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박사
서철원 박사

제 2 에베소 공회의(439)는 유티케스의 주장이 우세하여 정통 신앙을 가진 교부들 중 플라비아노스 (Flavianos)를 폭행하고 다른 교부들을 유배시켰다. 또 그 후 제 2 니카야 공회의(787)는 성상숭배를 바른 것으로 정하므로 우상숭배를 교리화하게 되었다. 이에서 나아가 제 2 바티간 공회의 (1962-65)는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하였다.

공회의가 항상 바른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없는 것들을 교리화한 경우가 많다. 가령 연옥 교리, 성도의 중보기도,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등은 공회의에서 정해졌어도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공회의는 성경에 없는 새 교리들을 만들 권세를 받지 않았다.

칼빈에 의하면 공회의의 성경 해석이 항상 바르고 확실한 것은 아니다 (Institutio, IV, 9, 13-14). 성경에 매여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만 공회의가 바른 해석을 하는 것이고, 공회의로 모였다고 해서 바른 교리를 산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덕에 하나님의 말씀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교회만이 성경의 해석권을 가진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의견에 성경을 종속시킴을 뜻한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 성경에 의해 해석해야 하므로 신자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합당한 교리를 표준으로 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바른 해석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적 해석은 신약성경의 진리여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사도적 계승을 강조하는 로마교회는 교회의 전통을 사도적 전통으로 주장하여 성경과 함께 전통을 계시의 원천으로 삼았다. 사도들이 자기들의 편지에 넣지 않았던 내용을 산 목소리로 추후에 교회에 가르치고 전하였다고 주장한다. 사도적 전통은 단지 사도들에게서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한 대로 사도들이 기록할 때 생략한 것을 산 목소리로 보충할 만큼 우둔하였는가? 이미 그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진리의 영에 의해 모든 진리로 인도 받았으면 무엇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었는가? 성경계시에 이미 주님이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계시가 들어있다 (Inistitutio, IV, 8, 14). 그러므로 추후에 사도들이 교회에 새로운 계시를 말로 전달하였다는 것은 불가하고 그런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억설일 뿐이다. 단지 유전은 사람들의 결정과 의견을 성경적 권위로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교회의 진통일 뿐이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칼빈이 말한 대로 주님이 자기의 말씀에서 제시한 것 이상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하면 안 된다 (Institutio, IV, 8, 15).

로마교회는 성경의 해석은 교회가 해야 하고 교회는 교리와 믿음에서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Schmaus, Katholische Dogmatik, III-1, 1958, 798). 교회가 계시를 바로 파악하므로 교회가 무류하다. 또 교회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채워져 있으로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결정하므로 무류하다는 것이다 (Schmaus, KD, III/1, 900-901). 교회가 무류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을 보증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판단에 넘겨지게 되고 불확실성에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Schmaus, KD, III/1, 802).

그러나 교회가 전체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신앙문제를 결성할 때 무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윤리에 대한 것을 결정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바른 신앙을 규정 받는다. 주교가 교회를 전체로 대변한다는 것은 개별적 해석보다는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힐 수는 있다. 그러나 주교들은 성경에 없는 결정들을 많이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결정을 했다고 할 수 없다. 교회의 무류성 교리, 마리아의 무흠수태,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 등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고 교회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교회가 주교단과 교황의 연합으로 교리를 결정하였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또 주교단과 교회는 선체로 교황과 결합하여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주교단 (全主敎團)에 교회가 현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Sciunaus, KD, III/1, 817). 주교단이 교황과 연합하여 교리를 결정할 때 무류하다고 할 수가 전혀 없다. 이것은 주교들의 회의인 공회의가 성상숭배 결정, 그리스도의 단일본성 결의, 종교다원주의의 결정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주교단의 결정이 무류할 수 있는 경우는 성경에 매이고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를 때만이다.

또 로마교회는 주장하기를 성령이 성경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증거를 교회에 위탁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의 글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도 않고 개인에게 직접 해석해주시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증거를 교회의 말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 자신이 교회의 매개를 통해서 듣는 자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Schmaus, KD, III/1, 754).

물론 복음의 선포가 선포자들의 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의 말씀을 떠나 교회의 해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사신을 선포하게 하셔서 그 말씀으로 직접 개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또 로마교회가 교회로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이유는 성경이 그 자체로는 죽은 문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이 교회의 산 말씀과 결합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보증이 교회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Schmauis, KD, III-1, 754. 756).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해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령이 성경의 말씀의 선포에 역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기 가신성과 자기 증거를 가지므로 교회가 외적으로 보증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증하고 확정해주어야 된다면,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고 죽어 있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히 4:12).

교회의 해석이 가해져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한다. 로마교회가 교회의 성경 해석권을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구원을 매개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단체적으로 구원동참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Schmaus, KID, III/1, 754).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역사하셔서 개인 영혼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적 해석을 덧붙여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자체로 역사하여 자기의 사신을 받아들이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자기 가신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교회가 구원을 매개해주기 때문에 교회가 가장 가까운 신앙규칙 (die nächste Glaubensregel)이고, 성경과 유전은 멀리 떨어진 신앙규칙 (die entfernte Glaubensregel)이라고 주장한다 (Schmaus, KD, III 1. 755).

로마교회의 문제점은 교회가 구원을 매개해주는 기관이라고 보는 데 있다. 교회가 구원을 매개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개인에게 직접 공급하신다. 만일 교회가 신앙의 가장 가까운 규칙이면 사람들을 교회의 속박에 얽어매는 것이어서 구원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한다.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신다.

또 로마교회는 주장하기를 교회의 선포가 어디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발견할지를 말해준다고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선포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Schmaus, KD, III/1, 756).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면 그 선포에 그리스도가 제시된다. 성경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면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른다. 성령이 복음선포에 역사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성경에 제시된 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해석을 통한 선포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교회는 주장하기를 교회의 공적인 해석이 없으면 인간적인 원함들, 삶의 느낌들, 시대 제약적인 견해들이 성경 해석에 더해져서 삶의 느낌들을 성경 해석의 표준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Schmaus, KD, III/1, 758). 성경 해석에 이런 일들이 있게 되는 것은 개인적 해석이나 공적 해석이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는 자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은 명료성을 가졌으므로 그 전하고자 하는 사신 (使信)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로마교회는 교황의 무류성 (無謬性) 교리에 교회와 성경의 무류성을 정초시켰다. 곧 교황이 무류하므로 교회의 교리와 성경이 무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온 교리만이 무류한 것인데 교황의 결정으로 교리가 무류하고 교리의 근거인 성경도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교황 무류성을 교리화하므로 교리와 윤리적 결정에 있어서 교황이 전혀 무류하다고 주장한다. 바티칸 공회의 (1870, 3 sessio, 4 caput. D. 1832-1635; Nr 383-387)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최고의 교리권을 부과하였다. 그래서 교회의 무류성도 교황의 무류성에 정초시켰다. 이 무류성을 그리스도가 교황에게 주었는데 교리 결정을 할 때 가장 잘 현시되고 보장된다고 한다.

교황에게 무류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근거는 전체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교황에게 최고 완전 권세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는 교황이 오류에 들면 전체교회가 신앙의 오류에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의 무류성 신앙에 전체교회의 무류성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다 (Schmaus, KD, III/1, 805-806). 교황으로서 말할 때 양도 불가한 전권이 그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신앙진리를 말할 때뿐만 아니라 설교와 구두나 문서로 하는 진술에도 무류성이 귀속되고 교회를 권징할 때도 무류한 결정을 하게 된다. 교황의 무류영역은 모든 계시를 포함하므로 신앙과 윤리에 대해 가르칠 때도 무류성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또 교황의 무류성은 교황이 하는 모든 일에도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가령 성인 (聖人) 책봉과 비계시적인 진리와 철학적 진리들의 선포에도 무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의 무류한 설명으로 계시가 확정되고 오류에 대항하여 교회가 보호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황의 무류한 교리 결정들은 취소불가하다는 것이다. 주교들이나 공회의의 확증도 불필요하고 증명도 불필요하다. 교황의 무류한 결정은 증명 획득으로 승인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류한 교리 결정의 검증은 계시에 들어 있음을 밝히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무류한 신앙선포는 신앙법칙 성격이어서 순종의 의무만 있다는 것이다. 순종을 거부하면 교회에서 분리된다. 왜냐하면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Schmaus, KD, III/1, 809-812).

교황의 무류성에 교회의 무류성도 정초되면, 성경의 무류도 교황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교회의 무류성은 계시에 근거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Schmaus, KD, III/1, 798), 또 교회의 무류성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이해의 보증도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Schmaus, KD, III/1, 802).

위와 같은 바티칸 공회의 (concilium Vaticanum, 1870)의 결정대로라면 계시와 성경의 무류성이 교황의 결정에 의존하게 된다. 로마교회는 성경의 무류성은 결정하지 않으면서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을 교리화 하였다. 교황이 주교들의 도움을 받아 교리와 윤리에 대하여 결정한 것은 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무류한 결정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견해일 뿐이다. 믿어야 될 것과 믿지 않아야 할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결정에서 나오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절대화한 것이므로 성경계시의 해석과 설명이기보다는 전문가들의 결정일 뿐이다. 그것은 시대상황에서 그때의 지식으로 결정한 것이므로 무류하다고 할 수 없다.

로마교회의 기본공식은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확정하였다. 그러나 1999년에 로마교회는 종교개혁이 주창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수납하였으니 교황의 교리 결정과 해석이 무류할 수 없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이것은 교황의 무류성 주장이 성경계시에 근거하지 않았고 계시에서 유래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신앙의 규칙들을 결정했을 때 그 당시에는 타당하게 여겨졌더라도 성경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황과 주교들의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무류한 신앙 결정일 수 없다.

심지어 교황이 철학적 진리들도 무류하다고 결정하면 참이 된다고 하는 주장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의 진리주장은 그들이 이성으로 생각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황이 무류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그것들이 옳다고 승인하는 것이다. 수없이 교체되고 새롭게 생산된 철학적 체계와 진리들이 교황의 승인을 받으면 무류한 진리가 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신앙 교리는 성경에서만 와야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해석에 의한 결정은 성경진리를 변조하는 일이 되므로 결코 무류할 수가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는 데서만 무류한 진리가 나온다. 교황의 무류성 교리는 많은 반대를 받아 왔고 20세기 후반 로마교회 내에서도 반박을 받았다. 성경의 무류성을 교황의 무류성에 근거시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교황의 성경 해석은 사람의 해석이므로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무류성은 성경에만 귀속하고 성경의 진술을 받는 것만이 무류한 신앙 교리가 된다.

종교개혁의 원리들에 의해 성경과 교회의 관계를 보면 교회는 성경에 종속해야 한다. 교회는 말씀에 의해 발생하였고 창조되었으므로 구원진리에 대한 모든 권위는 성경에 있고 성경에서만 유래한다. 교회가 권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파하고 성경대로 가르칠 때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서 나온 이차적 권위이다.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넘어갈 수 없고 언제나 말씀에 종속해야한다. 그때에만 교회는 권위를 갖는다. 또 진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선포할 때 교회는 말씀 선포자로서 권위와 권세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므로 신적 권위를 갖는다. 교회는 이 신적 권위에서 도출된 부차적인 권위를 갖는다. 그 부차적 권위도 성경에 매일 때만 허락되고 정당화된다. (신학서론, 28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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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박사는 서울대학,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원(Th.M), 화란의 자유대학교(Ph.D)에서 연구하였다.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칼 발트의 신학을 지지하는 지도교수 베인호프와 다른 발트의 제자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칼 발트의 신학의 부당성을 증명하였다. 발트의 사상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논문 '그리스도 창조-중보자직'을 관철하여 박사학위를 얻었고, 이 논문이 독일 튀빙겐대학이 선정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 논문 100편에 수록되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총신대 신대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 십년 동안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교수사역에 헌신하다 영예롭게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쉬지 않고 연구하시며 <바른믿음>의 신학자문 역을 맡아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