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훼절인가 배교인가?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의 우상숭배, 백귀난행, 친일행각은 신앙의 극심한 변질, 곧 훼절(毁節)을 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정도로 배교했는가? 대부분의 한국교회사가들은 그 당시의 한국교회의 행태를 ‘변절,’‘훼절’ 따위의 단어로 서술한다. 그 시대의 교회가 배교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백귀난행을 저질렀다. 예배는 주 1회 드렸고, 예배 대신 이른바 애국행사들을 가졌다. 국방헌금을 바치고, 전쟁에 출정한 군인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매월 헌금을 했다. 교회는 지역 교회들을 통폐합하고 매각하여 일제에 바쳤다. 폐합하여 생기는 교회당, 부속건물, 대지, 전답 등을 매각하여 전쟁비용으로 사용하도록 자진 상납했다. 

교회는 가마가제 특공대 해군용 비행기를 애국기(愛國機)라는 이름으로 헌납했다. 교인들에게 애국기 헌납 헌금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교회당의 종과 철탑과 철문을 뜯어 이른바 성전(聖戰) 무기제조용으로 헌납했다. ‘목사,’ ‘부목사’라는 명칭을 ‘정교사,’ ‘보교사’ 또는 ‘교회사’(敎悔師)로 고쳐 부르게 했다. 무기구입을 위한 특별헌금을 했고, 출정하는 병사들을 위한 감사예배를 올렸다. 시국에 순응하여 주일예배를 전폐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일본과 한국의 신궁소재지를 성지(聖地)라고 하여 ‘성지순례’를 했다.

교회가 이러한 백귀난행, 친일행각을 했다는 이유로 그 당시의 한국교회를 배교한 집단 또는 거짓교회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시대의 교회는 이런 저런 형태로 일제의 강압 아래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우상숭배를 하고 신앙고백과 신학을 신도교(神道敎) 이데올로기로 바꾸거나 혼합시키고 변질된 교리를 고백한 것은 이족침략과 지배를 빌미로 변명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우상숭배를 했다. 교회가 그것을 공적으로 결정하고 솔선수범했다. 신자들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들을 저버렸다. 이단적인 교리를 신봉하고 고백했다. 

당시의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거의 매장되었고, 복음은 폐지되었다. 하나님 말씀이 부재한 상태였고, 오염된 성례가 거행되었다. 독약과 같이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와 이교이데올로기와 혼합된 ‘신학사상’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교회는 그 존재가 달려 있는 일치성·보편성·사도성·거룩성을 완전히 잃었다. 한국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 아니라 우상숭배하는 바벨론이었다. 한국교회는 배교집단이었다.

필자의 조만간 출간할 『신사참배거부운동』(잠정제목)은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의 행태를 살펴보고 그 사건과 이와 관련된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교회의 모습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는 일본적 신학을 수립하여 기독교회의 존재가 달려 있는 본질적인 교리들을 파괴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고 고백한 것 아니라 신도교이데올로기와 혼합된 교리, 일본화된 신학을 수납했다.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그 신앙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왕 중 왕 되심을 부정했다. 신론·인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이교화되고 변질된 교리를 가르쳤다. 교회는 신자들이 이단적인 교리를 신봉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했다.

둘째, 그리스도나 여호와 하나님보다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고백했다. 각 지역 교회들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기록하고 교회의 대표자가 그 문건에 서명한 것을 일경에게 제출했다. 일제의 하급 관리들조차 “그리스도가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8 하는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을 더 숭상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이런 배교행위는 교회가 ‘순일본적 신학’을 수립한 결과였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일본적 토착화를 훨씬 더 넘어섰다.

셋째,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을 고백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찬송가들을 삭제하게 했다. ‘십자가 군병들아,’ ‘만왕의 왕 내주께서,’ ‘환란과 핍박 중에도 등 그리스도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의 재림 등에 관한 찬송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이러한 찬송들이 제거된 책을 인쇄하고, 그러한 내용의 찬송들을 가위로 잘라버리거나 종이를 오려 붙이도록 했다. 『장로회보』는 교회의 이러한 결정을 “긴급통보”9로 보도했다. 민경배 교수(전 연세대학교, 교회사)는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생 때 황해도 장연에서 경험한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성경책은 도처에 먹칠을 하거나 떼어버려야 했다. 유대사상을 배제하고, 그들 말대로는 소위 순복음(純福音)만의 교의(敎義)를 선포한다고 하여서,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삭제하고 4복음서만 읽게 하였다. 이런 것은 물론 감리교단에 내려진 조치였지만 모든 교회가 다 그런 아픔을 겪었다. 찬송가 역시 상당수가 먹칠을 하고 뜯어내고 한, 만신창의 책을 들고 다녔다."10

넷째,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유태사상을 시정하고 이를 위해 새로운 해석 교본을 만들었다. (1) 일본기독교를 확립하기 위하여 특히 전문가로서 일본교학의 연찬에 노력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시킬 것, (2) 말세, 심판, 재림 등은 세상적 물질적 해석을 고쳐 그것을 종교적 심령적으로 해석할 것. (3)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비기독교적 유대사상을 시정하기 위하여 그 적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등을 지시했다.

위 내용을 담은 교회의 지시공문은 평양신학교 교장 채필근 목사의 이름으로 전국 각 노회, 교회에 하달되었다. 유호준 목사는 “문제는 경전이었다. 혁신교단 측은 경전을 신약성경으로 하고 구약성경을 해석교본으로 낸다는 것이었는데 반해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것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본 교단의 경전이 제1은 신약성경이고 제2가 구약성경’이라 하여 동등해야 할 경전의 차등을 두어 그 경중의 차별을 인정하고만 꼴이 된 것이다”11고 증언한다.

다섯째, 성경을 편집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신약성서를 기초로 하야 교의를 선포하고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 교본을 제정”12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구약성서는 물론 사도신경을 삭제하고, 묵시록을 빼고, 4복음서의 산상수훈만이 경전이라고 결의했다.”13 한국교회는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교리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필순 목사를 포함한 친일파 인사들의 지도 아래에서, 한국교회는 이른바 천황의 절대 신성에 위배되는 구약성경을 경전에서 빼라고 명했다.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하고 구약성경은 해석교본으로 하기로 했다.14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유태민족사상이 강하게 대두되는 부분과 묵시적인 부분을 삭제했다. 4복음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삭제토록 했다. 가위로 오려버리거나 먹칠을 하게 했다.15 구약은 유태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에 일본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한국교회가 정경에서 구약성경을 빼버리고 유태민족사상을 제외시킨 것은 그 성경과 유태민족이 신봉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한 것과 다르지 않다. 주일예배의 제1부는 천조대신에게, 제2부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지만, 신앙고백에서 구약성경을 폐기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부정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성경을 편집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의 유태민족적 요소를 제거한 마르시온주의가 여호와 하나님과 선한 하나님을 나누고 유태인의 신 여호와를 악신으로 규정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여섯째, 한국교회를 해체하고 배교적인 ‘순정(純正)일본적기독교’로 거듭났다. 군소교단의 총회장들은 ‘전향성명서’라고 하는 개종고백서를 발표하고 교회들을 해체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새로운 일본장로교단을 만들어 다른 교파보다 황국(皇國)에 대한 충성도가 더 강하다는 것을 경쟁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하는 것을 최대 급선무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교의신학과 성서해석과 교회조직과 의식습관 등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순일본적기독교로 신생(新生)”16하고자 대한예수교장로회를 폐기하기까지 했다. 한국장로교회를 해체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그것조차 없애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폐합시켰다. 한국교회는 친일파 인사들의 지도 아래에서 골수에 사무친 황민화의 이상(理想)을 드러냈고, 혼합종교로 신생(新生)했다.

일곱째, 올바른 성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천조대신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다고 고백하면서 가진 세례와 성찬이 정당했을 까닭이 없다. 성례는 일본귀신의 이름으로 신도침례를 받은 목사들이 베풀었다. 목사들은 신도침례(미소기)를 받았다. 신도교 사제로부터 개종을 의미하는 계례(契禮)를 받았다.17 계례는 불교나 신도교에서 행하는 입교예식으로 기독교의 세례와 같다.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와 목사 안수를 받은 자들이 ‘천조대신 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일본신의 이름으로 침례, 세례를 받았다. 이방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함께 섬기면서 세례를 베풀었고 성찬을 나누었다. 사악하고 가증스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례를 더럽혔다.

여덟째, 가짜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는 이교신 예배와 우상숭배로 점철되어 있었다. 교회는 신자들의 일본적 정신무장을 위해 교회당마다 일본의 개국신을 ‘모신’ 가미나다(神壇), 곧 이동신사(portable shrine)를 설치하게 했다. 교회당마다 ‘거룩하게’ 모셔놓고 그것에 극진한 예를 올렸다. 절을 하며 일본왕실의 조상신들과 현인신(現人神)과 잡신들을 예배했다. 여러 해 동안 매 주일 일제 판 바알 신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여호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겼다. 교회가 드린 기도는 황국무운장구와 일본의 전승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아홉째, 우상숭배와 배교와 백귀난행을 솔선수범했다. 한국교회는 살아남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제에 아부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에서 자의로 그것들을 시행했으며, 열(熱)과 성(誠)을 다했다. “이 즈음해서 교직자들 간에는 이상한 심리가 전염병처럼 돌아… 당국자도 깜짝 놀랄 조처를 서슴없이 솔선하는 혼탁한 공기가 나돌았다.”18 일제의 강압 때문이었지만 그 강압에서 시작한 한국교회의 배교와 친일행각은 일제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정도”19였다.

열 번째, 솔선수범하여 신사참배권유운동, 신사참배인식운동을 펼쳤다. ‘시국인식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운동을 펼쳤다. 앞에서 상론한 바와 같다.

열한 번째,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을 제명하고 파면했다. 교회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목사들을 해임시켰다.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를 파직시키고 봉천노회가 한부선 선교사를 제명하고,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담임 목회자가 시국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회직을 사임하게 했다. 거창읍교회 목회자 주남선 목사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경남노회로부터 담임목사직 해임 통보를 받았다. 경남노회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교회 위임목사 해제 통보”20를 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후였다. 그가 교회를 사면하도록 강요했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측은 그 가족에게 사택을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순정일본적기독교’로 개종한 목사들은 물찬 제비처럼 좋아하며 경쟁적으로 우상숭배, 배교, 친일행각을 했다.

열두 번째,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짓밟았다. 교회의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파괴한 것이다. 배교하지 않는 신자들을 일경에 고발했고, 감옥생활을 하게 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다.

낮에 취한 강주정을 부렸고 날도깨비의 장난이 횡행하였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결성되던 무렵의 희한한 암투는 극에 달했고 추태는 말의 표현을 넘어섰다. 구약성서는 물론 사도신경이 삭제되고, 묵시록이 빠지는 등, 4복음서에서는 산상수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가 기탄없이 이루어졌다.

간부 목사들의 옥고야 짐작이 가지만 어쨌든 ‘예수를 배반하고서야’ 출옥[했으며], 교역자들은 앞다투어 열변과 웅변을 토했다. 아첨의 재사나 기발한 언설이 많았던 가운데 A 목사는 태양이 솟으며 암흑이 사라진다는 넋두리를 읊었고, P 목사는 만일 미국의 선교사가 다시 이 땅에 오면 일본도로 배를 잘라버리겠다는 욕설을 내뱉었다. [항일적 목사들을 전원 총살시키도록 그 명단을 목사들이 제공해 주는 등] 이 나라 기독교가 그 시련을 당하여 너무 부끄러운 자취를 남긴 것이 애통하다.21

오랜 역사를 가진 서울의 어느 장로교회는 40년 동안 봉사해 온 담임목사의 인도로 주일예배를 그 교회를 관할하는 왜경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틈을 이용해 신사참배 없이 끝마쳤다. 동방요배도 하지 않고 황국신민서사도 외우지 않은 채 예배를 은혜롭게 끝냈다. 이것을 지켜본 어느 목사가 예배 직후 관할경찰서 고등계 주임을 찾아 고발했다. 담임목사는 그날 서산에 해가 채 저물기 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며칠 동안 구금되었다. 해당 노회는 그 목사를 파직시키고 하고 강제로 축출했다. 일제의 강압 때문에, 불가피하여, 마지못해,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최덕성 교수의 리포르만다에 이 글의 원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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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