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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의 회심(체험) 개념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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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의 회심(체험) 개념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 정이철
  • 승인 2021.01.25 09: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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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성 교수의 청교도, 사상과 경건의 역사 서평 3

 

“오늘의 한국교회가 성도에게 참된 신앙을 갖추도록 복음만을 선포하고 ... 청교도 신앙 속에서 소중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회심을 강조하고 ...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그 해답이 들어있다.”(27 페이지)

“청교도는 구원을 회심 체험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성취하고 일궈내고자 분투노력했다.”(31 페이지)

"그는 회심 체험을 매우 강조했는데 케임브리지 학생 대부분이 영향을 받았으며, 윌리엄 에임스가 감화를 받아서 목회자로 헌신하게 되었다."(235 페이지)

김재성 교수는 이처럼 청교도들이 회심을 중시하고 회심 체험을 중시했다고 설명했다. 구원에 관한 분명한 신앙이 없으면서 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현대 교회의 실정을 볼 때, 청교도들의 신앙이 매우 위대하였다고 생각되게 만드는 내용이다. 사영리 같은 것으로 쉽게 복음을 전하고 쉽게 구원을 준다고 여기는 현대의 복음주의 교회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청교도들의 신앙에 더욱 더 귀한 면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내용이다. (필자가 사영리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못하고, 구원을 주는 믿음고백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회심'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중시했던 '회심체험'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의 회심에 대해 알고 나면, 우리는 청교도들의 신앙과 사상에 대해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우리는 개혁신학자들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중생하는 것을 결코 ‘회심’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하게 되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칼빈의 말을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3.3.9)

칼빈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일어나는 중생을 청교도들처럼 '회심'이라고 하지 않고 '회개'라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게되는 것은 회개이고, 그 이후 자신의 자범죄들을 버리는 것도 회개이다.

 

서철원 박사도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하게 되는 것을 회개라고 해야 마땅하고, 개종이나 회심으로 말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고 한다.

“하나님에로 돌이킴을 통상적으로 개종 혹은 회심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회심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고 회개라고 해야 한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가 주 예수에게로 돌이킨 경우에도 회심 내지 개종으로 말할 것이 전혀 아니다.”(구원론 71)

“복음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과 동시적으로 성령의 권면을 따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을 하게 된다.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한다. 믿음고백과 회개는 언제든지 같이 가기 때문이다.”(서철원, 구원론, 66)
 

대체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회심’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중시했던 ‘회심체험’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청교도들의 회심이라는 개념은 매우 불건전하고 비성경적이었다. 그들의 회심이라는 개념 속에는 죄인이 스스로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자기의 죄악됨을 뉘우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영적인 방향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려는 노력을 한다는 개념이 강하게 자리했기 때문이다.

'회심' 또는 '회심체험'이라는 청교도들의 사상은 펠라기안 신학, 세미 펠라기안주의인 천주교의 신학,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에서 가르치는 중생의 과정을 설명하기에 좋은 개념이다. 왜냐하면 구원과 관련된 영적 기능이 완전히 죽지 않고 일부 살아있는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이 1)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무관한 은혜(청교도들의 표현), 2)선행은혜(웨슬리안의 표현), 3)초기 도움의 은총(천주교의 표현)에 반응하여 깨닫고 죄악됨을 뉘우치면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도 자기를 이끌어 간다는 비성경적인 사고와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개혁신학은 인간의 구원 과정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구원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에게 은혜를 따라 복음이 전파되고, 먼저 역사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따라 죄인이 복음을 믿게 된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믿음고백에 이르는 순간 그리스도의 죄용서와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중생이 일어난다. 그 전에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거나 죄를 뉘우치거나 자기 영혼의 비참함 상태를 깨닫고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하게 돌이키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다. 복음전파와 함께 성령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등의 신앙생활이 진행된다. 이것이 성경과 개혁신학이 말하는 회개(중생)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이 강조했던 회심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되기 전에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을 먼저 인식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 영혼의 비참함 상태를 깨닫고,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자신을 스스로 이끌어 감을 뜻하는 개념이다.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은 성경이 가르치는 중생과 전혀 맞지 않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성경은 중생하기 전의 인간의 영적 상태가 이미 완전하게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미 완전하게 죽은 사람은 자신이 소생되기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은혜를 따라 복음을 전파하여 주셨고, 또한 먼저 은혜로 역사하여 죽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의 속죄가 적용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인정받게 되어 살아난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께서도 구원에 대해 동일한 가르침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를 믿는 순간 죄용서와 의의 전가가 이루어지니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사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전에 사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죄를 깨닫고 슬퍼하면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도 자신을 이끌어가는 노력과 의지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뜻하는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을 그리스도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회심준비론(Preparation): 청교도 목회의 실천신학

청교도들의 ‘회심’, ‘회심 체험’ 개념이 그들의 목회에서 적용되도록 신확화된 것이 '회심준비론'이다. 회심준비론도 매우 비성경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회심준비론의 대가였다. 에드워즈는 청교도들의 회심, 회심체험 개념을 가장 탁월하게 목회에 적용했던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국내에 에드워즈의 신학을 가장 앞장서 전파한 백금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드워즈는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을 이어받아 계승한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입니다. 청교도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혹은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구원론 특히 회심론 부분에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청교도 구원론, 특히 청교도 회심론을 절정으로 끌어올렸습니다.”(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 27-28 페이지)

에드워즈의 그 유명한 대각성 때에 청교도들의 회심의 개념이 어떤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는지 살펴보면,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이 비성경적이었고 또한 이단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1차 부흥(1734-35년)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나타나 있다. 에드워즈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라는 여성에게서 일어난 영적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는 불과 1주일 정도 각성된 상태에 있다가 구원에 이른 회심의 명백한 증거를 드러냈습니다.”(조나단 에드워즈, 「부흥론」(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7권, 고언 편집, 양낙홍 역)(부흥과 개혁사, 2005), 250)

사람에게서 회심이 일어나려면 먼저 그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죄인됨과 지옥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그 단계를 영적각성이라고 하는데, 청교도들의 회심의 과정 속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시작 단계이다. 에드워즈는 허친슨이라는 여성이 1주일 정도 영적각성의 상태에 머물다가 구원의 단계로 진입했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를 회심에 이르게 할 만한 신앙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독하려고 첫 장부터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목요일까지 계속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죄성, 특히 자기 본성의 죄악 됨과 자기 마음의 사악함을 크게 염려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번개의 번쩍임처럼 다가와서 그에게 다가와 극심한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읽던 부분을 덮고 신약 성경으로 가서 고뇌에 빠진 자기 영혼을 위해 어떤 위로를 발견하려 했습니다.”(앞의 책, 250-251)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대항해서 죄를 범했다는 것 때문에 크게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 고뇌는 사흘 동안 점점 커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자기 앞에 흑암의 어두움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그의 전신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서리쳤습니다.”(앞의 책, 251)

영적각성된 사람이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신앙지식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었고, 또한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으면서 절망하였다고 한다. 회심의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면,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이미 죽은 상태였다는 성경의 말은 거짓이다. 

“그 날 밤 잠 자리에 들었을 때 그는 다음 날 아침 꼭 목사에게 가서 어떤 위로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잠이 깨었을 때 그는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습니다.”(앞의 책, 252)

영적으로 각성되어 회심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허친슨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어 갈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 목회자를 찾아가 상담했다는 내용이다. 중생하기 전에 죽은 상태의 죄인이 이러한 일을 할 수있다면 사도 바울이 했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많이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특별한 속성을, 때로는 일반적 속성을 깨달았습니다 ...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와 완전하심의 영광에 대한 감각에 사로잡혀 마치 죽을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쉽게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것 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 누군가가 그에게 그 체험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다가 그 체험으로 말미암아 새삼스럽게 감동받아 기력이 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데려다가 침대에 눕혀야 했습니다.”(앞의 책, 254))

“한번은 그가 동생에게 자기는 여러 날 밤낮을 계속 감당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황홀하게 맛보면 즐겼다고 말했습니다.”(앞의 책, 254)

자기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간 죄인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다가, 드디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적용받아 중생이 완성되었을 그 본인이 느낀 황홀한 감정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청교도들은 이런 것을 성령의 회심체험이라고 했고, 이것이 없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지금도 청교도 목회자들은 이런 회심의 과정이 없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일반 교회의 신자들이 자기 거짓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구원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맺는 말>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은 이와 같이 비성경적이고 심각한 거짓 사상이다. 그러나 지난 수 백 년 동안 이것의 심각한 내막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칼빈주의 신학자인 김재성 교수 같은 분이 이런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청교도 신앙의 이런 심각한 이단 사상을 보호하고 포장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통탄하고 계실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에서 연구했다. 최근 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Ph.D)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고,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2021년 5월 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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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2021-01-28 11:45:24
회심은 회개 + 믿음 이다. 회심은 불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회심준비론은 불신자가 복음(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믿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회심은 이미 구원받아 신자가 된 사람에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회개는 불신자나 신자에게 다 적용되는 단어 이다. 구원파에서는 이미 구원 받으면 죄가 없으니 회개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성경은 이것을 ‘스스로 속이고 그 속에 진리가 없다’(요일 1:8)고 경고한다. 회심과 회심준비론은 청교도가 흔히 쓰던 단어 였다. New England에 정착한 청교도 1세들은 회중중심의 교회를 운영 하면서 가견교회를 불가견교회로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그들은 교회원의 자격을 높이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구원얻는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특히 누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는가 아닌가를 발견함에 있어 회심의 정형을 수립하였는데 특히 1 세대 청교도이며, Harvard 대학의 설립자요, Jonathan Edwards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Thomas Shepherd는 회심론을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통회, 겸비, 그리고 믿음이다. 성경에는 ‘회심’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그런 내용이 사도행전 2:14-42에 나온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말씀)을 듣고 청중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며 죄를 확실히 깨달으며 통회할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물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으라”(벧전 2:38)고 했다. 위의 말씀을 보면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위의 세례는 인간이 주는 물 세례를 의미하며 세례는 믿음을 공식화 하는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죄 사함’과 ‘성령세례’는 위에서 즉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위의 사항을 보면 청교도들의 회심(회개 + 믿음)의 정형을 살펴볼 수 있다. 물 세례는 죄사함(칭의)과 성령세례를 받을 것을 전제하고 인간이 주는 것이지, 이미 성령 받은 즉 중생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어느 사람의 창의나 중생을 판단할 수 있을까 ? 이렇게 되면 이것은 구원파 혹은 재세례파 신학과 일치한다. 영국 국교회로 부터 핍박을 받았던 분리파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와 더 낳은 경제적 삶을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Virginia에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New England에서는 회중파를 중심으로 일종의 신정정치를 구현했다. 여러가지 신학적 도전으로 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회심준비론’을 설정해 그들의 교회원의 자격을 높였으며 시민들 또한 그들의 지침에 절대 순종하였다. 그 당시 정부와 교회는 유착관계에 있었기에 교회원이 되는 것과 그들의 생존권은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의 1차 대각성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이주민들이 몰려오고, 각종 종교 형태가 몰려오고, 종교에 관심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감에 따라 청교도 정신과 그 공동체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심준비론을 통해 누가 구원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인본주의 이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회심준비론’이 신학적으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지 현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회심준비론’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첫째, 현시대에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부재 현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교회원들을 지도할 인물이 없다. 둘째, 정부와 교회가 분리된 다원화 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원의 자격을 높여 교회의 문턱을 높인다면 누가 교회에 관심을 갖겠는가 ? ‘너나 잘해’ 할것 아닌가 ?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는 신자나 예비자나 할것없이 신앙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준비론’을 불신자가 세례를 받기전 교육 받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되고, ‘회심준비론’이 성화의 과정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은 수용 가능하다. 왜냐하면 ‘회심준비론’과 성화는 어느정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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