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들에게 신학이란 무엇일까? 평신도에게도 신학은 필요하고 가능할까? 지금까지 평신도들은 신학을 자신과 무관하게 여겨야만 하는 것으로 은연중에 교육받았다. 신학을 말하는 자리에 끼어드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제넘는 행동이라고 여져기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래서 많은 평신도들은 신학을 ‘풍성한 신앙심’의 방해물로 여기는 경향이 많다. 신학이 신앙을 무미건조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신앙의 생명력을 말살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그 신학을 신학교에 다니면서 신학을 접한 목회자들, 그리고 더 전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들만의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다. 자신들이 직접 하면 안되는 나쁜 일을 하나님께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로 하여금 하게 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사고는 평신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신학에 대한 이런 그릇된 사고가 퍼져있다. 목회자들이 신학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이단 문제이다. 필자의 <바른믿음> 운영을 통해 많은 목회자들이 건강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신앙의 문제는 곧 신학의 문제라는 사실에 대해 공감하게 목회자들이 많다. 

“정 목사! 이단 연구하면 당신 목회 조진다!”

그러나 이전에 필자에게 이렇게 말하신 목사님들이 많았다. 그 분들은 필자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교회가 이단을 경계하거나 이단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교회에 치명적인 해가 되거나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들의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단을 분륜이나 사기 등 도덕적, 윤리적 기준으로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신학으로 비판하는 작업은 기독교 신앙에 정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단의 주요 주장을 한 눈에 파악하여 비판하는 사람은 곧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아는 사람이다.

이단을 비판하는 일이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목회자나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이단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단의 문제를 비판하는 논쟁이 벌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요동하게 되는 것은 이단의 문제가 곧 그 교회 사람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단 사상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기독교 역사의 중심 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레네우스, 어거스틴 등 교회사 초기에 기독교 신앙을 공교회에 바르게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들은 이단을 신학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들이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벗어나는 이단의 신앙의 거짓됨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들의 신학적 활동으로 인해 성경을 거짓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단 사상이 교회와 분리되게 되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더 바르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실천하게 되었다. 이런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학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다. 신학과 교회와 마귀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함께 간다. 마귀는 계속하여 교회에 자기의 씨앗(거짓 선생)을 뿌리고, 지상의 교회는 계속해서 마귀로 인해 병들고 씨름하면서 존재한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올바른 신학자는 시대를 초월하여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 시대의 교회들이 성경에서 얻는 올바른 하나님 지식을 바르게 실천하도록 돕는다.

그때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논쟁과 싸움이 벌어진다. 이미 마귀의 영감을 받아 성공한 유명한 목사들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저항이 일어난다. 세상에서는 항상 거짓의 세력이 더 강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짓의 급소를 치는 정확한 하나님 지식을 제공하는 그 신학자의 수명이 끝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교회가 다 망하게 되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쓰시는 그 신학자는 죽지 않는다. 그 신학자의 영광이 아니고 오직 자기 백성을 생산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다.

성경은 장차 지상의 거의 모든 교회들, 목회자들, 교인들이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거짓된 믿음을 추종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거의 모두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좋아서 찾고 만들어 낸 거짓된 믿음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선교는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전파하여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이다. 선교는 지상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런데 선교를 위해 모든 종교들에 구원이 있고, 심지어 이슬람도 하나님 섬기는 구원종교라고 가르치는 WCC와 로마교회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이 두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WEA라는 단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선교를 위해 마땅한 일이고 옳은 일이라고 한다. 그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교회의 존립 근거를 허무는 바른 교훈을 파괴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의 원리들에 의해 성경과 교회의 관계를 보면 교회는 성경에 종속해야 한다. 교회는 말씀에 의해 발생하였고 창조되었으므로 구원진리에 대한 모든 권위는 성경에 있고 성경에서만 유래한다. 교회가 권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파하고 성경대로 가르칠 때이다.”(신학서론, 290)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서 나온 이차적 권위이다.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넘어갈 수 없고 언제나 말씀에 종속해야한다. 그때에만 교회는 권위를 갖는다. 또 진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선포할 때 교회는 말씀 선포자로서 권위와 권세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므로 신적 권위를 갖는다. 교회는 이 신적 권위에서 도출된 부차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 부차적 권위도 성경에 매일 때만 허락되고 정당화된다.”(신학서론, 290)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단 한순간도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영원히 교회 위에 있다. 지난 수천년 동안 교회가 믿었던 것이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님이 확인되면 즉시 개똥처럼 여겨야 한다. 자신의 주장과 사상이 성경과 같지 않음이 확인되면 즉시 태도를 달리해야 하나님 백성이다. 그럼 면에서, 한국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목소리는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1) 능동순종은 정통교회가 이미 오래 동안 가르친 정통 교리입니다. 성경이 직접 명시하지 않는다고 도전하면, 개혁신학의 자세가 아닙니다.

2) 모든 저명한 개혁신학자들이 인정한 능동순종 교리를 무시하면 개혁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개혁신학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고 반드시 이 전통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3) 능동순종이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고 부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위대한 청교도 선조들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진리를 철학적 추론을 통해 찾아서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중요한 교리로 세웠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이런 위대한 전통, 즉 철학적 추론으로 정립한 개혁신학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4) 어떤 진리를 성경의 표면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로 따지는 것은 단수가 낮은 사람의 신앙입니다. 당신이 진정 기독교 신앙을 알기를 원하면, 위대한 청교도 선조들의 신학의 빛을 따라 성경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청교도 조상들은 단지 성경을 표면적으로 보았던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다시 개혁하였습니다.

신학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결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교회를 노략질하는 적그리스도가 역사하는 한 신학은 언제나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최고의 최후의 도구이다.

신학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생산하시고 지키시는 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우리의 섬김의 대상인 하나님 그 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행 20:28)의 운영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 백성의 신앙의 실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신학 연구를 위한 자료가 사람에게는 없다.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공히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피조세계(자연)을 신학 연구의 자료를 삼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그것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하신 신앙에 대해 바르게 파악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신학 연구는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스스로 계시한 말씀의 기록인 성경을 그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을 가졌으도 자연이성만으로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연구할 수 없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자연 이성으로도 이해되지만, 반면에 성경의 많은 부분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전혀 알 수가 없는 내용들이다. 성령의 조명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들만 깨달아지고 이해되는 내용이 성경에 매우 많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9)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3, 14)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유일한 원천지식의 창고인 성경은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에게 완전히 닫힌 책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로 열어 주시는 만큼만 보게 되는 책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외의 어떤 신앙고백서나 신학자들의 주장과 이해를 성경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성경 만이 우리의 신앙의 원천지식이다. 유명한 신학자의 주장이 성경과 맞지 않으면 그냥 버리면 하나님이 기쁘하신다. 웨신서의 일부 내용, 벌코프, 바빙크 ... 예외가 없다.

500년 전에 선각자들이 순교하면서 이루어낸 성경번역으로 유럽의 일반 목회자들의 평신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직접 쉽게 연구하게 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제 또 다시 종교개혁과 같은 신앙 회복 더욱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음을 우리 모두가 실감한다.

이 시대의 많은 유명한 목회자들이 신실한 개혁군주 요시아 왕에 의해 떼 죽음을 당했던 산당의 제사장들과에 속한다 (왕하 23:20). 그들이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여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부패와 타락과 무지와 우매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자연스러운 열매를 맺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고 ‘복음주의’는 그들의 신앙이 성경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이제 평신도들이 깨어나야 한다. 평신도들이 영원히 신학에 무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 자신과 우리의 교회에 영원히 소망이 없다. 평신도들도 나름 신학자들이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무엇을 가르치건 간에 무조건 따르는 평신도는 건강한 평신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이해하고 삶과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신학의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접할 수 있는 좋은 책들과 여러 강의들을 통해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나름 신학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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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