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3)

 

글을 시작하며

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기록만 해도, 현재와는 약 2000년의 엄청난 시간적 간격이 있으며, 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고대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더구나 그 기록들은 당시의 고대인들, 복음서는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관습이나 환경 등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이런 난관들을 염두에 두고 원문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나온 관용(비유)적 표현은 더욱 더 바르게 해석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관용어는 본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므로,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사전적 의미대로 해석하면, 성경 원문의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 성경들에는 원문에서 관용(비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경우들이 허다하며,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용어의 의미를 놓치므로 오역하는 경우들이 더욱 빈번하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행2: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의 “썩음을 당하지 않게”가 관용(비유)적인 의미를 놓친 대표적인 사례이며, 다음 기회에 다루려고 하는 마8: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의 “죽은 자들이”에 대한 오석도 이에 버금가는 사례이다.

미리 결론을 말한다면, 영어에서 “kick the bucket”의 의미가 “양동이를 발로 차다”가 아니듯이, 행2:27의 “썩음을 당하지”가 문자적으로 어떤 물체가 부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들은 당시의 관용(비유)적 표현들이기 때문에,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행2:27의 “썩음을 당하지 않게”를 예수님이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으나 육신이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다고 오해하며, 마8:22의 “죽은 자들이”를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오석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마치 “kick the bucket”을 “양동이를 발로 차다”로 해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썩음을 당하지”(행2:27)의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2:27)

베드로는 시16: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을 인용하여 행2:27에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던 예수님의 부활의 당위성과 명백성을 증거하고 있다.

참고로 시16:10을 헬라어로 번역한 LXX 시15:10(o[ti ouvk evgkatalei,yeij th.n yuch,n mou eivj a[|dhn ouvde. dw,seij to.n o[sio,n sou ivdei/n diafqora,n)과 행2:27의 헬라어 문장은 단어 하나까지 똑같다. 물론 개역개정에서 시16:10의 “ivdei/n diafqora,n”(이데인 디압도란)을 관용(비유)적인 의미를 살려서 “멸망시키지”로 잘 번역했지만, 원문에서 시16:10의 “ivdei/n diafqora,n”(이데인 디압도란)과 행2:27의 “ivdei/n diafqora,n”(이데인 디압도란)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멸망시키지”로, 후자는 “썩음을 당하지”로 번역함으로써 번역의 일관성을 상실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행2:27에서 “썩음을”로 번역된 “diafqora,n”(디압도란)의 원형 “diafqora”(디압도라)는 “썩음, 파멸, 망함, 죽음”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diafqora”(디압도라)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물질이 부패하여 썩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가 관용(비유)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파멸, 멸망, 망함, 죽음” 등을 의미한다.

성경에 사용된 “diafqora”(디압도라)는 모두 관용(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LXX에서 20회 사용된 “diafqora”(디압도라)는 모두 “죽음”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 “diafqora”(디압도라)는 행2장과 13장에서 6회 사용되었는데, LXX과 다르지 않게 모두 “죽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행2:27의 “diafqora”(디압도라)가 성경에서 관용적인(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는, “diafqora”(디압도라)의 동사형인 “diafqei,rw”(디압데이로)의 성경 용례들을 살펴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바우어 헬라어 사전에 동사 “diafqei,rw”(디압데이로)의 첫 번째 의미가 “파괴하다”이며, 보통은 수동형으로 “멸절되다, 패망하다”의 의미로 제시된다. 아래 고후4:16과 계8:9을 보라.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diafqei,retai/디압데이레타이/are wasting away/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계8: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diefqa,rhsan/디엡다레산/were destroyed/”

위에서 “diafqei,retai”(디압데이레타이)와 “diefqa,rhsan”(디엡다레산)의 의미가 ‘겉사람의 살이 썩는다’거나 ‘배들의 삼분의 일이 썩는다’는 의미가 아니듯이, 행2:27에서 “썩음을”으로 번역된 “diafqora,n”(디압도란)는 결코 ‘살이 썩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행2: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에서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는 같은 의미를 같은 표현으로 중복하지 않으려는 셈어적인 것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파멸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지켜주실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들로 중복한 것이다.

행2:27에서 “음부”로 번역된 “a[|dhj”(하데스)는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 또는 죽은 자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는 그리스도를 죽음의 자리에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썩음”으로 번역된 “diafqora,”(디압도라)는 “a[|dhj”(하데스)에 대응하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므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며”도 동일하게 육신의 살이 썩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있게 하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시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행2:28(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행2:27의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와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를 행2:28에서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로 통합해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2:27의 “썩음을 당하지 않게”는 육신의 살이 썩지 않는다는 “diafqora”(디압도라)의 일차적인 의미 의미가 아니라, 음부(죽음)에 버려지지 아니하고 다시 살아서 생명의 길로 갈 것임 의미하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행2:27에서 “썩음을”로 번역된 “diafqora,n”(디압도란)은 육체의 살이 썩는다는 의미는 조금도 없다. 다시 말하면 행2:27의 “ivdei/n diafqora,n”(이데인 디압도란)을 “썩음을 당하지”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행2:27을 관용(비유)적인 의미를 살려서 제대로 번역하면, 시16:10처럼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가 될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사망의 자리, 즉 무덤에 그대로 있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다윗의 입을 통한 메시아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자리에서 망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신 것이다. 행2:27에서 베드로가 시16:10을 인용한 까닭도, 무덤에 누워 계신 예수님의 살이 썩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성경에 예언된 것이며, 하나님이 일하신 것임을 입증하가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행2:27은 무덤에 계신 예수님의 살이 썩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왜곡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적인 주장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인간이신 예수님은 죄 없으신 것 말고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덤에 내려가신 예수님의 몸은, 적어도 인간이 죽어서 삼 일 동안 부패가 진행되는 정도만큼, 부패했음이 틀림없다.

물론 예수님이 장사된 때가 유월절 시즌이어서 무덤으로 사용된 동굴 안은 건조하고 매우 서늘했을 것이므로, 부패의 진행속도가 아주 느렸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 환경에 맞게 느리게라도 부패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가 어떤 글을 쓰면서 굳이 예수님의 육신이 썩었다고 말한 것은 혹시 사람들이 행2:27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를 잘못 해석하므로, 예수님의 육신이 결코 썩지 않았다는,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적인 주장을 할까봐 염려되어서였다. 아무튼 정이철 목사가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육체가 삼일 동안 부패했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을 놓치지 않은 정설이다.
 

글을 마치며

옛날 할머니들은 손자들이 말썽을 부리면 곧잘 “이 썩을 놈아!”라고 욕을 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썩을”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대로 ‘육신의 살이 썩을 놈아!’라고 욕한 것이 아니다. 할머니가 하신 “이 썩을 놈아!”라는 욕은 “이 망할 놈아!”라는 의미의 지역 사투리 관용어일 뿐이다.

물론 할머니가 손자가 망하기를 바라서 이런 욕을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썩을 놈아!”는 ‘육신의 살이 썩을 놈아!’라는 의미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이런 종류의 관용어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의미의 “발 벗고 나서다”, 또 서로 말을 맞춘다는 의미의 “입을 맞추다” 등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발 벗고 나서다”나 “입을 맞추다” 등의 관용어를 문자대로 이해한다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정이철 목사의 “예수님의 육신은 무덤에서 삼 일 동안만큼 썩었다”는 언급을 놓고, 행2:27에 기록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의 성경 말씀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무지의 산물이다. 이는 “kick the bucket”를 성경으로 가정했을 때, 정이철 목사가 “kick the bucket”은 ‘양동이를 발로 차다’의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했을 때, 성경에는 명백하게 “kick the bucket”(양동이를 발로 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정이철 목사는 성경을 왜곡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 어찌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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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