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16)

 

글을 시작하며

“나사로가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마르다는 심부름꾼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라비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 들었다(아마도 위급한 상태의 중병이었을 것이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틀을 더 지체하시고 나서 베다니로 떠나신 것을 두고,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견해(21세기 신학자들 중 일부, 예를 들면 Gary M. Burge, Linda K. Taylor 등)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견해(20세기 신학자들 중 대부분, 예를 들면 D. A. Carson, Andreas Köstenberger 등)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은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

후자의 견해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11:4)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이틀을 더 기다렸다가 베다니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치시는 것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드러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더 크게 받으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예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을 망가뜨리는 심각한 난점이 있다. 생각해 보라! 선하시고 인자하신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광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기까지 일부러 기다리실 만큼 잔인하신 분이신가? 아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예수님은 나사로를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실 만큼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 아니시던가!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아직 죽지 않았는가?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요11: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과 함께 11절(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4절(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을 중요한 증거로 내세운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은 장소에서 베나니까지를 나흘 길의 거리로 만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던 곳에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은 뒤에 예수님이 출발하신 그 장소는 베다니에서부터 약 160km, 즉 나흘 길이 되는 곳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던 장소를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60km쯤 떨어진 “바타네아” 지역이라고 주장한다(당시의 하룻길은 보통 30-40km쯤 되었다. 그러므로 160km쯤의 거리는 나흘 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테러를 피해 가신 곳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요10:39-40/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이라는 요한복음의 저자의 기록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세례요한의 처음 사역지는 예루살렘 동쪽,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였다(예수님 당시에 같은 지명의 다른 지역들이 드물게 있었다. ‘벳새다’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사도요한은 이곳을 나사로의 고향 “베다니”(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3km 떨어진 곳)와 구별하기 위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라고 기록하고 있다(요1:28). 오리겐은 이곳 “베다니”를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와 구별하기 위해 “베타라바”(Betharaba)라고 정정했다. 이곳 “베다니”는 나사로가 살았던 베다니로부터 북동쪽으로 32km쯤 떨어진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요단강 동편 “베다니”(베타라바)에서 사역을 처음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고, 그 후 요단강을 따라 점점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사역을 계속했으며(요3:23/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나중에는 헤롯 안티파스의 본거지가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올라갔다가 결국 헤롯 안티파스에게 체포당해 순교했다.

그러므로 나흘 길의 거리를 맞추기 위해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은 장소를 베다니에서 북동쪽으로 160km쯤 떨어진 “바타네아” 지역으로 상정한 D. A. Carson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요1:28(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에 반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D. A. Carson이 “바타네아” 지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 지역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유대인의 공격을 받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하룻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장소로 피신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예루살렘에서 160km쯤 떨어진 “바타네아” 지역으로 피신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을 잘 모르고 말하는 D. A. Carson의 상상에서 나온 오류에 불과하다. 당시에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할지라도 다른 통치자의 영역이면 비교적 안전하며, 좀 거리가 멀다할지라도 동일한 자의 통치 영역이면 위험하다고 보아야 한다. 빌라도 총독의 통치 구역인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 지역은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의 통치 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룻길 거리이지만,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베타라바)는 베뢰아 지역이므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구역이다. 따라서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베타라바)는 비록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멀리 예루살렘에서 160km쯤 떨어진 바타네아 지역으로 피신했을 것이라는 D. A. Carson의 주장은 바보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D. A. Carson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내세우는 요11장 4절, 11절, 14절이 과연 절절한 증거인지 헬라어 원문으로 점검해 보자. 미리 말하면 요11장 4절, 11절, 14절들은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예수님이 들었을 때,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는 증거도, 또 죽지 않았다는 증거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요11장 4절, 11절, 14절에는 둘 중에 어느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로 번역된 “au[th h` avsqe,neia ouvk e;stin pro.j qa,naton”(하우테 헤 아스데네이아 우크 에스틴 프로스 다나톤)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 병은 죽음 안으로(죽음을 향하여) 있지 않다”이다. 여기서 서술어 “e;stin”(에스틴/be, exist)이 ‘현재형’이라는 이유로, D. A. Carson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나사로가 현재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사로는 이 병으로 죽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을 엉터리 예언자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을 가지고는 당시 나사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부를 특정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지금 나사로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예수께 전하러 온 사람들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나사로의 병의 궁극적인 결과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16:10의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한글개역: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을 인용해서 예수의 부활의 당위성을 선포하는 행2:31(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의 이해와 유사하다.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은 예수님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또 죽은 예수님의 육체가 화학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의 의미와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서,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죽음에 버려진바 되지 않고 다시 사신다는 의미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11:11)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초자연적으로 아시고서, 그것을 그와 그의 제자들이 베다니로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라고 D. A. Carson은 주장한다(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750). 그러나 “잠들었도다”로 번역된 “kekoi,mhtai”(케코이메타이)는 동사 “koima,omai”(코이마오마이/sleep, fall asleep)의 ‘완료형’이다. 헬라어에서 ‘완료형’의 쓰임새는 그 동사의 동작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이다. 그러므로 “잠들었도다”(kekoi,mhtai/케코이메타이)는 나사로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임을 강조해서 알려주지만, 나사로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D. A. Carson처럼 이때 나사로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것은 14절(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발견된다. 14절에서 “죽었느니라”로 번역된 “avpe,qanen”(아페다넨)은 동사 “avpoqnh,|skw”(아포드네스코/die)의 ‘부정과거형’이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할 때, 과거에 일어난 동작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작이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났는지를 특정하지 않고, 단순히 과거의 동작만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과거동사를 시간을 특정할 수 없는 과거라는 의미에서 “부정과거”(不定過去/aorist)라고 부르며, 또는 어느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단순히 과거만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단순과거”(単純過去)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나사로가 방금 죽었다면, “방금”(now, at the present time)의 의미를 가진 ‘부사’ “a;rti”(아르티)를 사용하여 “죽었느니라”를 수식했을 것이다(마9: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a;rti/아르티/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따라서 과거의 시점을 특정하지 않는 ‘부정과거형’인 “죽었느니라”를 근거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죽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오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요11장 4절, 11절, 14절은 결코 그때 나사로가 죽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물론 이 구절들은 그때 나사로가 이미 죽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도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음이 명백하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돌로 치려함을 피해(요10: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에 가 계셨다(요10:39-40/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은 사해 위쪽,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또 다른 “베다니”(요1:28/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였으며,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와 이곳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32km(하룻길)쯤 된다. 만약 D. A. Carson의 주장대로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에서 160km쯤 떨어진 “바타네아” 지역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마르다가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하려고 멀리 계시는 예수님께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다가 심부름꾼을 예수님께 보낸 까닭은 예수님이 넘어지면 코 닿을 곳, 즉 하룻길밖에 되지 않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계셨던 곳은 “베다니”까지 거리로 하룻길 정도에 있는 요단강 건너편의 다른 “베다니”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했을 시점에 만약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예수님이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될 수는 절대로 없다. 생각해 보라. 나사로가 아직 죽지 않은 시점에서 예수님이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베다니로 하룻길을 가셨다면, 2일+1일=3일이므로 나사로가 죽은 시점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일을 넘지 못한다. 더구나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틀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던 시간이라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죽은 시점은 기껏해야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4일)이 되었다는 마르다의 말(요11: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이 거짓말이든지, 아니면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르다가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보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마르다의 심부름꾼들이 나사로의 집을 떠나기 전에는 나사로가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사로의 집을 출발하자 얼마 되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이 계신 또 다른 “베다니”로 하룻길을 가서 예수님께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음을 아시고,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하룻길을 오셔서 베다니에 도착했다. 마르다의 심부름꾼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간 하룻길(1일), 예수님이 그곳에서 더 유하신 이틀(2일), 그리고 베다니로 오신 하룻길(1일)을 모두 합하면 꼭 나흘(1+2+1=4)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하루 쯤 지났음이 명백하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계셨더라면”으로 번역된 “eiv h=j”(에이 에스)에서 동사 “h=j”(에스)는 원형 “eivmi,”(에이미/be, exist)의 ‘미완료 과거’이다. 이는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가시지 않고, 여기 베다니에 계속 머물러 계셨더라면’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마르다는 심부름꾼의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 더 지체하신 예수님께 ‘주님이 지체하지 않으시고 좀 더 빨리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살았겠나이다’라고 불평을 하지 않는다. 마르다는 단지 나사로가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을 때, 나사로 옆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만 토로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움직일 수 없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이런 상황은 1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요11:15)와도 동일선상에 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으로 번역된 “ouvk h;mhn evkei/”(우크 에멘 에케이)에서 동사 “h;mhn”(에멘)은 원형 “eivmi,”(에이미/be, exist)의 ‘미완료 과거’이다. 이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갈 때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아니한 것이 너희(제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거기 계셨으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고치시는 기적을 보았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은 나중에 죽은 나사로,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을 더 유하신 까닭은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사랑하는 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실 만큼, 이기적이고, 잔인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까닭이 무엇인지는 요한복음이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합리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지 않으시고 바로 베다니에 가셨다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이틀쯤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자신의 시신 주변을 3일 간 맴 돌다가 떠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지 3일 이내에는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 어떤 능력 있는 자가 다시 살릴 수도 있다고 여겼다(어쩌면 우리가 보통 3일 장을 하는 이유도 이것과 유사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지 3일이 지나 4일 이후가 되면, 생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다시 살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은 지 이틀 정도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 보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이 요11: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과 요11: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에 나타난 예수님의 목적과도 잘 부합된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야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즉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영광을 여지없이 드러내셨다. 그리고 제자들도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한 걸음 더 나아갔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죽은 나사로의 집에 바로 가고 싶으셨겠지만, 그럼에도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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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