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2)

 

글을 시작하며

김병훈 교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 – 논점 정리”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글에서 자신의 능동순종 주장이 지극히 성경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만 놓고 본다면, 어쩌면 성경이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필자의 눈에는 조금도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하고 객관적인 성경의 지지 없이 김병훈 교수가 진술한 것처럼 “로마서 5:18-19, 빌립보서 3:9의 말씀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지지한다는 주석이 가능하다”는 식의 애매한 접근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사들이, 아무리 자신의 논거가 부족해서 좀 곤란할지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의 유무는 인간의 영생 문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성경 구절이 A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성경 구절이 A를 의미한다고 단 정 짓고, A-교리를 생산해 내는 것은 아무리 말려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짓이다. 생각해 보라. “만인 구원설”이나 “연옥 교리”, “알미니안 교리”, 하물며 “영지주의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까지도 자신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성경 구절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몇몇 성경 구절들만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이단 교리들이 성경적인 것 같고, 그럴듯한 진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어떤 성경 구절이 이단 사상을 지지하는 주석이 가능하다면, 그럴듯한 성경 구절 몇 개를 의지하는 이단 사상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함이 성립된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성경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 속에서 보면 결코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단 교리를 지지하지 않음이 명백하기 때문에, 정통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동 순종”도 이단적인 교리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몇몇 성경 구절들만 보면 능동순종이 그럴듯하게 보일지라도, 성경의 문맥 속에서 그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전혀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전후문맥을 통해서 이 본문이 그 문맥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을 놓쳐 버리면, 성경 말씀을 가지고도 엉뚱한 헛소리를 하고, 이단적인 주장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바로 가장 기본적인 전후문맥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김 교수가 주장하는 성경 구절들을 전후문맥 속에서, 또 필요하면 헬라어 원문을 소환해서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성경의 문맥 속에서 김 교수가 내세우는 성경 구절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김 교수가 주장하는 능동순종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바람인가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김병훈 교수
김병훈 교수

 

롬5:18-19, 빌3:9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지지한다는 주석이 정말 가능한가?

김병훈 교수는 “로마서 5:18-19, 빌립보서 3:9의 말씀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를 지지한다는 주석이 가능하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고 말한다. 김 교수가 “롬5:18-19와 빌3:9는 능동순종의 전가 교리를 지지한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가능하다”라고 자신 없이 얼버무린 것은 나중에라도 잘못되면 피할 구멍을 만들어 놓을 심산은 아닌지 모르겠다.

바울은 롬5:6-11에서 인간의 태도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여기서 세 번씩이나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절),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절)를 언급하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힘주어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9절(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에서는 “그의 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는 능력임을 명백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바울은 롬5:12을, 롬5:6-11과 연결시키는 접속사 “이러므로”(Dia. tou/to/디아 투토)로 시작함으로써, 롬5:12-17에서 롬5:6-11을 더욱 심층적으로 설명한다. 바울은 여기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동시에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진술한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18절을 “그런즉”(:Ara ou=n/아라 운)으로 시작함으로써, 롬5:18-19이 “이러므로”로 시작한 롬5:12-17의 요약이며 결론임을 밝힌다. 따라서 롬5:18-19은 롬5:6-11과 롬5:12-17 전체의 요약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롬5:18-19이 롬5:6-11과 롬5:12-17의 결론에 해당한다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18절)에서 ‘의롭다 하심’의 원인으로 언급된 “한 의로운 행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앞에서 바울이 반복적으로 진술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절),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반복 외에,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말하는 “예수님이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의를 전가한다”는 내용은 진술은커녕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나 물 위로 걸으신 것 등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갈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럼에도 김병훈 교수는 롬5:18-19이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주석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비겁하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바울은 김 교수와 같은 이들이 롬5:18-19로 능동순종을 주장할 것을 미리 알았는지, 감사하게도 그는 18절에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원인을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면서, “한 의로운 행위”(e`no.j paraptw,matoj/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를 단수로 표기한다.

바울은 “한”(e`no.j/헤노스/one; a, an, single; only one)이라는 단어와 “행위”(paraptw,matoj/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라는 단수 단어로, 죄인을 의롭게 한 예수님의 유일한 행동이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임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또 19절에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원인을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순종하심”으로 번역된 “u`pakoh/j”(휘파코에스)도 18절의 “한 의로운 행위”와 동일하게 ‘단수’로 표기해서, 죄인을 의롭게 한 예수님의 유일한 “순종하심”이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임을 명백히 한다.

그러므로 롬5:18-19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원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능동순종이든 능동순종 할아버지이든,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는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김병훈 교수가 롬5:18-19이 능동순종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둘 중 하나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전후문맥을 놓친 그의 무지 때문이며, 그렇다면 그는 신학교 교수의 자질에 문제가 있으므로 교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또 하나는 김 교수가 전후문맥을 통해 롬5:18-19이 능동순종을 지지하지 않음을 알고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무 깊숙이 능동순종에 빠져있는 자신의 발 때문에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구절이라고 떼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거망동이므로 이 또한 신학교 교수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교단에서 내려오는 것이 본인에게나 신학생 모두에게 커다란 유익이 될 것이다.

김병훈 교수는 빌3: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도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주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김 교수가 무슨 근거로 빌3:9을 놓고 그렇게 말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아마도 본문에 언급된 “그리스도를 믿음”의 내용이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며, 여기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가 능동순종을 지지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짐작은 된다. 이런 까닭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한 편으로는 죗값을 치루는 측면을, 다른 한편으로는 영생의 권리를 얻는 공로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수동적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이기도 하며 또한 죄인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서 율법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생을 얻는 공로적 성격을 갖는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

김 교수가 이해한대로 빌3:9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의 근거로 언급된 “믿음”의 내용이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 순종이기도 하며 또한 죄인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서 율법을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영생을 얻는 공로적 성격을 갖는다”는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김 교수는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근거로 “십자가 죽음” 이전의 “율법 순종”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에 기여했다고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능동순종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김 교수의 능동순종 주장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빌2:8 끝에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진술로,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다.

바울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를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로 결론 내린다. 그런데 빌2:8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의 근거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바울의 단호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개역개정의 “곧”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로 번역된 “qana,tou de. staurou/”(다나투 데 수타우루)에서 “de”(데)를 번역한 것이다. “de”(데)는 역접 접속사로서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but, to the contrary, rather)의 의미를 가진다.

물론 “de”(데)를 “곧”으로 번역해도,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귀결됨을 나타내지만, 바울의 의도를 100% 드러낸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울이 역접 접속사 “de”(데)를 사용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를 언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히려(de/데)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난 의”가 주어지는데(빌3:9), 여기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의 내용이 예수님이 성육신 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빌2:8에서도 역접 접속사 “de”(데)를 사용하여, 일관되게 사람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슥3:4은 능동순종을 시사하는가?

김 교수는 “스가랴 3:4에서 더러운 옷을 벗긴 다음에 벗은 몸으로 두지 않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측면을 시사한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김 교수의 이런 주장은 슥3:4에서 “더러운 옷을 벗긴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죄 사함이며, “아름다운 옷을 입힌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으로 인한 의의 전가라고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 교수의 이런 이해는 오리겐도 울고 갈만큼 심한 풍유적인 이해이며, 어처구니없는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계19:8(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을 보면, 성도들이 입은 깨끗한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상징되는 깨끗한 세마포는 무엇으로 깨끗하게 되었는가?

김 교수가 주장하는 ‘능동순종’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의가 전가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진술은 없다. 그러나 계7:14(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을 보면, 성도의 행실로 상징되는 깨끗한 세마포가 무엇으로 깨끗하게 되었는지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 즉 바울이 반복해서 힘주어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롬3:31은 능동순종에 대한 해석을 열어주는가?

김 교수는 롬3:31에 대해서도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분리되지 않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열어준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롬3:31은 능동순종을 성경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성경 구절임에 틀림없을 텐데, 그럼에도 김 교수는 롬3:31이 능동순종에 대해 열어준 해석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롬3:31은 능동순종을 조금도 지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분리되지 않는 두 측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롬3:31이 결코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롬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은 바울이 롬3:31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법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절)가 율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해,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김 교수와 같은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의 바울의 주장 속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신 것도 포함된다고 여기고, 롬3:31이 능동순종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이 무엇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롬3:25에서 바울이 밝히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법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화목제물로 세우시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율법 지키심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법에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반드시 여기서 그 사실을 진술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것을 진술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율법 순종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아무리 씻고 찾아보아도 보아도 롬3:25에는 예수님의 율법 순종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에 기여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으며, 암시조차도 없다. 왜 그런 것일까? 바울이 실수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성령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인가? 만약 바울과 성령 하나님의 실수로 예수님의 율법 순종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에 기여했다 진술을 빠뜨린 것이 사실이라면, 김 교수가 주장하는 능동순종 교리는 모든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진리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를 쓰도록 바울을 감동하신 성령 하나님은 실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롬3:25에 예수의 피만 있고, 예수님의 율법 순종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법에 예수님의 율법 순종으로 인한 의의 전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롬8:3-4와 롬10:4은 능동순종의 의의 전가 해석과 조화를 이루는가?

김 교수는 “로마서 8:3-4의 구절에서 “율법의 요구”는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의 전가를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 구절만 더 들어본다면 로마서 10:4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폐하였음을 말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김 교수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뒷받침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롬8:3-4(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은 롬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의 “해방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롬8:3-4에 진술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려고 시행하신 “해방 방법”은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이다. 여기서 ”정하사“로 번역된 헬라어 ”kate,krinen“(카테크리넨)은 ”형벌을 결정하다, 정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katakri,nw“(카타크리노)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이신 성자에게 형벌을 결정하시고 정죄하심으로써 죄인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성자를 정죄하셨는가? 하나님은 성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 정죄하셨다(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김 교수가 “로마서 10:4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폐하였음을 말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의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라고 너스레를 떤 롬10:4도 롬8:3-4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즉, 롬10: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에서 “율법의 마침”은 롬8:4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와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롬10:4의 “율법의 마침”은 롬8:3-4에서 필자가 설명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틀림없다. 이것은 롬10:4의 전후문맥에서도 선명하게 발견된다. 왜냐하면 롬9:33에 진술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명백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10:9은 능동순종과 분리되지 않는가?

김 교수는 또 “히브리서 10:19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하지만, 이 고난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라는 말로 아예 성경을 왜곡하려고 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예수께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는 김 교수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고난 중에서도 “십자가의 죽으심”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을 상징하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예수께서 생명(피)을 내어주시고 죽으신 십자가를 의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당하신 고난과 율법 순종을 슬그머니 포함시켜 버린다. 이는 김 교수가 자신이 주장하는 능동순종으로 인한 의의 전가 교리를 성경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 성경 말씀을 왜곡한 것이다.

김 교수의 왜곡과는 다르게 히10: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에는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한 가닥의 지푸라기도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10:19에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이 예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기 때문인데, 이는 예수의 피가 성소의 휘장을 찢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10:10에서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단언한다.

만약 김 교수의 주장대로 “예수의 피”라고 하는 예수의 고난에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율법 순종이 포함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할 때마다 순종한 만큼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할 때에도, 죽으시기 전 지독한 고난을 받으실 때에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칠 때에도 성소의 휘장은 찢어지지 않았다.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막15:37-38/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은, 즉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즉 “예수의 피”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히10:19의 의미가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17세기 개혁신학의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피’는 제유법적인 표현으로 의의 전가를 이루는 데에 능동적 순종에 의해 전가되는 의를 배제하지 않는다.”([바른믿음], 2021.05.25,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 할 거예요>에서 발췌)는 말로, 17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을 소환해서 자신의 성경 왜곡을 정당화시키려고까지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히10:19의 “예수의 피”는 김 교수가 인용하듯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과 고난 전부를 나타내는 제유법이 아니다. “예수의 피”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하며, 죄인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담력을 얻을 수 있도록 성소의 휘장을 찢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와 함께 17세기의 여러 개혁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피’를 제유법으로 보고 능동순종을 주장했다면, 그들도 김 교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즉 복음을 왜곡한 심각한 이단이 되고 말 것이다.
 

글을 마치며

김병훈 교수가 주장하는 능동순종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한 방법이므로 죄인들이 결코 몰라서는 안 되는 복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 길을 계시하고 있는 성경은 예수의 율법 순종이 죄인들에게 의를 전가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한 방법임을, 십자가만큼의 횟수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횟수로 명확하게 진술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필자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성경 어디에도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구절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 아니 암시조차도 없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선명하게 예시한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 양에 관한 기록에서도, 또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노골적으로 제시한 제사법에 기록된 희생 제사에서도 능동순종을 지지할만한 기록은 눈에 불을 켜도 찾아볼 수 없다.

만약 성경에 유월절 어린양은 양의 율법을 잘 지킨 착한 양으로 해야 한다든지 하는 암시만 있었어도,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무척이나 기뻐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