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이철 목사님, 목사님의 청교도에 대한 연구 글들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청교도 신앙과 사도들과 칼빈의 신앙의 차이가 인간의 원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벌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맞게 이해하였습니까?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잘 보셨습니다. 청교도 사상의 출발점이고 그들의 중요한 신학적 주장들이 그들의 비뜰어진 원죄 이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창조와 아담의 원죄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과 계획 가운데 자기 백성을 가지시기로 뜻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자기를 찬송하는 자기 백성을 가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은 아담을 자기의 백성으로 지으실 때 자기의 형상(인격)을 따라 매우 존귀한 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매우 닮은 자로 창조되어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과 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피조 세계를 다스림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제사장, 왕, 선지자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동.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아담이 얼마나 뛰어는 능력과 탁월한 지혜와 존귀한 인품을 가진 자로 창조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창세기의 기사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어떤 언약을 체결했다는 자세한 표현이나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언약 관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통해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하나님이 아담의 영원한 하나님 되심, 그리고 아담의 영원한 하나님 백성됨에 대한 언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존재입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원한 복락과 영생을 보장하신다는 언약의 담보물입니다. 아담이 매일 아침에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므로 생명이 하루 하루 연명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아담이 자기를 섬기며 경배하게 하셨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지도하는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은사를 다 주셨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아담에게 생명이 없고 죽음에 종속된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청교도 신학 류의 주장은 바르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과 복락을 즐거이 누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을 지속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담에게 영원한 복락과 생명을 보장하신다는 언약의 내용이 생명나무 담보로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담보로 아담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장, 왕, 선지자의 사명에 충실하지 않고, 반대로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여 스스로 선악과를 먹으므로 자기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면 반드시 저주하여 영원히 죽이실 것을 하나님은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호 6:7)

그런데 아담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스스로 진정한 왕이 되고자 침작하게 결심하고 선악과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할 분명한 뜻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원죄입니다. 아담의 원죄를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세워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을 피조 세계를 이끌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을 지극히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면서 아담이 하나님 백성되어 영원히 그리하도록 서로 언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했으므로 진노하시었고, 하나님은 반역한 아담을 회개해도 소용없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에 처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즉각 사형에 처하고 다시 흙으로 다른 아담, 즉 ‘아담 2’를 창조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삼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 백성으로 창조하셨고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 되시기로 언약하셨으므로 그 언약을 스스로 버리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미 아담에게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 되시기로 언약하셨으므로 스스로 정한 언약의 신실함을 보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작장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을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실 구원 사역을 집행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아담의 죄를 해결할 구세주로 성육신하시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어 아담과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님의 언약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과 영생을 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 파기의 죄 값을 치루심으로 다시 언약을 살려내어 아담과 우리들에게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은혜를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게 등장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하나님 백성들과 언약하셨다는 것이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증거입니다. 모든 언약들은 아담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 백성을 다시 만들어 내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언약들은 아담처럼 은혜로 하나님 백성된 사람들을 영원히 하나님 백성으로 보존되게 하려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담이 망처버린 하나님 백성과 나라를 끝내 이루어 내시기 위해 이후의 아담의 후손들에게 계속 아담이 망친 언약을 복구하기 위한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아담이 하지 못한 순종과 선행을 이후 사람들이 감당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언약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정된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 언약이라고 합니다. 매우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언약들은 모두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구원하신 자기 백성을 영원히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 백성들의 하나님으로 남고자 체결하신 언약입니다.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조건과 역할을 정하는 언약이 아닙니다. 언약을 그렇게 이해하면 이단 신학과 행위구원 신학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1)노아와의 언약, 2)아브라함과의 언약, 3)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 모두 이미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을 영원히 하나님 백성으로 남게 하시고 그 은혜를 영원히 보장하기 위한 언약입니다. 그 언약들은 절대로 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약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언약 사상을 버리고 이런 종류의 이상한 언약 사상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기독교를 이단 종교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아담과의 첫 언약부터 이단사상으로 고쳐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은혜와 창조 경륜을 따라 자기 백성으로 창조하신 아담을 영원히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 영원히 아담의 하나님으로 남기 위해 아담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언약을 체결했음을 완전히 부정하였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착하게 선하게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 공로를 보시고 영생을 주겠다는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은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선행을 연마하여 영생의 자격을 만들면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기로 계약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그런 내용의 약속을 주셨다면, 과연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용도는 무엇이었습니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아담이 선행을 잘 하여 영생의 자격을 스스로 구비함으로 당당하게 자기 힘으로 영생을 얻게하셨다면, 성경 66권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선하신 사랑과 은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고 자기의 공로로 영생을 스스로 획득한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는 시편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들의 타당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청교도들은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한 선행을 게을리하고 결국 포기하였음이 인간의 원죄라고 합니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자가 뭘 해보려고 하다가 자포자기하고 본래의 아무것도 아닌 자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진노하고 분노하시어서 영원히 저주하고 회개해도 소용없는 죽음에 처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이상해져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직 아무것도 아담에게 해 준 것이 없습니다. 단지 아담이 선행과 공로를 잘 쌓아서 자격을 갖추면 그 대가로 영생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못하고 주저앉았습니다. 하나님도 손해 본 것이 없고 아담도 손해 본 것이 없습니다. 양측이 본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저주하고 진노하고 아담을 영원히 죽이십니까?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공로를 쌓는데 실패했으므로 어차피 곧 자연적으로 죽을 사람을 왜 하나님은 분노하고 진노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영원히 죽이십니까?

청교도 신앙을 믿으면 기독교가 이렇게 이상해집니다. 인간의 원죄와 아담과 하나님의 첫 언약을 이렇게 왜곡하면 기독교는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원죄 개념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청교도 사상입니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은혜언약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은혜언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생을 얻을 선행, 즉 행위에 실패한 아담을 대신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어 아담 대신에 선행을 잘 하여서 먼저 그리스도 자신의 영생의 자격을 얻으셨고, 그리고 믿는 우리들의 영생의 자격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거장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아담 대신 선행으로 구원의 자격과 공로를 얻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아무 공로가 없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행위언약과 쌍을 이루는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왜곡해 버리는 거짓된 신학입니다.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한 선행으로 구원을 스스로 얻었어야 했다는 것도 거짓이고 기독교를 거짓 종교로 만드는 사상입니다. 만일 은혜언약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내용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에 율법의 선행을 이루어 자신과 우리의 구원의 자격을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니, 결국에는 구원이 율법의 선행에서 나오는 것이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사람이 되시어 아담 대신 선행하여 먼저 자신의 구원의 자격을 얻고, 그 다음에 우리들을 위한 구원의 자격을 얻었다는 사상이 사도들과 칼빈이 가르친 기독교인가요? 우리의 선생이건 그리스도의 대리적 선생이건 간에 구원이 율법의 선행으로 나온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가요? 그들의 사상을 따라가면 사도들과 칼빈의 신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단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고 가장 뛰어난 개혁신학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

저들이 자랑하는 회심준비론이라는 것은 사도들와 칼빈의 신앙을 완전히 말살하는 이단사상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행위언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선행으로 구원의 자격을 만들지 못하는 죄인을 향한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 앞에서 떨면서 지옥의 실상을 느끼면서 떨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절규하면서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즉 영적으로 각성된 이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구원의 유일한 길 되시고 근거이신 그리스도의 공로, 즉 완전한 선행으로 자신과 우리의 구원의 자격을 마련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이신칭의 구원을 이루어 달라고 울부짖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언제 성도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영적각성된 성도가 스스로 찾으라는 이 가르침이 사도들의 가르침인가요? 칼빈의 가르침인가요? 

이것이 바로 행위언약 아래의 인간이 은혜언약 속으로 이동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청교도의 구원 사상입니다. 저들이 날마다 떠벌이는 개혁신학이란 사도들의 가르침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다시 회복해 낸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어떤 사도들도 신앙생활과 구원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칼빈도 신앙생활과 구원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대체 이들의 청교도 개혁신학이라는 것이 사도들과 칼빈의 신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러면서 저들이 거룩하게 칼빈이 작곡한 시편 찬송을 부른다고 자랑하니, 세상에 이렇게 교활하고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요? 청교도 시대에 만들어진 웨민고백서에까지 이와 같은 청교도들의 언약 사상이 들어가 있으니, 사도들과 칼빈이 가르친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 설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세상이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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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