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5

기독교 신앙과 근대 과학이 역사 속에서 본격적으로 대면한 중요한 장면은 아마 다음의 세 가지 사건을 꼽을 수 있겠다. (1) 우주에 대한 용감한 사색(?)으로 화형 당한 브루너(Giordano Bruno, 1548-1600)의 순교와 (2) 교황청과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이의 갈등 그리고 (3) 1860년 있었던 과학의 진보를 위한 영국 연합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옥스퍼드 회의에서 일어난 윌버포스(S. Wilberforce, 1805-1873)와 토마스 헉슬리(T. Huxley)의 대립을 꼽을 수 있다. 


(1) 수도사이자 철학교수였던 브루노의 화형(火刑) 사건

먼저 16C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브루노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부근의 놀라(Nola)에서 태어나 1563년 네아펠에 있는 도미니크회에 가입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1572년 여기서 그는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B. 텔레지오의 자연주의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브루너는 1576년 수도원을 나와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 독일을 다니며 유랑 생활을 한다. 1579년에는 유럽 개신교인들의 피난처였던 제네바에 도착하여 이탈리아 개혁교회 공동체에 입교했다고 알려진다. 이 교회의 교회 공동체와 제네바 아카데미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교단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지지자라기보다 르네상스의 이단자였다. 그 뒤 그는 리용(Lyon)과 대학도시 툴루즈를 거쳐 파리에서 캄브레(Cambrai) 대학 교수로 자리 잡는다.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기억술을 가졌던 브루너는 인간의 뇌를 하나의 생각하는 기계로 만들 수 있다는 상상까지 이르게 한다. 오늘날 돌아보면 일종의 기계론적 사고였다. 브루노의 이 같은 생각은 오늘날 인공지능에 대한 과학적 상상력의 원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만한 창조적 상상이었다. 

이후 브루너는 1583년 4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프랑스 대사의 집에 머무르며 그 해 여름 옥스퍼드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에 관한 과목을 가르친다. 그리고 『무한, 우주와 모든 세계에 대하여』(1584)를 출간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우주는 고정된 중심이 없는 끝없는 공간이며 무한한 천체가 운동하는 영역이라 했다. 

또한 철학자로서 브루너는 사물의 내적 구성으로서의 원리와 외적 힘으로서의 원인을 구별하였다. 1585년 파리로 돌아온 후 그가 종교개혁의 중심 도시 비텐베르크로 초빙을 받아 겐틸리스(Gentilis)의 추천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가르친 것도 그의 철학자로서의 소양을 알 수 있다. 

그는 독일의 철학적 자유함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찬양하기도 했다. 브루너가 1589년, 헬름슈테트의 유명한 루터 교회 대학에서 가르치고 1591년에는 개혁교회의 중심지였던 취리히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진리 안에서의 개신교 신앙의 자유함을 느끼게 한다.

철학에 능한 그의 생각은 성령에 대해서도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세계(우주)의 영(靈)은 무한한 우주의 제 1원인으로서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는 형상으로, 질료(matter)에 형태를 준다고 했다. 브루노가 볼 때 무한한 우주는 바로 이 세상의 영에 의해 전개되는 신의 발자취였다. 그리고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주사물을 이해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그림자)이라 했다. 브루노가 자기의 입장을 방어할 때 자기는 철학자이지 신학자가 아니며 루터적인 두 왕국론을 자연의 오성(悟性)에 따라 논증한 것이지 신앙에 따라 논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 이해가 간다. 이렇게 그는 분명 신학자는 아니었다. 

지금 보면 16C 당시의 앞서간 한 철학자가 충분히 구상해 볼 수 있는 “우주상(想)”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사색은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간 그 점이 바로 문제였다. 수도사였던 그는 16세기 후반 태양중심설을 가장 열렬하게 옹호한 인물이었으며 우주가 수많은 태양과 행성이 있는 무한한 공간이라고 여겼다. 그는 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는 무한히 넓고 그 무한하게 넓은 세상 속에는 지구처럼 생명체가 사는 무수한 별들이 있을 것이라고 16세기 당시로서는 남들이 상상하기 힘든 획기적인 생각을 품은 인물이었다. 

1591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1592년 베네치아에서 제소되었고, 1593년 로마로 송치되어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 결국 1600년 2월 17일 형장으로 비참하게 끌려가 화형 당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웃 복싱하듯 철저하게 “우회”하였으나 브루노는 “파이터”처럼 자기의 주장을 “우회”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결국 순교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의 꽃 시장에 그의 기념비(1889. 6. 9일)가 서 있다. “나는 가장 높고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우며 우주 안에 내표되어 있는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자 한다.”


(2) 교황청과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갈등

망원경을 발명하고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한 17C의 갈릴레이(1564-1642)는 본래 당시(1623) 교황 우르반(Urbanus) 8세로 선출된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갈릴레이는 우르반 8세 아래 좀 더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통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판단은 갈릴레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갈릴레이와 새 교황을 함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수잇 교단은 갈릴레이의 라이벌이었던 자기 교단의 천문학자 오자리오 그라시를 내세워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황이 된 후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의 하나인 토스카나 공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교황이 그를 정죄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결국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끝났다. 연로한 갈릴레이에게는 예상보다 가혹한 선고가 내려졌다. ‘이단 혐의가 농후한’ 중한 이단에 속하는 죄를 범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후 9년 동안 그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이로 70세 노인이었던 갈릴레이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갈릴레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1987년)에는 갈릴레이가 원자론도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그가 원자론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동설 주장 혐의로 재판을 받게 선처를 해주었다는 프랑스의 과학 역사가 레도니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모든 것들은 갈릴레이가 얼마나 앞서간 뛰어난 과학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주며 성경 해석이 아닌 교회 권위가 어떻게 개인을 압박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3) 진화론을 둘러싼 사무엘 윌버포스 주교와 토마스 헉슬리의 논쟁

19세기의 사무엘 윌버포스는 노예 폐지 운동으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아들로 1829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 받아 교구 사제로 일한 인물이다. 그는 정통교리 옹호자로서 자유주의 주교들과 비국교도들과 성서비판론자들을 공격한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윌버포스가 생물학의 이름으로 당시 처음 등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그를 옹호한 토마스 헉슬리와 충돌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만큼 당시 정통교리 수호자(바른 혹은 그른 성경 해석이었다는 의미가 아님)가 볼 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성경과 조화할 수 없는 이론이었으며 충돌은 예견된 결과였다. 이렇게 다윈의 “불독”이라 불린 줄리앙 헉슬리의 조부였던 토마스 헉슬리는 표면적인 유신 진화론의 원조가 되었다.


창세기 1장 해석으로 이어지는 불똥

이 세 가지 사건의 경우 모두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세속 과학이 특정 해석 부분에 있어 충돌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서도 그 불똥이 반드시 옮겨 붙을 수 있음을 예견한 사건들이었다 할 수 있다. 

이들 충돌에 있어 교회는 좀 더 교회와 교리의 정통적 해석을 고수한 반면, 학문적 자유로움을 가진 인물들은 과학의 시선으로 교회와 충돌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정치적 힘으로 단기적인 물리적 승리를 거둔 반면, 학문과 과학의 자유로움으로 대응한 측은 후에 사실과 진리의 측면에서 우세승을 거둔 것으로 역사는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판단은 늘 유동적이고 유보적일 수 있기에 필자는 그 델리키트한 판단은 유보한다. 

물론 과학과 교회가 큰 충돌 없이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근대 과학이 발흥한 영국에서 주요한 과학자들이 대부분 신앙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에는 영국의 정통 성직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이 자연 과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생한 문제(과학이 등장하였으니 성경과 창조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고 수정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 과학의 발달은 무슨 문제를 가져다주었을까? 그것은 바로 위 세 가지 장면, 곧 교회와 과학이 대면한 결과에서 보듯,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 근대 과학의 대두 이전 곧 교회 역사를 통해 과학적 해석과 무관하게 내려져 온 전통적 (창세기) 해석 방법이 과연 오늘날 과학 기술의 시대에서도 바른 해석 방법으로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성직자들과 신학자들과 신자들이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창세기 해석 방법이 과연 16-17 세기 베이컨(경험론)과 데카르트(합리론)와 뉴턴(근대 과학)으로 대변되는 과학 발흥기를 거치며 시작된 과학의 해석과 방법론과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당연히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교회와 신학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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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