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 교단 신학교 장기영 박사의가 저에 대하여 자신의 페이스 북(9.21.20)에 올린 글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 교수의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해 달라고 하셔서 부득이 이 글을 올립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사이비 개혁주의자 정이철 목사”
“(정이철 목사가) 정통 칼빈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고발”
“노이즈 마케팅으로 밥벌이하려는 목적으로는 대성공”
“(정이철 목사가) 이단으로 비난해온 웨슬리 목사님을 추종하는 모양새”

저에 대한 장기영 박사님의 이런 말들에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기영 박사의 글을 읽다보니, 감리교의 웨슬리는 훌륭하지만 성결교의 웨슬리는 이단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웨슬리에 대하여 직접 연구하거나 그의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웨슬리가 어떤 때에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신앙을 분명히 인정하다가 나중에 다시 부정하는 듯하는 자세를 보이기를 반복했다고 하여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주변의 감리교 목사들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신앙생활은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잘못하면 다시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만일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가르쳤다면 이단이었다!”라고 했었는데, 다수의 감리교 목회자들이 모욕적이라며 화를 냈습니다.

후에 한국 감리교의 임성모, 이후정 교수님의 글을 보았는데, 웨슬리도 분명하게 성경과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신앙과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구원을 확고하게 믿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보았던 임성모, 이후정 교수님의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웨슬리의 성령론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성화에 대한 강조이다. 성화는 구원의 여부에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지만 구원받는 신자가 필연적으로 맺는 열매다”(임성모 교수)

“그러나 그는(웨슬리)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주장했지만, 동시에 영국국교회(성공회)의 좀 더 중도적, 포괄주의적 입장에 충실하게 믿음과 함께 믿음의 결과로서의 선행과 사랑의 열매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행위는 결코 칭의에 있어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이처럼 칭의에 있어서의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확고한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을 이어받은 감리교회의 중요한 유산이다.”(이후정 교수)

성화가 구원의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임성모 교수님의 말과 행위는 결코 칭의에 있어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이후정 교수님의 말은 성경과 사도들과 종교개혁의 칭의-구원론과 100% 일치하는 사상입니다. 감리교의 두 교수님의 이와 같은 설명을 보고, 떠도는 말들로 웨슬리를 판단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도 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신비주의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괴상한 성령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성령이 반복적으로 강림하는 것이 부흥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재탕 삼탕으로 강신할 때 쓰러지고 웃고 환상을 보고 예언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에 대한 주장은 사실상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의 또 다른 날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한 로이드 존스도 좀 이상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보내주신 장기영 교수의 글을 보니, 감리교와 달리 성결교의 웨슬리는 이단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얻은 죄 용서는 오직 과거의 죄들에 대한 용서라고 가르쳤다고 장기영 박사가 말을 설명하였더군요.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순간까지 범한 과거의 죄들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으로 용서된다고 웨슬리가 가르쳤다고 장 박사는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첫째,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신자의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하고, 동시에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할 것(요일 1:9)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눅 3:8)을 강조했다.”(장기영 박사)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때까지 지은 과거의 죄들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으로 용서될뿐이라고 웨슬리가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이후 지은 죄는 그때부터 자백하고 회개해야만 용서된다고 웨슬리님께서 가르쳤다고 장기영 박사님이 설명했습니다. 장기영 박사님은 웨슬리님의 그런 주장이 성경 로마서 3장과 벧후 1장에 근거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웨슬리가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성경적 용례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는 성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또 베드로 역시 회개와 구원의 열매를 언급한 후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라고 말씀한다.”(장기영 박사)

장 박사님은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그때까지 지은 과거의 죄들만 용서를 받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죄 용서의 객관적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고, 그것이 우리의 죄를 실제로 용서되게 하는 우리의 주관적인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장기영 박사님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모두 사라진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이루신 객관적 속죄 사역과,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을 구분하지 않는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히 7:27, 9:12, 9:26, 9:28, 10:10, 벧전 3:18) 행하신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속죄 사역을, 성경이 요구하는 회개와 믿음을 통한 주관적 수용 과정을 생략한 채 신자에게 바로 적용하는 오류이다.”(장기영 박사)

그리고 장기영 박사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우리들의 믿음을 비성경적인 보편구원론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우리들의 성경적인 믿음을 장 박사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이 왜 잘못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죄인의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보편 구원론”과 “보편 속죄론”이 있다. 전자인 “보편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든 복음을 듣지 못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혜택을 받는다는 주장이다.”(장기영 박사)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회개와 믿음을 생략한 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 “보편 구원론”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보편 속죄론”이다. “보편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객관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 효력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자에게 적용됨을 가르친다.”(장기영 박사)

“우리가 구원 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주장은, 마치 “보편 구원론”과도 같이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회개와 믿음이라는 주관적 적용의 과정을 생략한 채 신자에게 적용해 용서를 남발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할 때, 한번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미 지은 죄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 심지어 회개를 하든 말든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한꺼번에 용서를 다 받았다며 마치 “보편 구원론”과도 같은 주장을 하는 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장기영 박사)

장기영 박사님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때까지 지은 과거의 죄들만 용서된다고 가르친 웨슬리님의 주장은 하나님의 용서의 무한하심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장 박사님은 웨슬리님의 그런 가르침이 오히려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늘 현재적 온전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 용서하시는 은혜의 무한하심을 제한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요일 1:9)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as often as there is occasion) 용서를 베푸시기에’ 용서의 횟수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가 용서 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무한하심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거에 한번 믿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면죄부와 같은 것이 아닌, 늘 현재적 관계의 온전함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장기영 박사)

저는 장기영 박사님을 통해 (장 박사의 웨슬리에 대한 설명이 사실이라면) 웨슬리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웨슬리님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평생의 온전한 순종하심과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완전하게 지불하셨음을 부정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 박사님의 말을 따르자면, 웨슬리는 우리의 죄 용서가 이중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평생의 순종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용서의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죄를 이실직고(자백)하고 회개함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적용되게 하는 주관적인 적용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적용의 과정이라는 것이 정말 애매합니다. 시험에서도 객관식 문제는 맞음과 틀림이 명확하여 시비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관식 문제는 언제나 시비와 원망이 따릅니다. 문제를 낸 선생이 주관적으로 판정하기 때문에 그 선생의 그날의 기분, 그 학생에 대한 평소의 감정, 그 학생의 글씨 ... 등이 평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기영 박사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음의 내용을 웨슬리님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이루어 놓으신 속죄의 근거(평생의 순종과 십자가)를 우리가 우리의 죄들에게 적용해야만 용서가 된다면,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 우리 자신들은 어떤 기준으로 우리가 지은 죄들을 판별해야 할까요? 그리고 얼마나 자주 충분하게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의 사역을 적용시켜야 할까요?

어떤 죄에 대해서는 한번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되고, 또 어떤 죄에 대해서는 두 번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고 ... 또는 그 죄가 마음에서 다시 떠오르지 않고 완전히 망각될 때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고 ... 우리의 남은 인생의 죄들의 용서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객관적 근거를 대체 얼마나 어떻게 자백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일어나는 군요. 내가 지은 죄들 가운데 어떤 죄들에 대해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그런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오직 그때까지 지은 과거의 죄들에 대한 용서만 있고, 이후 지은 죄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객관적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주관적 과정을 통해서만 죄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님이 가르쳤다고 장기영 박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 자신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들을 죽기 전에 알아채야 합니다. 내가 알아채야만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아채지 못하고 죽으면 그 죄가 그대로 남습니다.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용서 받지 못한 단 하나의 죄나, 열 개의 죄나, 천개의 죄나 ... 모두 천국에 못 들어가게 하는 동일한 죄입니다. 죄인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장기영 박사님이 범한 최근의 실제 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장 박사님은 제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하는 일들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밥벌이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모함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저의 밥벌이가 ‘대성공’했다고 모욕했습니다. 이웃을 거짓 증거하고 형제를 모욕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장기영 박사는 이미 사형에 처해질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장 박사가 깨닫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지옥에 갈 겁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시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성도의 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모두 단번에 용서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인이 신분에서 용서받은 의인의 신분으로 완전하게 변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나중에 오시어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의 효력이 소급적용 됨으로 완전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이미 오시어 자신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용서되지 못한 남은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로 얻은 의의 백성의 신분과 옷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면 반드시 책망하시므로 더 많은 징계의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백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