nwqen”(아노덴)처럼, “위로부터”(from above)와 “다시”(again)의 이중적 의미가 분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두 가지 의미로 다 해석이 가능하다할지라도 저자가 둘 중에 어느 한 가지 의미로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한 문장에서 저자가 의도한 의미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판단해서 둘 중 어느 하나의 의미를 선택해야 한다(어느 것을,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설명은 상당한 양의 설명이 필요하므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다).

여기에 대한 아주 단순한 예를 하나 든다면 막6:49(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의 “위로”이다. “위로”로 번역된 전치사 “evpi.”(에피)는 “옆으로”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해석자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셨을 수도 있지만, 바다 옆으로(뭍으로) 걸어오셨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여기서 “evpi.”(에피)는 전후문맥 51절의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를 염두에 두고, 해석자는 “evpi.”(에피)“를 옆으로”의 의미는 버리고 “위로”의미로 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에수님이 올라가신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부 정직하지 못한 해석자들은 애매한 문법 때문에 생긴 두 가지 의미를 적당하게 이용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에 유리한 방향으로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저지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롬16:7처럼 문법적으로 전혀 애매하지 않고, 명백해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근거를 제시하면서,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자신의 주장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속이는 짓이다. 유나아가 여사도라고 주장하는 이국진 목사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국진 목사는 그의 글에서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음을 인정하는듯하면서 교부들의 해석과 예외적인 성경의 구문들이 있다고 하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ἐν + 여격”이 사용될 때에는 불포함 관점 (exclusive view)이고, 소유격이 사용될 때에는 포함 관점(inclusive view)이라는” 헬라어 문법을 뒤집어서 유니아는 여사도라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를 위해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두 가지 증거는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교부들이 이 구절을 해설하면서 유니아를 사도로 보았다는 점”과 마2:6과 마11:11에서 “ἐν + 여격”임에도 불구하고 포함 관점을 나타내며, 특히 “마2:6은 정확하게 롬16:7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두 가지 증거들은 롬16:7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적절하지 못한 엉터리 증거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의 해석이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의 해석보다 더 신뢰할 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의 해석이라고 해서 아무런 검증 없이 마냥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부들의 성경 해석에서 문제되는 것들이 상당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든다면 교부들은 눅13:10-17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의 의해서 18년 동안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한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은 “교회”로,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회당장은 “유대교”로 해석했다.

그러면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마2:6과 마11:11이 그의 주장대로 롬16:7의 “ἐν + 여격”이 불포함 관점이 아니라 포홤 관점의 예외적인 것임을 지원하는 본문인가를 살펴보자.

이국진은 마2: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의 “고을 중에서”에 해당하는 “evn toi/j h`gemo,sin”(엔 토이스 헤게모신)에서 “toi/j h`gemo,sin”(토이스 헤게모신)이 ‘여격’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른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evn”(엔)은 장소와 관련하여 “~안에, ~안에서”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그러므로 “ἐν + 여격”에 ‘포함’이냐, ‘불포함’이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ἐν + 여격”과 관련된 진술에 달려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A가 유대 고을 중에 있다”라고 진술했다면 “ἐν + 여격”에 ‘A가 포함’이지만 “A가 유대 고을 중에 있지 않다”라고 진술했다면 “ἐν + 여격”에 ‘A가 불포함’이라는 말이다. 전자의 예문은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마2:6이고, 후자의 예문을 하나 제시한다면 눅7: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에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ouvde. evn tw/| VIsrah.l tosau,thn pi,stin eu-ron/우데 엔 토 이스라엘 토사우덴 피스틴 휴론)가 될 것이다.

여기서 “ἐν + 여격”에 해당하는 “evn tw/| VIsrah.l”(엔 토 이스라엘)에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불포함이다. 그러므로 이국진 목사가 제시한 마2:6은 롬16:7과 전혀 다른 성격의 예문이다. 따라서 “마2:6은 정확하게 롬16:7과 같은 방식”이라는 이국진 목사의 말은 사실이 아닌 거짓이다.
 

그러면 마11:11은 롬16:7에서 “ἐν + 여격”이 포함 관점을 나타낸다는 이국진 목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문으로 적절할까?

마11: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에서 문자적으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ouvk evgh,gertai evn gennhtoi/j gunaikw/n mei,zwn VIwa,nnou tou/ baptistou//우크 에게게르타이 엔 겐네토이스 귀나이콘 메이존 이오안누 투 밥티스투)에서 “ἐν + 여격”(evn gennhtoi/j gunaikw/n/엔 겐네토이스 귀나이콘)는 이국진 목사의 설명대로 앞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의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여자들이 낳은 자 중에는 “세례 요한보다 큰 이”는 없으므로 불포함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국진 목사가 마11:11을 포함의 예문으로 제시한 것은 아마도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의 주어를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아니라 “세례 요한”으로 착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정리하면, 이국진 목사가 롬16:7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마2:6은 롬16:7과 성격이 전혀 다른 방식의 문장이며, 마11:11은 이국진 목사의 주장과 반대되는 오히려 “ἐν + 여격”의 불포함의 예문이다, 따라서 롬16:7에서 문법적으로는 불포함 관점인 “ἐν + 여격”임에도 불구하고, 유니아가 사도들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는데 사용한 마2:6과 마11:11의 예문은 아주 부적절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이국진 목사의 이런 설명은 헬라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이국진 목사의 주장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유니아가 더 뛰어난 사도라고 공개적으로 진술했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님의 전권대사인 사도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실수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어쩌면 이국진 목사는 자신의 주장으로 바울까지 기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롬16:7의 “ἐν + 여격”의 바른 의미는 무엇일까?

전치사 “evn”(엔)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장소와 관련해서 “~안에, ~안에서”와 시간과 관련해서 “~동안, ~내에, ~안에”이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전치사 “evn”(엔)의 용도는 실로 다양해서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롬16:7에서 발견되는 전치사 “evn”(엔)은 “evn”(엔)의 여러 가지 용도 중 가까운 관계를 표시할 때, “~안에, ~중에, ~아래”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전치사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든다면 롬1: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너희 가운데서”(evn u`mi/n/엔 휘민)의 전치사 “evn”(엔)은 예수님과 “너희”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시하는 전치사이다.

그러므로 롬16:7의 “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는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NIV: They are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로 해석하여, 사도들과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만약 바울이 유니아를 사도들 중에 탁월한 사도라고 표현하려고 했다면, 필자는 아마도 바울이 고전15: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eivmi o` evla,cistoj tw/n avposto,lwn”(에이미 호 엘라키스토스 톤 아포스톨론)과 동일한 문형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글을 마치며

이국진 목사는 자신의 소논문 끝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로 뒤에 οἳ καὶ πρὸ ἐμοῦ γέγοναν ἐν Χριστῷ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나 이전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였다”(they were [apostles] in Christ before me)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동사 γέγοναν(되다)의 보어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나 이전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they were in Christ before me)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회심하기 전부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뜻이 된다. 11 하지만 중복되는 단어를 생략하는 헬라어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사도들(τοῖς ἀποστόλοις)이라는 말이 바로 앞에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ἀποστόλοι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니아와 안드로니고가 사도 바울 이전에 이미 사도였다고 바울 사도가 증언하는 셈이다. 즉 이 구절의 의미는 바울 사도의 친척이면서 동시에 함께 투옥된 적이 있었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도들 중에서 아주 유명한(탁월한) 사도들이었고,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니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이국진]

앞에서 필자가 설명한 글을 정독한 독자들이라면, 이국진 목사의 위의 진술도 얼마나 위험한, 그러나 허접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인지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위의 글도 상세히 설명하여, 이런 식의 성경 접근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방법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야비하기까지 한 것인지 밝힐 것이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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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