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0)

 

글을 시작하며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능동순종”으로 의를 획득하여 자신을 의롭게 하고 죄인들에게 그 의를 전가시켰으며, 또한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수동순종”으로 죄인들의 죄책을 면제해 주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정이절 목사가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식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성경 구절은 성경 도처에 널려 있지만(그래서 필자는 ‘십자가’뿐임을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밤을 새워도 안 될 것 같아서다.), “능동순종”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몇몇 성경 구절의 의미를 왜곡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 구절로 내세우기는 한다. 그것들 중 이들이 가장 빈번하게 내세우는 성경 구절이 롬5:15-20과 갈4:4-5인 것처럼 보인다. “능동순종” 주장자들이 이 성경 구절을 선호하는 까닭은 아마도 롬5:19의 “순종하심으로”와 갈4:4의 “율법 아래”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능동순종” 주장자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바울은 롬5:15-20과 갈4:4-5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도 “능동순종”에 대해서 언급은커녕 암시조차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오히려 롬5:15-20과 갈4:4-5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구원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능동순종”은 성경에 없는 허구이며, 뒤에서 밝히겠지만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신성과 인간이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필자는 왜 이들의 주장이 명백한 이단 사상인지를, 먼저 이들이 내세우는 롬5:15-20과 갈4:4-5의 원문 주석을 통해 입증할 것이다.
 

롬5:15-19의 바른 해석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5-19)

바울은 롬5:1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계속해서 6절(“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 8절(“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10절(“그 아들의 죽으심으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의 핵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죽으심”의 필연적인 이유를 롬5:15, 17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말미암아)”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이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18절에서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의 의미를 19절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라고 다시 설명한다.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19절의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억지를 부리지만, 불행하게도 바울은 결코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다. 바울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구원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가 관여했음을 말하지 않으며, 하물며 암시조차도 없다. 오히려 바울은 20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이 들어온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의를 획득하는 용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상을 더욱 크게 들어내는 용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5절과 17절의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로 번역된
“tw/| tou/ e`no.j paraptw,mati”(토 투 헤노스 파랍토마티)에서 앞의 “tw/|”(토)는 “paraptw,mati”(파랍토마티/범죄로 인하여)와 관련된 ‘정관사’이며,
뒤의 “tou”(투)는 “e`no.j”(헤노스/한 사람의)와 관련된 ‘정관사’이다. 그러므로 “tw/| tou/ e`no.j paraptw,mati”(토 투 헤노스 파랍토마티)를 직역하면 “그 하나(한 사람)의 그 범죄(여기서 ”범죄“는 ‘단수’이다)로 인하여”가 될 것이다. 바울의 이 표현은 곧 에덴동산에서의 “아담, 그 한 사람의 그 범죄”를 의미한다. 또 “아담, 그 한 사람의 그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대응책은 “한 의로운 행위(여기서 ”행위“도 단수이다)로 말미암아”(18절)이며,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한 사람이 순종(여기서 ”순종“도 단수이다)하심으로”(19절)이다.

이런 사실들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더욱 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18절)로 번역된 “e`no.j dikaiw,matoj”(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가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17절)로 번역된 “tw/| tou/ e`no.j paraptw,mati”(토 투 헤노스 파랍토마티)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e`no.j dikaiw,matoj”(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19절)로 번역된 “th/j u`pakoh/j tou/ e`no.j”(테스 휘파코에스 투 헤노스)와 같은 의미임을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15절과 17절의 “tw/| tou/ e`no.j paraptw,mati”(토 투 헤노스 파랍토마티/직역: 그 한 사람의 그 한 범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창3:3)를 따 먹은 “그 한 범죄”를 말하며, 18절의 “e`no.j dikaiw,matoj”(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한 의로운 행위)와 19절의 “th/j u`pakoh/j tou/ e`no.j”(테스 휘파코에스 투 헤노스/직역: 그 한 사람의 그 순종)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순종을 의미한다(히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능동순종” 주장자들이 내세우는 롬5:15-19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한 범죄”, “한 사람”, “한 의로운 행동”, “순종하심” 등은 모두 ‘단수’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바울이 여기서 “한 의로운 행동”, 즉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를 언급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들에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셨다”라는 의미가 들어올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의로운 행동”, 즉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어 하셨던, 그러나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신 “십자가의 죽으심”이 명백하다. 따라서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롬5:15-19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순종하셨다”는 둥 어쩌구 저쩌구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능동순종”이 묻힐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갈4:4-5의 바른 해석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위의 4절만 본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그의 생애 동안 율법을 준수하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함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5절의 문맥 속에서 4절을 보면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에 “예수님이 율법을 준수하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 조금도 의도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4절)의 목적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5절)하기 위함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량하시고”로 번역된 “evxagora,sh|”(엑사고라세)의 원형 “evxagora,zw”(엑사고라조/set free)는 ‘누군가가가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로 하여금 자유인이 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바울이 갈4:5에 언급한 “속량하시고”는 구약의 성전 제사에서 죄를 속하기 위해 흠 없는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고기를 불살라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속죄 제사를 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죄에 대한 속량의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바울은 이미 갈1: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에서 밝혔고,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evxhgo,rasen/엑사고라센/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에서는 갈4:5에서와 동일한 “속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속량”의 의미가 “십자가”(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임을 분명히 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예를 들면 딛2: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속량의 대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갈4:4-5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율법 아래”의 “~아래”(u`po./휘포)이다.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지속적으로 “~아래”(u`po./휘포)라는 표현으로써, 죄의 권세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갈3:10에서 “저주 아래”(u`po. kata,ran eivsi,n/휘포 카타란)와 갈3:22에서 “죄 아래”(u`po. a`marti,an/휘포 하말티안) 등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4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5절)하기 위한 “십자가의 대속 제물”과 관련된 것임이 명명백백하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살인한 자를 속량하려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대신 지켜주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그 죽음에 대응하는, 즉 생명을 대신 내어주는 것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갈4:5에서 언급한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장치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심”과 직결되는 장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는 율법을 어김으로 죄의 노예가 된 자들을 의미한다. 죄의 노예가 된 자들에 대한 율법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는 속전(삯)은 “사망”에 대응하는 “생명”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에 대응하는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주시고 죄인을 속량하셨다.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백번 양보해서 설령 예수님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획득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결코 속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가된 의가 사망의 대가에 해당하는 속전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갈4:4-5을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시도는 스스로 “능동순종”이 묻힐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율법 준수보다 더욱 더 강력한 성자의 “능동순종”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수동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성자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수동순종”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구원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 아래서 자신의 체포를 막으려고 칼을 휘두른 한 제자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26:53-54)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십자가에 죽으심이 예수님의 능동적인 순종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에 비유하시면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동적인 명령이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가 수동적인 것으로 보였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능동순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동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또 “능동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의를 획득했다고 하는 것은 죄 없으신, 그래서 의를 획득할 필요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의 의로우신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보았듯이 “능동순종”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의 상상에서 나온 어설픈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어설픈 허구가 지금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의 허구를 그대로 답습하는 더 어리석은 자들이 교회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능동순종”이 허구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필자가 만든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빨간색 글자는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이며 파란색 글자는 필자의 성경적인 설명이다).

절대적 재벌(절대적 의를 소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절대적 빈민촌(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불의한 세상)에 왔다(성육신). 절대적 재벌은 빈민촌에서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그러나 실제로 절대 재벌은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돈을 번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절대적 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열심히 일을 한 것은 게으름을 피우며 조금도 일하지 않는 절대 빈민들에게 부의 본을 보여 교훈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절대적 재벌은 자신이 번 돈 전부를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빈민들에게 다 전가해 주고 그 곳을 떠났다. 절대 빈민들은 절대 재벌이 전가해 준 돈을 마음껏 쓰면서 부자로 살았다(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절대 빈민들은 여전히 게으름 속에서 빈민으로 살고 있다. 단 절대 재벌의 뜻을 깨달은 몇 몇 사람들만이 게으름을 벗어 던지고 절대 재벌처럼 열심히 일함으로써, 조금씩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절대 빈민들의 일부가 변화되어 열심히 일하게 된 이유는 절대 재벌이 떠나면서 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라는 당부와 함께, 다시 돌아올 때 절대 부자로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재산을 다 나누어 주겠다는 약속을 이들이 굳게 믿었고, 또 약속을 보증하는 절대 재벌이 발행한 증서(보혜사 성령)를 이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현재는 비록 빈민이지만, 법정적으로는 절대 부자이며(이신칭의), 받은 증서로 인해 힘을 내어 열심히 일함으로써 점점 더 빈민의 삶에서 벗어나고 있었다(성화의 삶). 이들은 절대 재벌이 다시 돌아오는 그 날에 반드시 절대 부자가 될 것이다}.

“능동순종” 사상이 정말로 맞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전가 받은 의로 인해 실제로 예수님처럼 의롭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범죄하며 불의한 자로 살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죄책을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임지우시고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칭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의인의 대우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이며,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이신칭의”로 설명된다. “능동순종” 주장자들이 좋아하는 롬5:19에 나오는 “되리라”가 이것을 다시 한 번 명백하게 입증해 준다.

롬5:19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katastaqh,sontai”(카타스타데손타이)는 동사 “kaqi,sthmi”(카디스테미)의 ‘미래 수동태’이며, “kaqi,sthmi”(카디스테미)의 의미는 “지정하다, 세우다, 규정하다, 간주하다” 등이다(눅12: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kate,sthsen/카테스테센/ 하시고).

그러므로 본문의 “katastaqh,sontai”(카타스타데손타이)는 “(실제로) 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실제로) ~이 되다”의 의미를 가진 대표적인 동사는 “gi,nomai”(기노마이/become, be)이다(마4: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ge,nwntai/게논타이/).

따라서 “능동순종”이 주장하는 대로 의가 전가되어 죄인이 실제로 의인이 되었다면, 바울은 “되리라”를 표현할 때, 동사 “kaqi,sthmi”(카디스테미) 대신에 “gi,nomai”(기노마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되리라”를, “규정하다, 간주하다”의 의미를 가진 “kaqi,sthmi”(카디스테미)의 ‘수동태’ “katastaqh,sontai”(카타스타데손타이)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이신칭의).

그러므로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예수님의 신성과 죄 없으시기 때문에 의를 획득할 필요가 전혀 없으신 의로우신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또 이들은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어찌 이단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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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