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교회관(1)

한국의 일부 교회사가들은 예장 고신 교회를 완전주의 교회관과 관련시킨다. '고신파'가 분리주의를 연상시키며, 그 시원(始原)을 신사참배거부운동이 기성교회에 항거하여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가지려고 한 행적에서 찾는다. 한상동·이기선·채정민 목사 등이 3세기와 그 이후의 분리주의자들의 완전주의 교회관을 재현했다고 한다.1) 노바투스주의자·도나투스주의자들처럼 개인의 거룩성을 교회의 본질로 여기고, ‘성자가 교회를 성(聖)하게 한다’고 하는 교회관을 가지고 기성교회를 적대시하고 정죄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리하려고 했다고 한다.

순교나 순교자적 항쟁은 일련의 신념체계의 결과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항쟁은 개혁주의 신론과 교회론과 경건의 결과이다.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는 신념체계와 신행일치, 생활순결, 지사충성이라는 경건의 열매였다.

한국교회가 우상숭배를 시행하기로 공적으로 결의하고 그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하자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은 이에 항거했다. 신사참배를 하는 목사가 베푸는 세례를 받지 못하게 했다. 가정예배, 가정기도회를 장려하고 개최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동지들을 획득해 나갔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평양에 모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교회들로 구성된 노회를 조직하려고 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주지역의 신사참배거부운동만이 협회(Association)라고 하는 교회조직을 만들고 독자적인 교회를 꾸려나갔다. ‘장로교인 언약’(1940)이라는 신사참배거부운동 신앙고백문서를 만들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과 새로운 교회를 조직한 것이 정당하다고 밝혔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1509-1564)의 신학과 교회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독자적인 교회를 조직하려고 했거나 조직한 것이 분리주의 교회관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일련의 통찰을 제공한다. 칼빈은 교회의 분열을 경계하고, 말씀과 성례가 유지되고 있는 한 그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노바투스주의-도나투스주의를 예로 들면서 교회가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거짓교회에서 분리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로 여긴다. 우상숭배를 행하고 거짓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라고 했다.

교회의 하나됨(Unity)에 대한 칼빈의 논의는 『기독교강요』와 프랑스 남부의 카펜트라(Carpentras)의 주교 야코보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에게 보낸 서한2)과 국왕 찰스 5세 주재로 열린 스파이어국회(Imperial Diet at Spires, 1644)에 제출한 『교회개혁의 필연성』3) 등이 담고 있다. 이 문건들은 모두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분리시켰다고 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비난을 공박한다.4)

칼빈의 교회관에 따르면 신사참배거부운동이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교회에 항거하는 독자적인 교회조직을 가지려고 한 것은 개혁주의 교회론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과 성례를 갖고 있지 않은 거짓교회에 대항하는 참교회 운동이었다. 분리주의 교회관이나 완전주의 교회관을 반영한 것도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충실한 교회개혁운동이었다.5) 신사참배거부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비슷하다.


1. 참 교회에서 분리하는 오류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장의 19개 항에서 신자들이 교회와 더불어 가져야 하는 하나됨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생기게 하고 믿음을 증대시키기 위해 외적인 장치를 첨가했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이다. 하나님은 이 보물들을 교회에 맡겼고, 이 사역을 위해 목사와 교사를 세웠다. 사탄이 더럽히고 부패시킨 교황제도로부터 말씀과 성례를 가진 교회를 지켰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거행되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참교회가 존재한다(IV.1.1.).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공회’는 가시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불가시적인 교회이다. 교회를 ‘공회’(보편적 교회)라고 일컫는 것은 선택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IV.1.2).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는 뜻이다. 바울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고 말한 것은 교회의 기구적 통일성이 아니라 성도간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신앙공동체를 뜻한다(IV.1.3.).

교회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믿음의 영역에 속하며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눈으로 명료하게 그것을 볼 수는 없다(IV.1.4.). 교회는 한 분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이다(IV.1.7.).

칼빈은 키프리안(Cyprian)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여긴다. 어머니인 교회를 떠나거나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면 항상 비참한 결과가 초래된다. 교회는 복음선포에 의해 성장하며 성도들은 신앙의 유대에 의해 결합된다(IV.1.6.)고 말했다.

칼빈에 따르면, 신자는 세례와 성만찬을 거쳐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이 거행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엡2: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신 약속은 변함이 없다. 보편적 교회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에서 불러 모은 큰 무리이다. 그 교회는 나누어져 각지에 존재한다. 거룩한 교리와 진리로써 서로 일치되고 연합되어 있다. 개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하며 온전히 성례를 집행하면 통일성(Unity)을 유지하게 된다. 악령들은 항상 보편교회의 신앙고백적 통일성을 해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려고 한다(IV.1.9.).

칼빈은 말씀과 성례를 교회의 표지로 여긴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때 그것은 교회가 진리의 신실한 파수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씀과 성례를 도구로 주셨다. 교회의 사역과 수고로 말씀의 선포가 순수하게 유지되기를 원한다.

칼빈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떠나는 신자를 배반자, 배교자로 단정한다. 그리스도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자기의 신부(엡5:27)를 세웠다. 그러므로 참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씀과 성례가 유지되는 한, 교회분열을 피해야 한다(IV.1.10.).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베푸는 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이탈하는 것과 같다. 사탄은 교회의 두 표지를 멸시하게 만들고 교회를 공개적으로 배반하고 떠나게 만든다. 사탄의 간계로 어떤 시대에는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일이 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사역(엡4:12)을 전복시키려고 사탄은 동일한 형태로 노력한다.

칼빈의 이러한 강조는 오염된 하나님의 말씀과 부패한 성례를 지닌 로마가톨릭교회를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께 충실한 행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서론적인 서술이다.

칼빈은 교회 분열을 금하면서도 말씀과 성례를 시금석으로 삼아 참교회성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씀과 성례가 온전히 행해지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교회가 아니다. 다른 결점이 많이 있어도 그 공동체를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순전한 말씀과 성례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교회라고 하는 이름만을 내세우는 집단은 거짓교회이다. 우리는 그러한 거짓교회를 경계해야 한다(IV.1.11.).

칼빈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잘못인 몇 가지 경우를 아래와 같이 열거한다. 첫째, 교리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고 하여 믿음의 일치를 깨뜨리거나 교회를 이탈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씀선포와 성례의 집행에 어떤 결함이 끼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성도의 교통에서 소원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종교의 올바른 원칙으로 확신하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필수 교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필수적인 것은, 예컨대 하나님은 한 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는 것 등이다.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가령 어느 교회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자마자 곧 하늘로 날아간다고 믿고, 반면에 다른 교회는 언제, 어느 곳으로 가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다만 주를 바라보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경우이다. 비본질적인 문제들(non-essential matters)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열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소한 교리의 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IV.1.12.).

둘째, 교회 안에 불상사가 있다고 하여 이탈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이 온전히 성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확신이다. 노바투스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적 특징이 드러나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거절했다.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 일부도 그러했다. 그들은 의(義)에 대한 그릇된 열심 때문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복음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 거기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극단적인 엄격주의로 무장한 나머지 철저하게 순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온전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합법적인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섞여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 오점이 없는 교회를 찾는 노력은 헛된 일이다(IV.1.13.).

셋째, 교회 안에 도덕적인 결함이 많다고 하여 이탈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린도 지역의 신자들 가운데에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회중 전체가 오염되어 있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수많은 죄를 범하고 있었다. 무서운 비행이 있었다. 신자들 사이에 분쟁, 분열, 시기의 불꽃이 있었다. 논쟁과 말다툼이 탐욕과 함께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이교도들조차 꺼려할 악행이 공공연히 저질러지고 있었다. 사도의 명예가 무례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도덕적인 면만이 아니라 교리적인 면에서도 부패했다.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웃어 복음 전체를 파괴하려고 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사를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사용했다. 예의가 없고 질서를 깨뜨리는 일도 많았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교회와 관계를 끊으려고 했는가? 아니다. 그들을 여전히 성도의 공동체라고 불렀다(고전1:2).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IV.1.14.).

넷째,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하여 떠나는 것도 잘못이다. 완전주의자들은 수치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일조차 잘못이라고 본다(고전5:11). “보통식사를 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데 주님의 떡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용납되는가?”6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교회를 즉각 떠날 결심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악인과 친밀한 관계를 피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의 의무이지만, 악인들과 친밀한 교제를 피하는 것과 그들이 밉다고 하여 교회와의 교제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바울은 성찬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면하면서 ‘타인을 살펴보라’고 하거나 ‘전 교회를 살펴보라’고 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자신을 살피라’(고전11:28)고 말한다(IV.1.15.).

다섯째, 교회가 불완전하다고 하여 분리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시고,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웠으니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엡5:25-27). 주께서 우리의 주름을 펴시며 티를 제거하기 위해 날마다 일하신다. 교회의 거룩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신자는 성화되는 과정에 있다(IV.1.17.).

여섯째, 교회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부패했다고 하여 이탈하는 것도 잘못이다. 예루살렘에는 강도, 배신, 살육,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종교가 멸시를 받았다. 그런데도 예언자들은 독자적인 그룹을 만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비행을 저질렀어도 거룩한 예언자들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의 도덕생활이 우리의 표준에 맞지 앉거나 기독교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교회의 교통에서 즉각 벗어나는 것은 지나친 행동이다(IV.1.18.).

일곱째, 교회 안에 불경건하고 방종한 생활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하여 떠나는 것도 잘못이다. 바리새인들은 극도로 방종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반 백성과 함께 그들의 의식에 참여하고 성전에 모여 공중 예배를 드렸다. 깨끗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악인들과 관계를 가져도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키프리안이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그릇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우리가 교회를 떠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알곡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다(시2:9; 계2:27).

여덟째, 교회 구성원 소수 또는 다수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불결한 사람들이 집행하는 성례전도 거룩한 것이고, 고결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고 유익하다(IV.1.19.). 신앙공동체 안에 도덕적 과오와 병폐가 있다고 하여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올바르게 집행되는 한 그 교회의 외적인 교통에서 의도적으로 이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완전한 것으로 여겨 고집하거나 그러한 이유를 빌미로 교회를 이탈하는 것은 마귀가 만들어 낸 생각이라고 한다. 교회분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7) 이상은 재세례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칼빈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릇된 교리와 예배를 가진 종교집단을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로마가톨릭교회를 염두에 둔 말이다.

 

-- 주 --

 

1)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6-7, 254; 김의환, “밖에서 본 고신교단,” 『월간고신』 (2002.3.), 53; “고신신학의 역사적 조명,” 『총신대논총』 (1995), 49; 이상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와 저항,” 제1회 소양 주기철 목사 기념강좌, 연세대 발표논문 (서울: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 1997), 79.; 『기독교사상연구』 4 (고신대학교, 1997), 229-230.

2)John Calvin, A Reformation Debate: John Calvin and Jacopo Sadoleto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3)John Calvin,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1544) (Edmonton, Alberta: Still Water Revival Books, n.p.), Reformation Bookshelf, vol. 24, 123-234.

4)Ibid.; David C. Steinmetz, “Luther and Calvin on Church and Tradition,” Michigan Germanic Studies 10 (1984): 98-111.

5)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2), 345. 김양선도 그릇된 시도로 본다.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56), 155.

6)재건파는 광복 후에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고서 다른 교회와 교제를 금했다. 고신파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조차 ‘동참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엄금했다. 최훈, 『한국재건교회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94를 보라.

7)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김명혁 교수는 “한국교회와 연합운동”(『한국교회 쟁점진단』, 서울: 규장, 1998)이라는 글에서 칼빈이 분파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다고 하면서 “이와 같은 칼빈의 교훈은 근본주의적 배타성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부 한국교회 신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던져준다고 하겠다”(p.355)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강요』 제4권 1장만 소개할 뿐 ‘분리하지 않는 죄’를 책망한 제2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위 글은 최덕성 박사가 2012년 10월 경에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전반부이다. 최덕ㅅ성 박사가 곧 출간할 예정인 <신사참배거부운동>에 포함되어 있다. 최덕성 박사의 홈페이지 리포르만다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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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성 교수는 고신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고,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였으며, 현재는 브니엘신학교의 총장이다. ‘신학자대상작’으로 선정된「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을 비롯한 약 20여권의 귀중한 신학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신학-복음전문방송 <빵티비>(BREADTV)의 대표이며, 온라인 신학저널 <리포르만다>(REFORMANDA)를 운영하며 한국 교회에 개혁신학을 공급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