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6, 17일 이틀 동안 예장 합동 이대위의 세마가 충남 유성에서 있었다. 이때 서철원 박사께서 청교도 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 강의하였다. 청교도 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사상은 현재 합동 이대위가 연구하여 금년 10월에 발표하게 되는 매우 중대한 이단사상 문제이다.
 

 

이날 강의에서 서철원 박사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는다는 청교도 신학의 칭의신학의 구원론을 설명하면서, 칼빈의 율법에 대한 애매모호한 주장을 잠시 언급했다. 서철원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빈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에서 나아가 율법에 구원 기능을 부가하였다. 율법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죽이고 망하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는 구원하는 기능을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주장과 같다.”(서철원 박사)

칼빈이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조금 부적절한 언급을 했다는 의미이다. 율법이 사람에게 구원에 필요한 의를 주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전혀 없다. 신약에도 율법이 사람에게 구원을 위한 자격(의로움)을 주기 위해 왔다는 가르침이 없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과 무관한 이야기이다.

'율법의 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어떤 모양의 의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구원을 얻게 하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헌신되었을 때 자신에게 '율법의 의'가 있었다고 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은 자에게 작용할 수 있다. 율법에 합당하게 살면 하나님의 칭찬과 복과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구원 받기 전에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어야 구원을 받거나, 또는 구원 받는데 더 유리해 진다는 가르침은 철저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이 무관하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명시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지난 번 필자는 합신의 신학위 교수님들로부터 칼빈이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가 구원에 작용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는 반박을 받았다. 합신 신학위 교수님들은 다음과 같이 칼빈이 구원을 위해 작용하는 율법 순종의 의를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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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 행위언약 사상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의한 의는 수동적 순종만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의 의를 배제시키지 않았습니다.”(합신 신학위 반박)

“누구든지 율법을 성취할 자에게 주어질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구해야만 한다. 또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라고 율법 안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다 ...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짐을 지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셨으니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자들인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로운 공로를 얻어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가?”(기독교강요 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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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성경이 말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것을 칼빈이나 루터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사람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율법이 구원 얻을 사람으로 하여금 미리 자기의 죄를 발견하게 만들어 자기의 죄를 해결해 주실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려고 왔다고 가르친다.

칼빈이나 루터가 이것과 다르게 말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 칼빈이나 루터가 성경과 다르게 말하였다고 우리가 그것을 계속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능동순종의 뒤를 이어 큰 화두로 떠오르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 청교도 신학의 회심준비론 사상도 루터와 깊은 연관이 있다. 루터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다. 율법의 선행으로 자기의 구원을 보장 받으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크게 절망하였고,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

루터는 구원 받기 위해 모두가 자기와 같은 신앙의 여정을 거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 전에 먼저 율법의 요구에 직면하여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그리스도의 공로의 가치를 알고 사모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회심준비 사상은 루터의 견해에서 큰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루터의 신앙 여정은 특이한 경우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루터처럼 율법 앞에서 죄를 알고 절망하고 율법의 선행으로 구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 좌절한 후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어 구원 얻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성경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디에 살든지, 무슨 종교를 믿든지 ...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듣고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 전에 죄를 깨닫고, 구원을 갈망하고, 지옥을 무서워하고, 천국을 사모하고, 예배드리면서 그라스도의 공로를 간구하고 ... 이러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루터는 먼저 구원과 무관한 천주교의 신부가 되어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라 헛되이 구원을 추구하였다. 그러다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구원 받기 전에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모두에게 정하신 일반적인 길이 아니다. 먼저 잘못된 종교에 빠졌던 루터의 특이한 신앙의 여정이었을 뿐이다. 

루터의 말이라도 성경에 비추어서 거르고 분별했다면, 지금처럼 회심준비론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칼빈의 말이라면 100% 진리일 것이라는 맹목적인 자세를 가져서도 안 된다. 칼빈의 말을 이상하게 인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앞뒤를 조금만 살피면 그런 뜻이 아닌데, 자기 주장을 위해 딱 그 부분만 잘라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매우 종종 칼빈의 말도 성경에서 조금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율법과 구원을 직접 연관시키는 듯한 발언이다.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다면 그 공로로 구원을 얻었을 것인데, 사람이 그리못하니 그리스도가 대신 그리하셨고, 그 공로를 사람에게 전가하셨다는 듯한 발언이다. <기독교강요>의 이 내용이 그러하다.

“누구든지 율법을 성취할 자에게 주어질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구해야만 한다. 또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라고 율법 안에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다 ...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짐을 지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셨으니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자들인 것처럼 우리에게 은혜로운 공로를 얻어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가?”(기독교강요 2.17.5)

레위기 18장 5절의 말씀은 영생의 의가 율법 순종에서 나온다는 뜻이 아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과의 성행위, 동성애, 친족성행위 등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칼빈이 그 내용을 영생을 위한 율법 순종의 의로 연결시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로마서 10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함으로, 마치 율법 순종을 잘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곧 이어 바울은 다른 무엇으로도 의로움을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레위기 18장 5절의 인용은 행위로는 의를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을 수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칼빈이나 누구의 모든 말이 100% 구원의 진리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심각한 실수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신학자들의 말이 성경에 벗어나는 것을 빨리 발견하게 된다. 신학자들의 말들을 많이 읽고 성경을 적게 읽으니, 신학자들의 말과 성경의 말씀들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
 

 

박윤선 박사님은 비록 능동순종-수동순종이라는 기존의 신학을 그대로 물려받으셨으나, 한 가지 분명한 성경적 진리를 붙잡았다. 그것은 율법이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진리였다. 박윤선 박사는 율법을 지킬지라도 구원에 필요한 의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성경의 진리를 붙들었다. 그러므로 비록 능동순종-수동순종이라는 기존의 그릇된 신학의 틀을 물려받았을지라도, 그 속의 내용을 모두 따라가신 것은 아니었다.

“율법은 본래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님(소제목). 갈 3장 10-12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율법이 제정된 것이 인간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 아님을 잘 밝혀준다. 구약 자체가 인간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소망이 없음에 대하여 역설하는 동시에,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는 사실을 고조한다. 바울은 여기서도 합 2:4절을 인용하였으니, 곧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말씀이다.”(박윤선, <계시의존사색> (영음사, 2015), 124)

만일 박윤선 박사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칼빈이 율법에 구원 기능을 부여한 것이 마치 후기 유대주의자들의 오류와 같은 것이라는 서철원 박사의 말이 맞다고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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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