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합신 신학위 보고서 5항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두 번째 반박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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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에 대한 합신 신학위 반박>
“또한 박윤선 박사님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박윤선 박사님께서 회중교회주의 청교도들에 의해 도입된 그리스도의 능동수준 주장에 대해 계시의존 사색을 깊이 하지 않으신 것 같다. 기본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의를 성립시킨 순종을 피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박윤선 박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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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외부인을 공격하는 좋은 방법은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그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합신 신학위의 전략이 아주 영리하고 좋다. 그러나 이 참에 합신의 스승이신 박윤선 박사님이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안에서 영원 전에 서로 계약한 대로 인류를 구속하실 계획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영원한 계약(pactum salutis)이요, 이 영원한 계약에 뒤이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행위 계약(行爲契約)과 은혜 계약(恩惠契約)이다. 인간이 행위 계약(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상대하시고 세운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그가 순종하면 영생을 얻도록 한 것)을 지키지 못한 고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시키시기로 인류에게 언약한 것이 은혜 계약(foedus gratiae)이다.”(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57)

박윤선 박사님도 행위언약-은혜언약에 말하셨다. 장로교단의 모든 신학생들이 성경의 언약을 행위언약-은혜언약으로 배웠다.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배웠고 배우고 있다. 그러면 성경에 행위언약-은혜언약이라는 말이 있는가? 성경에는 그런 용어가 없다. 옛언약-새언약이라는 용어들은 있으나, 행위언약-은혜언약이라는 용어는 없다.

용어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내용도 없다. 행위언약이란 영생과 무관하게 창조된 아담이 영생의 자격이 되는 행위들을 잘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의 기회를 주신다는 내용의 언약 개념이다. 전통적 개혁신학의 아버지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도 그렇게 가르쳤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 맺어진 첫 번째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셨고, 이 명령을 완전하게 성취한 후에 비로소 영생과 하늘의 구원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헤르만 바빙크, <찬송의 제사> (박재은 역)(다함, 2020), 26.)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아담이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지 않고, 영생과 하나님의 백성이 될 기회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바빙크의 언약 이해는 비성경적이다. 이것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성경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똑 같은 가르침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에 이미 그대로 기술되었다.

“2. 행위 언약: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영생의 기회를 주셨으나 인간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원죄가 아니다. 성경에 그런 원죄는 없다. 그러면 이런 언약과 원죄 개념은 왜 생겼을까? 왜 우리에게 강요되었을까?

우리의 선조 청교도들의 그릇된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웨신서는 청교들이 만들었고, 웨신서를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청교도가 아닌 사람은 없었다. 신사도운동이 무르익었을 때 신사도파들이 신앙고백을 만들었다면 어떤 내용이었을까? 청교도운동이 무르익었을 때 청교도파들이 만든 신앙고백서의 특징과 유사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청교도파들의 신앙을 신사도파들의 신앙에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국교회를 더 정상적인 교회로 바꾸는 것을 목표하였던 개혁자들이었다. 1580년대까지는 국교회를 장로교회로 바꾸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1590년대부터 국교회의 외적인 체제에 도전하지 않고 국교회 신자들의 신앙과 의식을 바꾸어서 장기적으로 국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청교도들의 주요한 전략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국교회 신자가 되고, 때가되면 세례를 받아 구원받고, 그리고 평생 국교회 감독들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의 개인적 자세와 노력에 의해 구원이 주어진다는 행위구원론 신학이 좋았다.

웨신서와 바빙크의 언약 개념은 사실상 행위구원론 신학이다. 아담이 은혜와 영생 안에서 처음부터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생의 기회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곧 아담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행위구원론 신학이 아니면 무엇인가? 청교도파들은 이런 신학을 개혁운동의 신학적 원동력으로 삼았다. 결국 이것으로 국민들의 신앙과 의식을 깨우는데 성공했다. 50년 후에 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국교회와 국교회를 후원하는 국왕을 죽이고 추방하게 만들었다.

먼저 남쪽 잉글랜드의 국교회 성직자 청교도 윌리엄 퍼킨스와 그 제자들에게서 시작된 사상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잉글랜의 국교회 성직자들이면서 장로교회주의자들인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북쪽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도 이 사상이 전파되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의 사상이 전파되게 만드는 주요한 수단은 책이었다. 그들은 책을 출판하는데 온 힘을 다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방향의 개혁운동이 확산되게 만들었다. 결국 1640년대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주의자들에게도 이 사상이 많이 전파된 상태였고, 그래서 웨신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청교도들이 그런 신앙 사고에 집착했던 것은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그들의 상황에서 국교회주의를 무너뜨리고 더 온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해 그리했다. 그들의 상황에서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행위구원론이 먹혔고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행위구원론의 본산지는 천주교이다. 청교도들에게 “종교개혁을 개혁했던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생겨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완성한 종교개혁을 무너뜨리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였던 사람들이다. 

박윤선 박사님은 행위언약-은혜언약이 등장하여 자리를 잡은 과정에 대한 이런 점들을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신학교육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므로 자기 시대의 대세와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박윤선 박사님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러면 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고, 특히 필자에게는 그런 생각에 확신과 힘을 주는 서철원 박사님의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철원 박사도 더 일찍 태어나서 신학을 연구했다면 박윤선 박사님과 동일했을 것이다.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끼고 있는 자기 시대의 안경으로 인해 누구는 더 많은 것을 진리를 보고, 누구는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역사에서 흔하게 일어났다.

“갈 3:6-29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통일성(統一性) 또는 불변성(不變性)이다. 곧,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同一)하게 믿음으로만 의(義)를 얻는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義)를 주신 방식이나,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방식이 결국 동일함을, 바울이 여기서 논증한다.”(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120-21)

박윤선 박사님은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의를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박윤선 박사님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를 실질적으로 거부했다는 것과 같다. 능동순종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순종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천국 영생에 필요한 의로움을 얻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능동순종 교리가 진리이면,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의 의를 얻으라고 요구받는 시대였어야 한다. 사람이 그리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 대신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능동순종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구원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없었다. 구약의 율법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언약에 동참하게된 후 언약 백성으로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었다. 박윤선 박사님은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셨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율법이 인류의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오해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을 반대하는 말씀이요, 율법은 인간의 죄를 없이 하지도 못하며,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도 못한다는 것을 역설함이다. 즉, 이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받고 그것을 알고 보니, 자기의 부패와 자기의 연약과 자기의 많은 죄들을 발견하게 될 뿐이라는 뜻이다.”(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178.)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박윤선 박사님의 가르침은 능동순종 교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율법은 의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람의 죄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하셨다. 그러면 사람이나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필요한 의로움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은 본래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님(소제목). 갈 3장 10-12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율법이 제정된 것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 아님을 잘 밝혀준다. 구약 자체가 인간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소망이 없음에 대하여 역설하는 동시에,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 사실을 고조한다. 바울은 여기서도 합 2:4절을 인용하였으니, 곧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말씀이다. ”(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124)

박윤선 박사님은 구약의 율법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 의를 얻을 소망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 능동순종 교리는 사실상 박윤선 박사님의 신학에서 설 자리가 없다.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126)

박윤선 박사님은 율법이 온 목적이 오직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능동순종 교리는 박윤선 박사님의 신앙 안에서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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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