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잉글랜드 회중교회파 청교도 사상이 지금 ‘청교도 개혁주의’, 또는 ‘최고의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4부의 2장(제목: 전가의 본질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전에 많이 다루었다가 멈추었던 신 교수의 책을 계속 살펴보는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예수 믿음’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활동이 신 교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섬기는 것임을 훗날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신 교수가 인정하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율법에 순종하셨고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이다.”(신호섭 교수/ 180)

위의 신 교수의 말의 핵심은 율법에 순종하셨고 죄를 짓지 않으시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살리는 의라는 것이다. 얼른 보면 틀린 내용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신 교수의 핵심 포인트는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여 얻으신 의가 십자가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우리의 의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율법 순종으로 얻으신 의가 십자가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 교수와 청교도 신학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을 흔드는 위험스러운 사상인 것이다. 신 교수의 다음의 말을 보면 신 교수의 그 주장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이미 확증한 대로, 주류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 자신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순종에도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우리에게 전가된 의는 후자의 의, 즉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의이다.”(신호섭 교수/ 180)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죄와 무관하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셨고, 처음부터 본질적인 의가 충만하셨다. 그러나 우리 죄인들에게 주신 의는 그리스도의 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 죄인들의 방식으로 친히 율법준수에 성공하여 얻으신 의로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신 교수와 청교도 신학은 아주 그럴싸하나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흠없는 행위와 율법 준수에서 우리의 의가 비롯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신약의 저자들은 신 교수의 청교도 신학처럼, 그리스도의 흠이 없는 율법 순종을 더 강조하고 그 끝에다 십자가를 붙여 놓지 않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만이 우리의 의라고 가르쳤다. 칭의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와 십자가가 아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고전 2:2)

“너희가 ... 구속된 것은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성경은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원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나도 성경대로 믿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시고 난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칭의를 얻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으면 한 줄만 찾아주기 바란다. 그리스도가 율법지켜서 얻은 의가 십자가를 거쳐서 우리에게 왔다는 성경 말씀 한 줄만 알려주면, 나는 입을 다물겠다. 혹시 신약의 저자들이 종이와 잉크를 아끼려고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율법준수를 잘 감당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므로 굳이 그 내용을 쓰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칼빈도 사람의 방식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가 너무 당연하였으므로 그 부분을 건너 뛰어 그냥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만 칭의가 이루어졌다고 가르쳤던 것일까?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기독교강요, 3:11.11)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기독교강요, 3.11.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기독교강요, 3.11.22)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기독교강요, 3.11.22)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기독교강요, 3.11.22)

서철원 박사도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사람의 방식대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가 너무 당연하므로 굳이 말하지 않고, 시간을 아끼려고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만 우리가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전통적 신학에서 예수의 율법준수를 능동적 순종(obedientia activa), 십자가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obedientia passiva)이라고 한 구분과 가르침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한 것이 아니고, 피 흘려 죄 값을 다 치르므로 죄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이다. 이 의를 받아 우리가 영생하게 되었다.”(그리스도론, 167)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준수를 이루신 것이 아니다. 의는 생존권을 뜻하는데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획득했다고 하면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도덕적 칭의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격을 갖추어서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 곧 고행과 선행을 행하여 의롭게 되어 의를 전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준수로 의를 획득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이런 일은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의를 얻었으므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한다고 하는 가르침은 로마교회가 구성한 도덕적 칭의를 개신교식으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구원론, 115)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다. 따라서 법정적 선언이지 도덕적 칭의일 수 없다.”(구원론, 29)

“의롭다 하심의 중요한 점은 바로 죄책을 제거하심이다. 죄책 혹은 죄과의 제거는 죄인을 의인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무죄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범죄하였지만 죄책이 제거되었으므로 죄에 대해서 책임질 일이 없어진다. 곧 완전한 의로 인정되는 것이다.”(구원론, 124)

신호섭 교수의 청교도 신학은 그리스도가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모세의 율법들을 지키셨고, 그것을 통해 자신과 우리에게 필요한 영생의 자격이 되는 ‘의’를 얻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과 칼빈, 그리고 서철원 박사는 1)그리스도가 사시는 동안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지 않고, 2)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동안 율법을 무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3)그리스도가 사시는 동안 율법을 지켜 얻으신 의가 우리의 칭의의 근거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다른 것은 이미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 1),2)번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독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궁리해 보기 바란다.

“신약의 저자들과 칼빈과 서철원 박사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동안 모세의 율법을 무시했다거나, 반대로 적극적으로 율법준수에 힘을 다했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자주 강조하여도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 장차 오실 자기 자신을 미리 계시하셨다. 때가 되자 율법이 가르치고 말한 모든 조건들을 다 완전하게 구비하신 사람으로 성육신하시었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에게 죄가 없어야 할 것을 가르쳤는데, 그리스도는 죄가 1도 없는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 율법은 완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쳤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가장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오시었다. 율법이 계시한 완전자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죄와 무관했고, 처음부터 성화가 필요 없는 완전히 의롭고 거룩하신 분으로 오셨다.

모세의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흠이 없어야 할 것을 명시했으나, 아무도 그리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성육신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율법이 말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실현되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율법을 사람의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는가? 어떤 왕이 자기 존재를 알리고자 편지를 써서 백성들에게 보낸 후 자신이 당도하여 스스로 편지의 내용 한줄 한 줄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고 순종시켰던 적이 있었는가?  

“이것들(안식일 등의 율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율법이 사람에게 주장하고 요구한 모든 것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 구현되었다. 그리스도가 노력하고 성화되어 그리되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분으로 성육신하셨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예고하고 가르친 모세의 율법을 죄인들의 방식으로 준수했어야 했다는 논리는 오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오시었음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존재와 성품에 비하면 율법은 천하다. 율법이 요구한 흠없고 완전한 완전한 인성으로 그리스도가 오시었음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길을 예비한 종(율법)에게 사람처럼 스스로 굽히고 순종하였음을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의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야 했다고 강요하는 것은 참람 죄이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 계시된 대로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으므로 신약의 저자들과 칼빈, 서철원 등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켰느니, 지키지 않았느니 ... 하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 완전한 분으로 오시어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했다고만 강조한다. 모세의 율법의 정신과 요구를 다 성취한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자기를 미리 예고한 그림자(율법)에게 사람의 방식으로 순종해야만 했다는 것은 오류이다. 그리스도에게 사람과 같은 방식의 율법준수 의무를 부과하는 신 교수와 청교도 신학의 주장은 죄악되었다. 

 

맺는 말

타락하여 죽은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이 갖추고 도달해야 할 기준을 율법으로 보이셨다. 아무도 그 율법에 합당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창조주께서 친히 율법의 기준에 100% 합당한 완전자로 성육신하시었다. 율법이 요구한 하나님 백성의 자질 100 % 이상의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시종일과 거룩하고 죄 없는 삶을 살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죄악된 반응 조차 보이시지 않았다. 그리고 율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생명과 피를 속죄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를 받으시고 만족하시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해 주셨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었다는 신 교수와 청교도 신학의 주장은 신성모독 신학이다. 성경과 칼빈과 서철원 등이 그리스도가 사람의 방식으로 ‘율법을 지켰다’ 또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논의를 하지 않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구세주께서 율법이 지시하는 완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율법 아래 태어나셨고, 언제나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며, 항상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셨음을 강조해야 한다. 구세주께서 감당할 수 없는 대속의 고난의 길을 자기 안의 신성의 도움을 받으시며 오직 자신의 순전한 인성으로 다 이루셨음을 강조해야 한다.
 

“진노를 감당해아 할 주체는 바로 인간 본성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성의 힘으로 인간 본성에서 그 진노를 감당하는 것이다. 영원한 진노를 신성의 힘으로 감당한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계셔서 그 진노를 인성으로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힘의 도움으로 모든 고통을 다 감당하시고 죄용서, 곧 의를 획득하셨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108)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의롭다 함을 얻는다. 성경은 '이신칭의'를 말하지, '이신행칭의'를 말하지 않는다. 신 교수와 청교도하는 사람들은 빨리 공개적으로 개종해야 한다. 율법으로 미리 계시하신 대로 구주께서 죄 없고 완전하신 분으로 오시어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시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의가 되시고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의를 이루셨다는 신앙으로 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지켜서 얻으신 의가 십자가와 함께(거쳐서)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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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