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주의 청교도들이 시작한 교회언약 제도로 인해 가장 심한 고통을 당했던 사람은 신대륙의 마지막 청교도라 불리우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1-1758)였다. 누구보다 청교도 사상과 신학에 충실했던 에드워즈도 많은 신학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에드워즈는 특이한 신비주의 이단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일으킨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 1740-1742)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크게 미혹되었고, 많은 교회들의 건전한 신앙이 파괴되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신학을 깊이 연구한 역사신학자 조지 마스덴(George M. Marsden, 1939~현재)은 에드워즈의 대각성 직후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특별히 뉴잉글랜드의 교회의 상황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각성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교회들을 분열시켰다. 사람들은 목회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경멸했다.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신앙훈련은 무너졌다. 거짓된 신자들(광신자들)은 사탄이 만들어 낸 거짓된 속임수들에 열광하였다. 사람들은 참된 경건한 신앙을 멸시하였다. 모든 종류의 사악한 죄악들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편으로 에드워즈 역시 청교도들의 비성경적인 교회언약 제도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당한 사람이기도 했다. 1726년 에드워즈는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43-1729)가 담임목사로 목회하는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의 노스햄프턴 교회(Northhampton Church)에 부목사로 청빙되었다.

그리고 1729년 외할아버지가 사망하자 그 교회 교인들에 의해 에드워즈는 담임목사로 청빙되었고 1750년까지 시무했다. 이 교회에서 23년 동안 시무하는 동안 에드워즈는 두 번의 부흥을 이루어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의 첫 번째 부흥 운동은 ‘코네티컷 계곡의 부흥’(Connecticut Valley Rivival, 1734-1735)라고 불리워지고 있고, 두 번째 부흥은 세계 교회사에서 ‘1차 대각성’(the 1st Great Rivival, 1740-1742)라고 불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50년에 에드워즈는 자신이 목회하면서 두 번의 놀라운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바로 그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으로부터 불신임 받고 불행하게 목회를 접어야만 했다. 에드워즈와 그 교회 신자들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던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교회언약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사실 에드워즈가 목회할 때에는 이미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이 시작한 교회언약 제도가 신대륙에서 거의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은 무의미한 형식으로 전락했고, 큰 무리를 범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 성찬식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드워즈 당시에는 초기 청교도들이 시행했던 것처럼 교회언약 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한다면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사람들이 교회의 정회원의 자격을 얻어 성찬식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목회자 청빙과 사임 등의 교회의 중대사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1세대들의 시대에는 교인이 되기 위해 회심준비론 구도에 맞게 자신의 회심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교인의 의무를 다 하겠다고 서약함으로서 교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청교도 1세대들이 죽고 그들의 자녀들과 손자 세대가 뉴잉글랜드의 주류가 되면서 교회의 상황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교회언약 제도를 처음의 원칙대로 집행되면 교회의 정회원이 되지 못하여 성찬식에 참여할 수도 없고 교회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계속 증가하였고 누적되어 갔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중도언약이란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 조상들이 처음에 고안한 교회언약 제도를 원칙대로 시행하지 않고 문턱을 낮추어 관대하게 시행하자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회심준비론 구도에 맞게 자신의 회심 체험을 공개적으로 보고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청교도 1세대들의 관점에 의하면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유아세례를 받을 수도 없었다.

중도언약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완전히 소외된 이방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베려하자는 정책이었다. 교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을지라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지 말고, 특히 그 사람들의 자녀들이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수정하여 유아세례를 받게 하자는 것이 중도언약을 도입한 목적이었다. 중도언약을 도입하기 위해 앞장선 사람은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이며 당시 신대륙의 청교도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던 스토다드 목사였다.

그러나 스토다드 목사는 자신이 중도언약의 도입을 위해 앞장섰으나 나중에는 중도언약까지도 무시하면서 아무에게나 세례를 주는 느슨한 목회를 하였다. 스토다드 목사는 1704년 자신이 목회하고 나중에 에드워즈가 뒤를 이어 목회하면서 대각성을 일으키게 되는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35년 정도 목회하였을 무렵부터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거듭나지 못했을지라도 전도와 신앙 성장의 수단으로서 성찬을 허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비성경적인 신학을 주장했다. 그때는 이미 최초의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 조상들이 시작한 교회언약 제도의 본래의 취지가 거의 다 허물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스토다드 목사가 앞장서서 교회언약 제도와 그 후의 중도언약 개념까지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당시 스토다드는 ‘코넥티컷 계곡의 교황’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목회자였으므로 그의 주장을 반박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스토다드의 주장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회중교회들에게 수용되었고, 그 때문에 이전의 청교도 조상들이 그토록 중시했던 교회언약 제도는 더욱 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외할아버지 스토다드가 죽은 후 그 교회 신자들에 의해 담임목사로 청빙되었다. 에드워즈는 1729년에 담임목사로 청빙되었고, 1734-35년 동안 매우 신비적인 요소가 많았던 특이한 부흥, ‘코네티컷 계곡의 부흥’이라 불리우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740-42년에 이후 세계 역사에 가장 놀라운 부흥으로 기록되는 1차 대각성을 이끌었다.

에드워즈에게는 분명히 신학적인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특히 오늘 날의 오순절-신사도 영성 유형의 신비주의 요소들이 그에게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 당시 에드워즈를 통해 나타나는 신비적인 현상들의 정체를 바르게 분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즈 부흥에는 분명히 불건전한 신비주의적 요소가 많았음에도 사람들이 그의 부흥운동의 마력에 취하여 정신차리지 못하였다. 그 위험한 부흥의 물결에 가장 깊이 취하였던 사람은 바로 에드워즈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대단한 부흥을 이끌어 낸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회중교회들이 성찬식에 매우 타락했고 잘못되었다고 근심했다. 에드워즈는 자신에게 목회사역을 물려준 외할아버지 스토다드 목사가 아무나 교회의 정회원이 되게 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함으로 교회의 순수성을 크게 훼손했고 신학과 신앙을 변질시켜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토다드 목사에게서 영향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늘 속으로 고민했다.

에드워즈가 고민했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문제도 분리주의 청교도 개혁운동의 선구자 로버트 브라운에게서 시작된 교회언약 제도과 관련된 문제였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회중파 청교도 교회들의 허물어져버린 교회언약 제도와 성찬 신학을 다시 되살려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에드워즈가 담임목회를 시작하기 이전 스토다드 목사 시절에 이미 교회의 정회원 자격을 획득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고 있는 기존 교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매우 예민한 문제였다. 에드워즈가 공개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신앙적 요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외할아버지 스토다드 목사 시절에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었다.

에드워즈는 오래 참고 고심하다가 그의 생애의 두 번째 부흥의 때인 1744년부터 확실한 회심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성찬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 성찬을 제공함으로 신앙의 변화와 성장을 유도할 수 있다는 외할아버지 스토다드 목사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했다. 1748년 6월 노스햄프턴 교회에 꾸준하게 출석하면서 웨드워즈의 목회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되어주었던 외삼촌 스토다드 대령, 외할아버지 스토다드의 아들이 사망했다. 에드워즈에게는 강력한 후견인을 잃는 슬픔이었으나 동시에 외할아버지 스토다드의 성찬 신학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에드워즈는 교회에 꾸준하게 다닌 사람이라고 하여 자동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하게 허락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다수의 기존 교인들이 에드워즈의 담임목사의 지위에 대해 저항하면서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결국 1750년 에드워즈는 23년 동안 시무하면서 뉴잉글랜드와 세계의 역사에 길이 남는 놀라운 부흥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분리주의 청교도 회중교회의 법대로 교회의 정회원 가정들의 남자 대표 230명이 투표하였는데, 23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든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추방시키는데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 그 교회 신자들 대부분이 에드워즈의 목회를 거부하는 쪽으로 투표한 것이다.

20년 이상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왜 그처럼 에드워즈를 미워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누적되었으므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의 가장 유력한 원인 하나는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에드워즈가 기존의 관행과 다른 엄격한 신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신앙의 가시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성찬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은 이전에 그런 엄격한 요구를 받지 않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단지 성찬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브라운으로부터 시작된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의 독특한 교회언약 제도의 심각한 부작용이었다. 무난하게 교회에 출석하였을지라도 자동적으로 교회의 정회원이 되게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에드워즈의 주장은 순수하고 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언약 제도를 도입했던 초창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 조상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특히 그들이 중시하는 회심준비론의 정형화된 이론에 맞게 자신의 구원 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교인이 된 후에는 신앙의 순종과 실천에 대해 자발적으로 서약하는 사람들만 교회의 정회원이 되게 하였던 처음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 곧 에드워즈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신대륙에 정착한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 개혁운동의 조상 브라운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원래의 정신과 신앙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사납게 적대시하면서 대적했다. 왜 그랬을까? 왜 회심준비론 목회의 대가 에드워즈는 23년 동안 설교하면서 세계 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은 대부흥을 두 번이나 일으킨 바로 그 교회에서 비참하게 추방되었을까?

그의 목회에 이단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리되게 하신 것이라고 인정해야 옳다. 근본적인 문제는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이 시작한 교회언약 제도 그 자체 속에 심각한 모순과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를 천상의 교회처럼 순수하고 완전한 교회로 세우려는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이후 완전하고 순수한 교회가 실현되었던 적도 없다. 지상의 교회는 언제나 사탄과 싸우고 있는 교회이고, 죄에 물들기도 하는 교회이고, 심지어 어떤 시대에는 완전히 복음을 배반하기도 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사람은 과연 누가 참된 신자인지 누가 거짓된 신자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없다.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와 완전히 다른 순수하고 완전한 지상 교회 설립을 위해 교회언약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국 그들의 교회언약 제도 역시 또 하나의 형식이 되었고 신자들의 신앙의 자발성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또 다른 멍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기 신대륙의 청교도들은 더욱 더 비성경적인 회심준비론 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열중했고 그것을 부지런히 교회와 목회에 적용하였다. 회심준비론에 걸맞는 구원의 여정을 경험한다는 것도 성경적으로 불가능한데, 교회의 정회원이 되어 성찬식에 참여하기 위해 회심준비론이 가르치는 회심의 과정을 간증하는 절차까지 부과되었으므로 신대륙의 청교도들의 교회언약 제도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자신은 비성경적인 회심준비론에 깊이 심취해있었던 문제성이 많은 목회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일어난 괴상한 거짓 부흥에 누구보다 깊이 심취되어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리석게도 이미 지나간 옛 물결이 되어버린 회심준비론과 교회언약 제도를 다시 엄격하게 실행하여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하게 만드는 기준을 더욱 강화시키려고 했다. 1700년대 신대륙의 청교도들에게 교회언약과 회심준비론 사상은 이미 유통기간이 지나버린 통조림과 같은 것이었는데, 에드워즈는 자신을 통해 나타난 거짓 부흥에 광분되어 다시 이전의 청교도들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신대륙의 청교도 회중교회 신자들은 교회언약 제도와 회심준비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왜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은 없었을지라도 그것에 맞게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회심준비론에 입각한 교회언약 제도의 강화 주장은 기존의 교인들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회심준비론과 교회언약 제도를 사실상 폐기하는데 앞장섰던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스토다드 목사에게서 배우고 세례 받은 기존의 신자들이 에드워즈를 추방하기를 원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가 당시 신대륙의 청교도들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으면서 목회했던 스토다드 목사의 노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를 23년이나 들었던 교인들 대부분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세계적으로 괴상한 부흥의 물결의 진원지였던 자신의 교회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에드워즈가 비성경적인 회심준비론 이단사상에 미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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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