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서는 사이비 개혁주의자 정이철 목사가 정통 칼빈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고발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이철이 옳다면 루터, 칼빈이 이단이라는 말인데 ... 노이즈 마케팅으로 밥벌이하려는 목적으로는 대성공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이 추종한다는 칼빈을 이단으로 고발하고, 그동안 이단으로 비난해온 웨슬리 목사님을 추종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주제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웨슬리 목사님은 그것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습니다. 예전에 포스팅 한 내용 일부를 다시 올립니다.(장기영 박사의 페이스 북, 9/21/20)

 

성결교 장기영 박사
성결교 장기영 박사

최근 국내 개혁주의 논쟁의 이슈가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문제에 관한 웨슬리 신학의 입장

 

I. 웨슬리의 언약 신학: 행위 언약의 폐기와 은혜 언약의 수립

웨슬리는 역사 속 율법의 다양한 형태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 아래에서의 두 시대(dispensations)를 구분함으로 설명했는데, 이 구분은 칼빈주의 언약신학을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궤를 같이 한다. 존 데쉬너가 정리한 웨슬리의 두 언약과 두 시대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행위 언약(타락 전 아담만 해당됨): 삶의 규범은 도덕법, 순종이 하나님과 교제의 조건

2. 은혜 언약(타락 후 인류가 해당됨): 삶의 규범은 도덕법, 신앙이 하나님과 교제의 조건.

a. 모세 시대: 삶의 규범은 도덕법, 제사의식을 통한 화해를 믿는 신앙이 하나님과 교제의 조건, 신앙이 문자적 순종을 낳음.

b. 복음 시대: 삶의 규범은 도덕법,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를 믿는 신앙이 하나님과 교제의 조건, 영적이고 사랑에 의한 순종이 신앙을 입증.

두 언약과, 은혜 언약 속 두 시대, 세 형태의 율법은 모두 웨슬리의 율법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 아니라 웨슬리 신학 전반 이해에도 중요한 통찰을 던져준다.

a. 행위 언약

웨슬리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전 “행위 언약” 아래에서 의로운 아담에게 주신 율법과, 인간의 타락 후 “은혜 언약” 아래에서 주신 율법(자연법, 모세의 법, 그리스도의 법)으로 구분했다. 그 중 첫 번째인 행위 언약에 관해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타락 전 죄 없는 아담에게 주셨던 법을 “아담의 법(the Adamic law)”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부르거나, 언약신학의 용어로 “행위 언약” 아래에서 주신 율법으로 설명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타락 전 아담에게 “내적이고 외적인 의,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의 모두”를 요구했다. 아담의 순종과 거룩함은 그 정도에서와 “계속성” 모두에서 전적으로 완전해야 했다.

"행위 계약은 하나님께서 낙원에 있었던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모든 조항에서 완전한 복종, 부족함이 없는 총체적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이 복종은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소유했던 성결과 행복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조건으로 요구되었습니다. 행위 계약은 인간에게 내적이고 외적인,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모든 의 … 하나님께 대한 전적 복종, 내적이고 외적인 성결을 요구했고, 그 마음과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내면적이거나 외면적 율법에서 어떤 사소한 실천에서라도 미진함이 허락되거나 가감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 마음과 생활의 완전한 성결은 완벽히 지속되어야 하며 한 순간도 중단 없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아담의 법의 본질은 사랑이었으며, 사랑의 율법이 새겨진 장소는 아담의 마음이었다고 하면서, 죄 없는 아담은 “창조 시부터 이해에서든, 성정에서든 어떤 결함에서도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행위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요구는 “아담이 처음부터 가졌던 능력과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아담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처음부터 완전한 의와 사랑의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있었고, 따라서 율법에 순종하면서 낙원에서 영원히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죽음의 형벌이 찾아왔다.

b. 은혜 언약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와 세우신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칭하면서, 이 언약은 타락 후 모든 인간이 온전한 의와 사랑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새롭게 세우신 언약이라고 설명했다. 은혜 언약이 요구하는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행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믿는 자가 … 의롭게 되고, 성결하게 되며, 영화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웨슬리는 은혜 언약 하에서의 하나님의 요구를 “믿음의 법”(롬 3:27)으로 불렀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의 상실과,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의 손상을 가져왔다. 인간의 타락한 영혼은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무질서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어,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판단과 실천에서의 불완전함과 실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성결하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 도덕적 형상을 회복한 신자도,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의 손상으로 인한 수많은 결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도 과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의 요구를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

웨슬리는, 죄인이 율법을 완벽히 지키는 방법으로는 생명 얻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행위 언약을 종결지으셨고, “아담의 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신다는 바울의 선언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 언약이, 완전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 행위 언약을 종결시키고 대체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웨슬리는 행위 언약의 종결과 새로운 은혜 언약에 대한 설명을 토대로, 하나님께서 현재 인류와 맺으신 언약이 마치 행위 언약인 양 성화와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오류를 바로잡는다. 먼저 웨슬리는, 만약 타락한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 타락 전 아담이 한 것 같이 온전히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는 자신을 타락 전 아담 같이 죄 없는 상태로 여기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진 것임을 지적한다. 웨슬리는 “최초 계약인 행위 계약과 둘째 계약인 은혜 계약의 차이”를, “전자는 계약이 주어진 당사자 인간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이미 거룩하고 행복한 상태임을 전제로 하지만, … 후자는 계약이 주어진 당사자인 인간이 현재 거룩하지 않고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한 행위를 하겠다는 생각 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인용구) “ '율법에 의한 의'를 여전히 신뢰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은 다음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 그들은 자신이 행위 계약이 체결될 당시의 사람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허영에 찬 추측입니까! 행위 계약은 무죄한 아담과 맺어진 것입니다 … 그들은 행위 계약이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엡 2:1)에게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살아있고 죄를 전혀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했을 때 주어졌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복종이나 의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복종이나 의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전적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율법을 이룬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누가 그런 복종을 할 수 있으며 … 누가 하나님의 외적인 계명을 일점일획까지 다 수행할 수 있습니까? … 하물며 하나님의 내적 명령을 모두 수행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입니까? …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 [행위 언약이 요구하는] 의를 이루어 생명을 구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이 아닙니까?"

웨슬리는 행위 자체의 측면에서도 구원 받기 전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할 수 없는 이유는, “칭의 전에 이루어진 모든 행위는 …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원하고 명하신 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행위는 선하지 않다. (2) 그러나 칭의 전에 행한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원하고 명하신대로 행한 것이 아니다. (3) 그러므로 칭의 전의 모든 행위는 선하지 않다.”

또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엡 2:1-9, 롬5:8) 속에는 그것을 주시는 대상이 죄인임이 전제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구원 받을 대상은 거룩한 자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용구) "의롭다 함을 얻는 자는 누구입니까? …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롬 4:5) … 의로운 사람은 회개도, 죄사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눅15:7). 용서 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죄인 뿐이요, 죄만이 용서 받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 따라서 칭의를 얻기 위해 먼저 성결해야 하거나 먼저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 본질상 불합리하고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죄를 용서 받는 것은 거룩한 자가 아니라 죄인이며, 죄 용서는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선한 목자는 이미 발견된 자를 찾아 구합니까?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합니다 … 전혀 경건치 않은 사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지 않았던 사람, 선한 것이 조금도 없고 … 악하고 혐오할 만한 모든 것이 머물러 있는 사람 … 하나님을 거스르는 육적 마음의 열매. 교만, 분노,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빈틈 없는 신학자와 목회자였던 웨슬리는 심지어 사람이 더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반성도 정도가 지나치면 믿음을 붙드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관찰하면서, 더 온전한 변화나 더 철저한 회개를 이유로 믿음을 뒤로 미루는 태도를 경계한다. 은혜 언약의 요구는 믿음 이전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용구) "나는 충분히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여질 자격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손에 받아들여지기에 합당할 만큼 충분히 선합니까? 그런 사람이 존재한 적은 있습니까? “나는 아직 넉넉할 만큼 깊이 죄를 뉘우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도 마십시오. 물론 당신이 현재보다 천배라도 깊이 죄를 뉘우치기 바라지만 그것을 이유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믿기 전이 아닌, 믿은 후에 더 깊이 회개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머리는 바다가 되고, 눈은 눈물샘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전에 내가 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마십시오 … 당신은 아직도 자기 의를 내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행하거나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데 무익합니다 … 주님은 “이를 행하라, 즉 내 모든 명령에 완전하게 복종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웨슬리는 타락한 죄인이 행위 언약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의”(롬3:2)에 복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성화와 “모든 참되게 선한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칭의 이후에 뒤따르는” 열매임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의 유일한 근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벧전2:5) 만한 모든 것은 오직 진실하고 참된 구원의 믿음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II. 최종적 칭의에서 구원의 조건

왕 되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 때 모든 사람을 각각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멸망으로 판결하실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이 심판에서 율법을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삼으실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혼인 예복”(1789)이라는 설교에서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신자가 최종적 구원을 위해 입어야 혼인 예복은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이라는 예복이 아니라 신자 자신의 의의 예복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그날에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능동적으로 순종했는지의 여부가,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유일한 자격인 참된 믿음을 참으로 가졌는지를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이러한 설명과 관련해 흔히 구원에 관한 근본적 질문이 제기된다. 즉 웨슬리가 강조한 ‘그리스도께서 율법이라는 기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가르침이,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웨슬리는 현재적 칭의와 최종적 칭의 (또는 현재적 구원과 최종적 구원) 를 구분한 후, 전자에서는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이 요구되지만, 후자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믿음이 참이었다고 입증하는 증거로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를 고려하실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성화는 현재적 칭의(현재적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 할찌라도, 최종적 칭의(최종적 구원)의 간접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직접 조건은 현재적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이다).

웨슬리는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율법무용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며 집필 목적을 설명한 소책자 『브리스톨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758)에서, 성령의 내적, 외적 열매가 있어야 칭의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열매는 그들이 칭의받을 참 믿음을 가졌음을 입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에 의하면 ... 최종 칭의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최종 칭의의 유일한 조건인 참 신앙을 가졌음을 입증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게 될 것이다.
 

III. 웨슬리가 가르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 허용 가능한 것과 허용 불가능한 것의 경계선을 명확히 제시함

웨슬리는 제사장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가, 기독교와 모든 이교를 구분짓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이 필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1756년에 쓴 편지에서 윌리엄 로가 하나님의 진노를 부인한 것에 대해, 웨슬리는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를 함께” 가지신 분이시라고 반박했다. 하나님의 진노란 그의 의로우심이 죄에 대해 표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마다 그의 의로우심 역시 부인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란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이자,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죄인의 영혼에 적용한 결과”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설명할 때에도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행하신 율법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루터와 칼빈 식 전가 교리에 대한 수정으로 나타났다. 웨슬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주”(1765)라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의 바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용구)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고 용납되는 것은, 현재 그들 속에 있는 무엇이나 과거에 그들 속에 있었던 무엇, 또는 그들이 미래에 할 수 있을 무엇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과 고난 받으신 일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은혜 안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만 이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언제나 이 방법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 우리는 이 유일하고 동일한 방법으로만 새 생명의 길을 걷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이 진리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자, 기독교의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토대이며 … 루터가 선포한 대로 ‘기독교 교회의 흥망이 달린 진리’이자 … 구원 얻는 신앙의 기둥과 초석이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서 발견되는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믿음이기에, 이 믿음을 온전하고 순전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자신이 “지난 28년 동안 초지일관 믿어왔고 가르쳐왔고 … 1738년에 영국 국교회 표준설교집에서 발췌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해 12쇄를 거듭하기까지 전파한 내용” 역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은, 확실히 우리의 행위로 인한 모든 공로를 배제하고, 우리의 모든 공로와 칭의 받을 자격을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것이며,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값없이 주어진다”는 진리였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란, 칭의와 마찬가지로 “법률적 비유”를 통해 구원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기독교의 핵심 진리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변함없이 주장해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설명함에 있어 루터나 칼빈이 주장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의 오랜 논쟁 끝에 자신의 설교 “우리의 의가 되신 주”(1765)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인정했는데, 웨슬리가 인정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토마스 오든(Thomas C. Oden)의 설명처럼, “만약 판사가 법정에서 ‘당신은 죄가 없다’라고 선언하고 쾅쾅쾅 망치로 때리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법을 위반한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으로서 의의 전가이다.”

웨슬리는 이처럼 제한된 의미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인정하기 전, 칼빈주의자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와 오랜 논쟁 중에 있을 때,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방식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강한 반대를 표출했다. 허비는 자신의 저작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 1755)와 『열한 개의 편지』(Eleven Letters, 1765)에서 대속을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순종 모두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란 그리스도께서 온 마음을 다해 온전하게 율법에 순종하신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란 그의 죽음의 문제에 관해 성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셨음을 의미한다. 허비는 성화 역시 “신자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1756년 10월 15일에 쓴 편지에서 다음의 논리로 허비를 반박했다. (1) “율법은 순종과 죽음 중 한 가지만을 요구한다.” 즉 율법에 순종한 사람은 살 것이지만, 불순종한 사람은 죽을 것이다. (2) “율법은 사람에게 순종과 죽음을 동시에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했다면,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즉 율법은 율법을 어긴 죄인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면서, 동시에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한 형벌이 이미 집행되었다면, 율법은 그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은 그 형벌에 의해 이미 성취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신의 죽음으로써 … 온 세상의 죄를 온전히 대속하셨다.”

나아가 웨슬리는 『존 굳윈에게서 발췌한 칭의에 관한 논문』(A Treatise on Justification, Extracted from John Goodwin, 1765)에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다. 허버트 맥고니글(Herbert McGonigle)이 요약한 웨슬리의 논제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의, 즉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히 순종하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대속자와 중재자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서 의로움을 그리스도께 부여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시지 않았다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히9:14) 대속 제물의 자격을 얻을 수 있으셨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사람에게 옮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요구되었던 율법의 성취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율법의 성취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칭의는 본질상 죄 용서이다. 따라서 전가된 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설교 “믿음에 의한 칭의”(1746)에서 “칭의의 분명한 성경적 개념은 사면이요 죄 용서입니다 … 칭의에 관한 바울의 평이하고 자연스런 설명은 …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그를 위해 고통당하셨기에, 하나님은 그 죄인이 받아 마땅한 고통을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라는 말로 칭의를 설명했다.

(3) “의의 전가 교리는 신약성경이 매우 강조하는 회개의 필요성을 제거한다.” 웨슬리는 “만약 사람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받았다면, 무슨 이유로 그가 회개해야 하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그의 논제를 뒷받침한다. 웨슬리는 비록 성결한 신자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 앞에서 정죄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했다. 하물며 비록 칭의를 받았으나 아직 그 마음과 본성에 남아있는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받지 못한 칭의된 죄인(성결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회개 없이 주님 안에 날마다 거하며 또한 그 은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4)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에게 전가되어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완전히 의롭게 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실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하시는 말씀과 반대된다.” 웨슬리는 칭의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태를 그리스도의 상태와 혼동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칭의는 결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신 사람들에게 속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시는 일 … 우리를 실제보다 훨씬 좋게 평가하신다든지, 우리가 불의함에도 의롭다고 믿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 다른 사람이 의롭다는 이유로 나를 무죄하다 … 의롭고 거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릇됨이 없는 지혜에 위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윗이나 아브라함과 혼동하시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와도 혼동하시지 않습니다."

(5) “전가의 교리는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혼동해 뒤섞어버린다. 그 결과, 복음을 단지 하나님께서 행위 언약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시는 도움 정도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는 복음, 즉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생명과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오해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구원이란, 자신의 행위든 아니면 전가된 그리스도의 행위든 완전한 행위의 의를 하나님께서 인정함으로써 그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온전한 행위를 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웨슬리는 『존 웨슬리에 관한 힐 씨의 논평에 덧붙이는 글』(Mr. Hill’s Review of All the Doctrines Taught by Mr. John Wesley, 1772)에서도 같은 논지를 반복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신 것을 그가 죄인의 속죄를 위해 제물이 될 자격을 얻으신 사실과만 연결시켰지,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하는 것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또 그는 칭의를 율법의 성취와 분리시킨 후, 그 대신 회개 및 신앙과는 연결시켰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완벽히 순종하신 것의 전가가 대속을 위해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속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형벌 대속을 통해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신자의 순종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의 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시다는 이유 때문에 신자를 의롭다고 보시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전가의 교리가 죄인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허비의 주장에 대해, 전가 교리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만약 내가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모든 개인적 순종이 나의 것이 된다면, 거기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 위에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겠는가?” 허비가 주장한 것처럼, 만약 “실제로는 율법을 악명 높게 깨뜨린 죄인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 죄가 없는 순종을 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죄인으로 “거룩함이 전혀 없이도 흡족한 상태가 되게 한다 …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율법 위반자’로 살다 죽는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율법무용론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 될 것이다.

이후에 웨슬리는 “우리의 의가 되신 주”(1765)라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한 구원을 믿는 루터란과 칼빈주의 그리스도인과의 화해를 위한 목적으로 전가의 교리에 관해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인정했다. 죄인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의는 총체적으로 신자의 의를 이루는 근거가 되므로, 웨슬리는 바르게만 해석된다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표현 자체는 인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동시에 자신이 반대한 것은 전가의 개념 자체보다, 전가의 잘못된 적용이 초래할 율법무용론적 경향임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가 율법무용론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한 신학적 장치를 여전히 강조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웨슬리가 가르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여전히 허비의 가르침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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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신자의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하고, 동시에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할 것(요일 1:9)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마 3:8; 눅 3:8)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회개의 열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죄로 인한 슬픔, (2)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겸손케 됨, (3) 죄를 미워함, (4) 죄의 고백, (5) 간절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 (6) 하나님께 대한 사랑, (7) 죄를 멈춤, (8) 확고한 목표로서 새로운 순종, (9)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소유를 되돌려 줌, (10) 우리에게 지은 이웃의 죄를 용서함, (11) 자선 행위 등입니다.”

웨슬리가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성경적 용례를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라는 성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또 베드로 역시 회개와 구원의 열매를 언급한 후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9)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전에 지은 죄”, “옛 죄”의 용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심은, 죄인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언약의 관계를 파괴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잘못된 태도와 행위를 기억하고 자백하며 뉘우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a deep sense of our past sins)과 “뉘우치는 마음”(a penitent heart)이라는 인격적인 요소도 없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죄 용서는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죄에 대한 자각과 뉘우침, 자백이 없이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모두 사라진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이루신 객관적 속죄 사역과, 회개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을 구분하지 않는 신학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히 7:27, 9:12, 9:26, 9:28, 10:10, 벧전 3:18) 행하신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속죄 사역을, 성경이 요구하는 회개와 믿음을 통한 주관적 수용 과정을 생략한 채 신자에게 바로 적용하는 오류이다.

이것이 왜 잘못인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죄인의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표현으로 “보편 구원론”과 “보편 속죄론”이 있다. 전자인 “보편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든 복음을 듣지 못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의 혜택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비유를 들면, 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거액의 빚을 졌는데, 한 마음씨 좋은 부자가 그들을 딱하게 여겨 마을 사람들 빚 전부를 갚아 주었다면, 마을 사람이 그를 개인적으로 알든 모르든 그들의 부채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과 그 적용으로서 구원을 이런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 구원론”이다. 죄인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자동적으로 적용된다는 주장의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보편 구원론”은 성경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객관적으로 이루신 속죄 사역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개인적 수용과 적용을 통해서만 실제로 구원을 이루게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회개와 믿음을 생략한 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 “보편 구원론”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 “보편 속죄론”이다. “보편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객관적으로 성취되었지만, 그 효력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주관적으로 수용하는 자에게 적용됨을 가르친다. 성경이 중요하게 가르치는 회개와 믿음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용하고 적용하는 중요한 요소로 가르쳐 성경적 관점을 바르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 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 받는다는 주장은, 마치 “보편 구원론”과도 같이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회개와 믿음이라는 주관적 적용의 과정을 생략한 채 신자에게 적용해 용서를 남발하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 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할 때, 한번 예수님을 믿었으니 이미 지은 죄만이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 심지어 회개를 하든 말든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한꺼번에 용서를 다 받았다며 마치 “보편 구원론”과도 같은 주장을 하는 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 속에서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신자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죄를 지은 후, 자신이 하나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회개할 생각조차 없으면서도, 죄인이 스스로를 셀프 용서해주는 관계가 되고 만다. 이런 태도로는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 영광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사람이 마음대로 부리는 잡신이나 귀신, 우상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죄란 사람이 하나님께 행하는 인격적인 잘못이고, 하나님은 그 죄과를 회개라는 인격적 자각과 뉘우침, 고백, 돌이킴을 통해 용서해 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라는 요소를 경시한 채 죄와 용서를 비인격적 물건 다루듯, 은행에 예금된 돈 다루듯 하는 것은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물론 사람은 자신의 죄를 빠짐없이 기억해 자백하고 회개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에서도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위한 속죄 제도를 마련하셨다. 그러나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알고 지은 죄를 속죄할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부지 중에 지은 죄의 속죄 제사는, 알고 지은 죄를 속하는 제사와 함께 드려졌지, 알고 지은 죄를 속하는 제사를 폐기하지 않았다. 신자가 지은 죄를 모두 기억해 남김없이 자백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자각하고 기억하는 죄의 자백과 회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적용해 “부지 중에 지은 죄”마저 씻어 주시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이, 신자가 죄에 대해 민감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무효로 하지 못한다.

사람이 만일 루터와 칼빈의 행복한 교환이나 이중 전가의 교리에서처럼, 내가 신앙을 갖는 순간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영원히 사라졌기에 이제 더 이상 “내게 아무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주님 앞에 죄를 짓고도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뉘우치며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말씀이 아닌,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용서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 용서하시는 은혜의 무한하심을 제한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요일 1:9)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as often as there is occasion) 용서를 베푸시기에” 용서의 횟수에는 한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가 용서 받는 죄를 “과거의 죄”로 한정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무한하심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과거에 한번 믿은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면죄부와 같은 것이 아닌, 늘 현재적 관계의 온전함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범죄할 경우 철저한 자백과 회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통해 인격적 관계를 회복함으로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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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을 죄책의 용서에 한정짓지 않았다. 그는 설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1738)에서 구원을 “과거의 죄로 인한 죄책의 용서”로서 칭의와 “현재적 죄의 권세로부터 건져냄”으로서 성화 모두로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백성, 또는 성경의 표현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모든 죄, 즉 원죄와 자범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를 포함해 “육과 영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그들은 죄책과 죄의 권세 모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첫째 과거의 모든 죄책에서의 구원입니다 … 또한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웨슬리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라는 말씀을 주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은 “죽은 행실, 즉 영혼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는 내적이고 외적인 마귀의 모든 일에서 우리의 양심, 우리의 가장 깊은 영혼을 정결하게 해, 신앙의 삶과 온전한 사랑, 흠없는 거룩함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함”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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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그런 설명이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여전히 그 표현 사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설교 “우리의 의가 되신 주”(1765)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의를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과 사역 모두가 신자를 의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의 것이 된다”라고 설명했다. 즉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를, 루터나 칼빈의 설명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의나 인간의 죄가 마치 물건처럼 왔다갔다 하거나 주고받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신자가 자신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과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못 박았다.

웨슬리는 순종은 전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자 자신이 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의”에서 크랜머의 “구원에 관한 설교”를 인용할 때 그리스도의 대리적 율법 성취에 대한 모든 언급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웨슬리가 삭제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에서 그들을 위해 율법을 성취하셨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을 성취한 자들로 여겨진다. 율법의 성취는 그리스도인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가능했던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이를 보완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의”를 출판한 1765년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보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자신의 글에서 전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그것을 오직 칭의와만 연결시켰지, 성화와는 연결시키지 않았고, 전가된 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즉시 그 이후에 뒤따르는 실제적 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웨슬리에게 성화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는 것이기보다, 신자 속에 있는 기질과 성향과 감정과 의도의 변화이다.

같은 맥락에서 웨슬리는,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가르친 데 비해, 도덕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설명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설명이 율법폐기론자들이 성결도 전가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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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웨슬리는 가르침은 두 가지 동기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으로, 웨슬리는 칭의에서 어떤 인간의 공로에 대한 주장도 배제했다. 다른 한편에서, 웨슬리는 신자 자신의 의가 경시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율법무용론도 반대했다.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 즉 그가 우리를 대신해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주장에 반대한 것은, 신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능력을 부여 받아 율법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성화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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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