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혁 교수의 '언약신학' 2장 : 윌리엄 퍼킨스 부분에 대한 열번째 소감

안상혁 교수(합신, 교회사)의 저서 <언약신학>을 독서하는 이유는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들의 신앙이 기독교에 해를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안 교수가 옹호하는 그들의 개혁운동의 신학적 동력원 ‘행위계약’ 개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저하게 훼손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안 교수의 책 2장의 윌리엄 퍼킨스의 행위언약에 대한 안 교수의 결론 부분에 대한 글이다.

“하나님의 작정을 실현하는 외면적 수단이 곧 은혜 언약이다. 또한 은혜 언약은 구원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퍼킨스는 가르쳤다. 따라서 언약 교리 또한 교구민들의 마음속에 불안과 확신 모두를 형성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예정과 선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구민들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가?’라고 고민했다.”(안상혁, 101 페이지)

청교도 시대에 정립된 은혜언약이란 행위언약과 쌍을 이루는 언약 개념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을 그리스도가 대신 회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사상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 대신 율법을 지켜 구원의 자격 즉 ‘율법의 의’를 얻으신 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백성들에게 그 의를 적용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개념이다.

영생이 없이 창조된 아담이 선행(율법의 의)에 성공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기로 계약했다는 행위언약 사상은 성경적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를 허무는 패역한 주장이다. 그리고 창조주가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을 복구하기 위해 친히 사람(그리스도)이 되시어 아담 대신 선행하여 구원의 자격인 '율법의 의'를 취득하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적용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은혜언약 사상도 성경의 가르침을 훼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실종되어 버리고 ‘율법의 의’가 중심되는 기독교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의 심장부에 자리하는 많은 이론들은 칼빈이 죽고 난 후 영국의 청교도 시대에 형성되었다. 청교도들의 거짓 사상들을 표현하는 이론들이 기독교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다. 청교도 시대에 만들어진 웨민고백서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입으로는 성경과 사도들과 칼빈의 가르침이 장로교회의 바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성경과 사도들과 칼빈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는 청교도들의 행위언약, 은혜언약을 기독교의 기둥으로 믿고 고백하고 있다.

성경과 맞지 않는 이론을 기독교의 기둥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스스로의 모순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안 교수가 퍼킨스의 행위언약에 대한 자신의 결론에서 한 말 속에도 그런 모순이 보인다.

“언약 교리 또한 교구민들의 마음속에 불안과 확신 모두를 형성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예정과 선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구민들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가?’라고 고민했다.”(안상혁, 101 페이지)

안 교수가 진술하는 언약 사상이 성경적이면 청교도 목사들 교회의 예수 믿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수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고,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믿음으로 초청(부르심)하시고, 그리스도 앞으로 부르심 받은 택자에게 불가항력적 은혜로 믿음고백에 이르게 하신다고 도처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고백에 도달 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1)이신칭의
2)영생
3)믿음
4)회개, 기도, 예배, 성경공부 등등
5)구원확신

이것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칼빈과 서철원 박사의 주장을 보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그리스도는 친히 은혜를 따라 자기를 믿는 자에게 이미 칭의, 영생, 구원이 분명히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에 의해 구원와 칭의가 주어질 때 그 사람에게 구원에 대한 감동과 확신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만 그리고 단순히 용서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경우가 더욱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제생활은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일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능력을 깨달은 일이 없고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각을 한다.”(기독교강요, 3.3,1)

이와 같이 칼빈도 믿음이 시작됨으로 회개가 따라오고,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하심도 온다고 가르쳤다.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은 믿음으로 인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지 회개나 다른 조건이 충족됨으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선포를 들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셔서 거듭나게 하신다. 거듭남과 동시적으로 성령의 권면을 따라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을 하게 된다.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한다. 믿음고백과 회개는 언제든지 같이 가기 때문이다.” (구원론, 66)

서철원 박사도 복음선포가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하시어 사람이 거듭나고 동시에 믿음고백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믿음고백과 함께 회개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사람에게 이미 구원이 있는 것이고 성령으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완전히 다르게 가르쳤다. 먼저 구원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다른 유형의 은혜를 따라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옥으로 향하는 자기 영혼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이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지옥을 무서워하면서 떨고 심한 충격을 먹어야만 하고, 그때부터 영혼이 각성되어 예배, 기도, 회개, 율법 준수 등을 스스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이신칭의 구원을 사모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야 한다는 회심준비론을 만들어서 추종하였다. 그것을 자신들의 목회의 중요한 원리로 삼았다. 그들의 성경(신앙) 이해가 성경에서 벗어났고, 특히 행위언약-은혜언약이라는 그릇된 구도로 기독교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의 신앙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칼빈이 가르치고 설명한 것과 길을 달리했다. 그래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 하나는 예수 믿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안 교수의 말 속에서도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언약 교리 또한 교구민들의 마음속에 불안과 확신 모두를 형성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예정과 선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구민들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가?’라고 고민했다.”(안상혁, 101 페이지)

예수 믿는 청교도 목사 교회의 신자들에게 “나는 구원 받도록 선택되고 예정되었을까?”라는 불안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죄를 깨닫고, 지옥으로 가야 하는 자신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동시에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적용하여 이신칭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걱정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칼빈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섬긴 교회의 신자들에게서 이런 고민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과 믿게 하시는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죄용서와 칭의를 얻는다. 곧장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꼬였기에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나는 구원 받도록 선택되고 예정되었을까?”라고 고민하게 되는 것인가? 그 원인은 두 가지이다. 1)율법의 의(선행)를 구원의 기준으로 삼는 행위언약-은혜언약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기 때문이고, 2)행위언약-은혜언약을 적용하는 회심준비론을 목회의 원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정된 자는 구원의 자격을 스스로 연마하여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적용하여 달라고 간청해야 한다는 회심준비론 이단사상에 찌들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사상을 목회에 적용하는 현대의 교회들에게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페이스 북에서 보게 된 어떤 분은 오래 감리교회에 다니다 최근에 경기도 고양에 있는 청교도 목회 교회로 이적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래 예수 믿는 분이면서 구원의 확신이 오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내용을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렸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강하게 가르치는 목사의 설교에도 깊이 심취하여 있었다. 그 분과 교제하며 같은 청교도 목회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주변 분들이 다음과 같이 조언하는 것을 보았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계속 은혜의 방편 안에 거하시면 주님이 확신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청교도들이 말하는 ‘은혜의 방편’이란 예배, 성경공부, 기도 등이다. 예수 믿으면서 그런 것들에게 힘쓰면서 기다리면 구원의 확신이 오는 날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원래 청교도들이 가르쳤던 회심준비론의 핵심 사상이다. 대체 어느 사도가 예수 믿고 동시에 예배, 기도, 성경 공부에 힘쓰면서 기다리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날이 온다고 가르쳤었는가?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왜 지금 당장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예수 믿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기독교는 왜 이렇게 변해버렸는가?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은 구원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조언하였다. 사람이 무슨 재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인가? 이것도 회심준비론 사상에서 나오는 말이다. 대체 성경 어디에 사람이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사람이 찾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는가? 각 사람이 천로역정을 써야 하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이 칭의,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사도들과 칼빈이 가르친 기독교이다. 청교도 사상은 기독교에 이상한 이단성을 깊이 박아 버렸다. 청교도 사상이 기독교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맺는 말

기독교는 종교개혁을 지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라는 굴다리를 통과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데 청교도라는 굴다리는 건너면서 사도들과 칼빈의 가르침이 많이 실종되고 변질되어 버렸다. 청교도로 인하여 기독교에 이단성이 깊이 박혀버렸다. 이제는 사도들과 칼빈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상하고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의 구원을 염려하고 언제 구원의 확신올 가지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매우 신령한 교인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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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