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적 치유수양회 강의 분석(3회)

한국 교회가 두날개를 방치하는 사이에 김성곤 목사는 해외의 여러 나라에 두날개를 수출하였다. 지난해 두날개는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4개 지역에서 선교축제를 개최했다. 그때 발간된 홍보책자 안에 '두날개 선교사 현황'이라고 제목이 붙여진 페이지를 보았다. 두날개는 99명의 선교사들을 인도, 필리핀, 태국, 호주 등을 포함한 12개 국가에 파송하였다.

“선교지마다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게 하소서!”
“세계두날개 프로세스를 통해 현지인들이 재생산자로 세워지게 하소서!”

두날개 선교를 위한 기도제목을 나누고 소개하는 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두날개가 파송한 99명의 선교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두날개 시스탬을 전 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파송된 선교사의 숫자가 99명이고,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국가의 수가 12개국인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김성곤 목사에게 박수를 쳐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제 한국 교회의 애물단지가 된 선교단체 인터콥을 연구하기 바란다. 인터콥은 규모와 모든 면에서 두날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조직이 거대했다. 위험한 중동지역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여러 교회들이 후원금을 많이 보냈다. 그러나 지금 인터콥은 거의 몰락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의 주류에게서 배척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선교한다는 그들에게 성경적인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거나 그릇된 사상을 가진 단체가 기도운동을 벌이거나 선교에 앞장서면 에볼라에 전염된 사람이 의료활동하는 것과 같다.

두날개가 12개국에 파송한 99명의 선교사들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까? 그들은 현지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파송되기 전에는 한국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현지의 영혼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을까? 이런 점에 관하여 두날개의 99명의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은 검증되어야 한다. 

두날개가 파송한 99명의 선교사들의 성향을 짐작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김성곤 목사가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 강의했던 내용들이다. 두날개의 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전인적 치유수양회라고 할 수 있다. 두날개의 99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전인적 치유수양회를 수료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고, 특히 선교사가 된 사람들은 전인적 치유수양회를 통해 영적으로 김성곤 목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김성곤 목사는 한국과 미주의 신문에 성명서를 올렸다. 이단연구가들이 지적해 준 문제점들과 오해가 되는 내용들을 고치겠으니 한국 교회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과 두날개를 용납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두날개와 김성곤 목사가 앞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귀하게 쓰여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럼에도 두날개의 신학적인 문제를 요약하는 차가운 글을 계속 써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짚지 않으면 그릇된 점을 고쳐 바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제4과: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라(2회)

김성곤 목사가 전인적 치유수양회 제4과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라'에서 신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오순절 운동 성령론의 이론과 실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의 김성곤 목사가 강의한 내용 중에는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할 내용이 거의 없었다. 전인적 치유수양회 제4과에서 김성곤 목사가 가르친 내용을 내가 몇 가지로 다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성령세례가 무엇인지?
2)어떻게 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3)성령세례의 핵심 징조는 무엇인지?
4)옹알거리는 거짓 방언 현상의 유익이 뭔지?
5)옹알거림 소리현상이 더 잘 나오게 하려면?

이런 강의 내용을 보니 김성곤 목사 자신이 거짓된 성령운동에 물들었고, 특히 귀신의 옹알거리는 소리현상에 깊이 미혹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심각한 결함을 가진 분이 만든 거짓된 부흥 프로그램을 배우겠다고 많은 목사들이 상당한 금액을 사용하며 줄지어 찾아갔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성령세례라는 주제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라는 개념으로 짝퉁 하나님이 신자들 속으로 들어와 전혀 다른 종교를 구축하게 되니 반드시 밝혀야 할 내용이다. 기독교에서 성령세례라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해진 신자의 몸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여 참된 성전을 이루심이다. 구약의 신자들에게는 죄가 제거되지 못했으므로 성령의 세례가 가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으므로 이후 그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세례가 가능해졌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사실과 함께 증거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1:8)

성령의 세례는 일생에서 단 한번이며 거듭나는 순간의 일이다. 성령의 세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고전12:3)이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오셨으므로 성령받는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버지(롬8:15)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의 세례 이후부터는 또 다시 성령의 세례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영속적으로 오신 성령의 인격적인 다스리심이 시작된다.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확신하여 다시는 성령의 또 다른 세례가 더 뜨겁게 오도록 사모하라는 거짓된 선생들이 미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미혹되어 그것을 받으면 곧바로 귀신의 어두움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마약과 같은 거짓된 활홀경에 젖어 더욱 귀신에게 농락된다. 공사장의 벽돌이 포개어지는 것같이, 물동이에 물이 더 부어지듯이 처음 믿을 때 약간의 성령이 들어오고, 나중에 어떤 부흥회에 갔을 때 더 많은 성령이 들어오고, 나중에 유명한 목사에게 안수받을 때 성령이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성령의 세례를 반복적으로 체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성령을 모조하는 거짓 영의 미혹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 문제가 무섭고 심각한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귀신을 받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교회생활을 잘하고 오히려 더 열성을 내면서 지내왔다는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현실 때문이다. 동일한 상표일지라도 전혀 다른 짝퉁이 더 인기를 누리면서 유통되는 문제와 같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성령을 다시 또 받았다고 표현하여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성령을 받은 신자에게 나중에 또 성령이 또 임재하신다는 내용이 없다. 사도들 이후 시대의 존경받는 교회지도자들도 성령이 반복적으로 신자에게 임하신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도 성령이 두 번, 세 번 ... 수시로 들락거린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사탄은 성령세례라는 명칭으로 현대 교회가 성경의 믿음과 다른 배교의 길로 가도록 만드는데 크게 성공했다. 성령의 세례가 일생 동안 한번인가? 구원 이후에 또 다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인가? ... 이 문제는 유사상표를 달고 전혀 다른 짝퉁이 유통되는 것과 같은 심각한 문제이다. 성경적 범주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이해와 접근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안수하여 사람들에 영적인 최면을 걸거나, 몸의 감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쓰러지고 눕게만들거나, 소위 말하는 다양한 '능력'(?)을 부리는 사람들의 과거를 조사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성령세례라고도 하고 또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도 부르는 특이한 현상이 과거에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아주 그럴싸한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수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볼 수 없는 것이 수시로 보이고, 성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 춤, 아무 의미도 없는 괴이한 소리현상 ... 등의 신비 세계와 접하는 사람들의 과거를 추적하면 괴상한 성령의 불이 임하여 밤새 산에서 떼굴떼굴 굴렀다는 간증이 자주 나타난다. 전기가 손끝에서부터 몸속으로 뻗히면서 온 몸이 찌릿찌릿했고, 하염없이 밤 낮 울기만 하면서 애기 때부터 지은 모든 죄악을 회개하여 정결해졌다고도 하고 ... 이런 체험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르치는 내용이나 행동을 보면 성경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런 사람들의 이상한 기독교는 전혀 올바른 교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관하기 곤란한 부담거리일 뿐이다. 성령을 특이하게 또 받았다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것이 속칭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의 감추어진 실상이다. 이미 오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권능주시기 위해 또 오시는 현상이 아니고, 짝퉁 하나님이 우매한 영혼을 유린하는 현상이다.

그것을 처음 도입한 미국의 이단들이 성령세례라는 명칭을 붙여 온 세상에 퍼뜨렸다. 성령세례 사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미국 이단 세이모어가 기존 교회에서 추방된 후 캘리포니아의 아주사에서 벌인 성령세례 운동을 아주사 부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알고 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옹알거림, 쓰러짐, 누워서 구르고 발길질하기, 이상한 뜻 없는 노래, 이상한 춤, 이상한 글자 그리기 ... 심지어 귀신을 다루는 인근의 강신술사들까지도 여기에 동참하여 함께 놀아났다.

그래서 이 모습을 본 원조 성령세례 운동가이고 세이모어의 스승인 찰스 펄헴은 제자에게 "귀신의 매춘행위를 중단하라"라고 비판했으나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비판하면서 헤어졌고 이후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당시 로스엔젤리스 타임즈에는 "아주사에 광신자들의 모임이 벌어진다"라고 크게 보도하였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또 임재하는 성령세례가 벌어지는 곳이라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믿는 자들에게 또 나타나는 성령의 세례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속칭 성령세례의 정체는 사탄에게 포로된 이단들의 짝퉁 하나님을 포교하는 방식임을 우리는 속히 깨달아야 한다.
 

성령의 재세례 운동의 역사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2,000년 교회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런 성령세례는 미국 이단들에 의해 불과 100여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운동의 최초의 원인제공자는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도덕칭의론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웨슬리였다. 요한 웨슬리가 성령세례를 직접 주장했거나 요즘의 괴상한 방언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먼저 주시는 ‘선행은총’으로 각성된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택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선을 행할 수 있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자유의지를 통해 믿음을 선택한 신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실제로 의로워지고 지속적으로 성화의 길을 걸어갈 때, 어느 순간에 불현듯 완전한 성화,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신자에게 도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의 완전성화 개념은 신자에게 다시 특별하게 임재하시는 성령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신자에게 또 다시 성령이 임하신다는 이론이 이때 처음으로 상정된 것이다. 웨슬리의 바로 이런 비성경적인 사상이 후에 나타난 성령세례 주장을 몰고 나오는 오는 단초가 되었다.

웨슬리의 동역자 존 플레쳐(John Flecher)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웨슬리의 이론은 조금 변형되었다. 사람의 회개, 금식, 기도, 간절한 소원 등의 노력이 성령의 두 번째 임재하심을 준비시킬 수 있다는 쪽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웨슬리가 전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하심이 사람에 의해 준비되어질 수 있다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그리고 1800년대 중후반 웨슬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미국의 감리교회들에게서 일어난 '성결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인간의 금식, 기도, 회개 등의 노력이 성령의 추가적인 임재를 더욱 가능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완전하게 된다는 그릇된 사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 무렵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비슷한 사상을 전파하는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1792-1875)가 등장했다. 찰스 피니는 사람이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나도록 노력하고 예비하여 성령의 부흥을 유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노력과 행위로 성령의 역사를 준비하여 성령의 임재와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찰스 피니의 가르침과 사상은 신자에게 또 다시 나타난다는 성령세례에 관한 이론에 힘을 실어주면서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인간의 노력과 신앙적 선행으로 성령의 추가적인 임재가 나타난다는 사상을 가장 힘차게 전개한 사람은 토레이(R. A Torrey, 1856-1928)였다. 토레이는 이전의 누구보다 봉사의 능력과 부흥을 일으키는 성령의 세례를 강조했고, 회개, 금식,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기도 등의 조건을 충족되면 성령의 세례가 더 가능해진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때까지 성령세례와 방언현상이 결부되지는 않았다. 아무도 거짓된 옹알거리는 소리현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옹알거리는 소리가 성령세례의 징조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날의 옹알거리는 방언을 핵심으로 하는 웃기는 성령세례 사상은 1900년대 초에 나타난 미국 이단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미 1800년도 말에 미국 교회에 봉사의 능력을 주는 비성경적인 성령세례 사상이 퍼져있었는데, 새로운 성향의 이단들이 또 이것을 다르게 변형시킨 것이다.

성령세례 운동은 계시가 아닌 땅의 것의 진화

미국의 이단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세례가 다시 회복되어 교회가 완전해지고 종말의 대부흥이 일어나게 된다고 기존 사상에 자기들의 새 것을 넣어 비틀었다. 그러면서 곧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게 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진행되었던 사람의 노력의 끝자락에서 주어지는 봉사의 능력을 동반하는 성령세례 개념을 기본으로 깔고 그 위에다 그릇된 종말론을 추가한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운동이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와 방언이 다시 개인적으로 재현된다는 오순절 운동이다. 오순절운동이 이단에 의해 시작되었고, 사도들의 시대의 신앙을 재현한다고 하므로 이미 그때 신사도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감추면 진리의 싸움을 제대로 전개할 수 없다. 크나 적으나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자로 쓰임받고 싶은 사람은 이 부분에 관한 정확한 안목과 용기를 지녀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의 개인적 회복을 골자로 하는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사람은 찰스 펄햄(Charles Parham, 1873-1929)이라는 이단이다. 그는 집요하게 방언을 동반하는 거짓된 성령세례 현상을 추구하였고, 드디어 많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 1901년 1월 한 여학생에게 안수하여 그 현상을 이끌어냈다. 드디어 옹알거리는 소리가 나오자 펄햄은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가 자신을 통해 재현되었으므로 선교를 힘들게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외국에 나가 실험해 보니 아무것도 아닌 소리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1906년 초 캘리포니아의 어떤 교회에서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해 설교하다 이단이라고 비판당하면서 추방된 펄헴의 흑인 제자 윌리암 세이모어(William Seymour, 1870-1922)가 인근의 아주사에서 사람들을 모아 기도회를 열었다. 세이모어가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거짓된 성령세례와 방언을 일으키는 그의 운동이 '아주사 부흥'이라고 근사하게 포장되었다. 그러나 세이모어의 기도회에서는 이상한 춤, 이상한 노래, 쓰러짐, 이상한 글씨, 드러눕고 구르는 현상 등의 괴이한 일들이 난무했고 인근의 귀신을 부리는 술사들이 세이모의 기도회에 찾아와서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이 괴상한 아주사 부흥이라는 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오순절 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전 세계에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세례 사상을 전파하였다.

아주사 부흥은 오순절 운동과 순식간에 많은 오순절교단을 탄생시켰다. 오순절 교회는 초창기에 다른 대부분의 교회들로부터 이단이라고 배격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교회들의 자세와 신학이 무디어졌다. 5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순절 운동이 조금 시들해지자 60년대에 '은사운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탈을 쓰고서 이전까지 그 운동을 이단시하던 교회들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80년대의 빈야드 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 신사도 운동이 등장하면서 조금 더 모습이 달라졌다. 신사도 운동은 성령세례라고 부르지 않고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표현을 바꾸었고,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다른 특징들을 함께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오늘 날 많은 신자들을 오도하고 있는 거짓된 성령세례와 방언이 어떻게 등장하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성령세례와 방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이 아니고 땅에서 기어나온 벌레 한 마리가 자라고 변신한 진화의 진화의 산물이다. 그 시초는 웨슬리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 개념이었다. 그것이 단초가 되어 발전하다가 결국 옹알거리는 거짓 방언 등을 동반한다는 성령의 재 세례로 진화되었다. 이 과정 속에는 거짓의 아비 마귀의 거짓된 성경해석과 적용이 요소요소에 차들처럼 단단하게 박혀있다.
 

김성곤 목사의 성령세례 가르침

김성곤 목사가 두날개의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 강의한 성령세례에 대한 내용들 속에도 이미 마귀가 퍼뜨린 거짓이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김성곤 목사가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 성령세례에 대해서 가르친 내용을 보자.

"성령충만한 밤이 되려면 은사에 대한 부정적 생각, 손들고(기도, 찬양)하는 것 등의 싫어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좋고 싫고가 아니라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는 대로 해야한다. 마음을 주시고 감동을 주실 때 바로 해야 한다 ... 혼이 차단하고 있음으로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은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성령의 은사가 멀어지고, 성령충만도 불가능해진다는 말은 너무도 유치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지상의 신자에게 보내신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닮아감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것을 거부하면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한다는 말이 어찌 수용될 수 있을까? 이런 말이 어떻게 성경적인 가르침이겠는가? 이는 성령충만을 무당의 손에 들린 대나무에 진동이 오는 것과 같은 어떤 불건전한 현상체험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 아닐까?

"성령세례는 성령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영적체험이다."

성령세례에 대한 김성곤 목사의 이런 가르침은 교회를 병들게하는 기존의 그릇된 성령세례 사상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정결해졌으므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 안에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성령의 세례가 성령이 함께하는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영적체험이라고 말함은 그 이전에 성령이 있기는 했으나 체험되지 않은 밋밋한 성령, 즉 간신히 구원만주는 미약한 성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가적인 성령세례 체험으로 인해 성령에 대한 영적체험이 느껴지고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짝퉁 하나님이 신자에게 나타나서 체험과 느낌 중심의 종교생활을 강조하게 되는 전형적인 거짓 성령세례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다. 신사도운동의 기름부음 사상과 같은 내용이다.

"중생한 자가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세례 받은 자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중생한 자가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 말하지 말고 성령세례를 받음과 더불어 중생한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쳐야 옳고,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언뜻 옳아보이나 성경의 진리를 왜곡한다. 기본적인 성령을 받아 구원받고 난 후 다시 성령세례를 또 받아야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그릇된 성령세례 운동가들의 말이다. 바로 이런 이론을 통해 짝퉁 하나님이 신자들을 유린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모든 참 신자가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으로 충만을 누리는가? 누리지 못하는가? 는 각자의 기도, 회개, 순종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가르쳐야 옳고,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성령세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받을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침은 성령의 재세례 주장자들의 말이다. 이런 말들을 통해 짝퉁 하나님을 접하게 만들어 신비주의로 치닫게 만들어 간다. 이미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또 어떤 성령을 또 받을 수 있겠는가? 남편이 있는데 앞으로 또 남편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결국 짝퉁 서방을 두게 만드는 것이다. 김성곤 목사의 이런 가르침이 전인적 치유수양회에 참석한 신자들이 성령으로 위장하는 다른 영들의 공략에 방비하지 않게 만들고 유린되게 만들었다. 이런 성령세례 이론하에 나타나는 거짓 영들의 장난을 권능을 주시는 성령의 또 다른 임하심(성령세례)이라고 오해하여 기뻐하게 만들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가 복음만 전하였는데 귀신들의 떠남 등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함으로 (나중에 온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안수하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김성곤 목사의 이런 가르침도 거짓된 성령의 재임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흔한 거짓된 논리와 일치한다. 김성곤 목사는 빌립 집사의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고 나중에 사도들이 와서 안수할 때 성령의 임재(성령세례)가 일어난 것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사마리아 성도들이 두 사도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내용은 어찌해석할 것인가? 복음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을 때 성령의 세례가 일어났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두 사도가 늦게 당도하여 사마리아 신자들에게 안수하였고, 그때 나타난 성령의 역사하심은 무슨 의미였을까? 이 내용을 두고 성령의 추가적인 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로 성령을 받고 신자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안수하여 또 다시 성령이 권능으로 뜨겁게 임하였다고 보고, 이내용이 바로 성령의 추가적인 세례의 성경적 전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사마리아라는 특수한 지역에 대한 특별한 경우라고 해석되어야 맞다. 사마리아는 일반 이방인들보다 더 멸시받는 곳이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도 않았다. 유대인 신자들가지도 그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을 꺼렸다.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 대표인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직접 목격하게 한 것이다. 유대교회를 대표하는 두 사도가 사마리아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유대신자들과 다른 사도들에게 증언하였고, 이로서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사실이 공인되었다. 성경을 이와 같이 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짝퉁 하나님이 다가와서 신자들을 유린하는데 성경이 이용되고 만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지역의 사람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충만한 제자로 일어났습니다."

김성곤 목사는 성령의 재 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며 인용하는 사도행전 19장의 내용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용하였다. 성령의 재세례 주장자들은 사도들이 사도행전 8장과 19장에서 사도들의 사마리아 새신자들과 에베소의 새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의 역사를 특이하게 일으켰다는 내용을 왜곡하여 두 가지 그릇된 사실을 주장한다.

하나는 안수 등의 행위로 사람이 성령을 임으로 전이시키는 임파테이션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밋밋한 구원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는 성령의 두 번째 세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창조주이신 성령 하나님을 밀고 당기면서 맘대로 주관할 수 있는 인간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피조물에게 부림당하고 끌려당하는 성령이 기독교의 성령일까? 짝퉁 성령의 미혹의 세계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에게도 성령을 부리는 권세가 있지는 않았다. 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관이었던 사도들의 안수는 개인적 권능이나 성령을 부리는 차원에서 행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교회설립 기관으로서 신약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과 관련된 행위였다. 성경 어디에도 사도들과 제자들이 이미 믿는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령의 전이하기 위해 안수하여 성공한 예가 없다. 교회설립 기관인 사도의 안수로 인해 에베소 이방인들과 이방인보다 더 못하게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도 이미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멤버로 하나님이 만드셨음이 공증되었다. 그리고 이후 사마리아인들과 다른 이방인 신자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아무도 시도하지도 않았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성경은 언제나 사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신자들에게 짝퉁 하나님을 밀어넣는 성령세례 주장들도 모두 성경에서 근거를 만들어 냈다.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 김성곤 목사가 가르친 성령세례에 대한 내용들도 그 중의 하나이다. 두날개가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한 99명의 선교사들은 바로 이런 그릇된 사상, 짝퉁 하나님 체험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외국의 영혼들에게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 교회는 무엇을 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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