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과거 소련 선교회에서 선교사 훈련 받을 때 옆 자리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 목사와 작은 논쟁의 스토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성경 책 속에 접혀 있던 주보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 옆에 앉아 있던 그 목사가 주보를 주워주면서 “무너진 여리고성”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왈, “정 목사님, 요즘도 무너진 여리고성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세요?”라고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자유주의 신학을 전공했다는 그 다운 질문이었지만 성경의 역사적 사실 기록을 믿지 않는 교회 지도자나 교회들이 예상외로 많음을 보면서 놀랐다.

지난해 2월 남아공의 Alph Lukau라는 목사가 돈과 명성을 챙길 목적으로 한 청년과 짜고치는 부활 고스톱을 하였다. 죽은지 3일이지난 이 시체를 향해, 방언을 하면서,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 소리를 지르니까 관에 누워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는 웃지 못 할 조작 기적 사기 사건이 보도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짧은 인간의 두뇌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실제적인 기적 사건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의 인간의 짧은 두뇌는 좀처럼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역사의 의미를 정의를 할 때 두 견해가 지배적이다. 전통적으로 역사(History)는 객관적 측면에서 사실로서의 역사와 주관적 측면에서 사료(史料)의 진실성을 그 생명으로 하는 기록된 사실로서의 역사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20세기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역사(Geschichte)의미이다. 이 역사관은 19세기 독일이 낳은 칸트의 영향으로 성경 이적 전체를 불신하는 신학 사조로 발전하면서 구속사(救贖史)를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즉 예수 부활을 긍정은 하나 의미나 관점이 전혀 다르다. 전자의 역사관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식할 수 있는 사실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가 아니라, 사실이든, 창작이든, 조작이든 허구든 상관없이 일단 "믿음의 창문인 신앙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초역사(Geschichte)의 시각으로 역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을 문자 그대로 비디오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실제적인 역사 그 자체를 그대로 인식하고 믿고 따르는 신앙이다. 후자는 사건 자체보다는 기록자의 신앙고백적인 과거 사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라고 보는 측면으로 실제 역사적인 예수와 현상학적인 예수, 즉 이데올로기화한 예수(신앙화한 예수)로 구분하는 시각이다. 따라서 이런 역사관에서 성경을 믿을 수 없다는 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인가 영혼만의 부활(몰몬교)인가?”

“과거 예수의 부활이 현재 나와 무슨 상관인가? 과거부활이 아니라 현재 나의 부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당시 죄수들이 골고다에 버려지는 것이 원칙인데 무덤에 장사지냈다는 증거 부족하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무덤에 있는 시체 도적질한 것이다.”

“실제부활이 아니라 제자들이 부활 환상을 본 것이다.”

“죽은자가 다시 살았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비과학적이다.”

“왜 4복음서 부활 사건 기록이 일치 하지 않는가?”

“예수 부활은 실화가 아니라 전설이나 신화일 뿐이다.“

성경의 기록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명명백백하게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전직이 세리 공무원이였던 마태는 마태복음 제1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족보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 이유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기 전에는 도무지 믿지 않았던 동시대 유대인에게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가지 사료가 빈약했을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42대의 호적을 추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세계”를 파헤쳤던 날렵한 통찰력으로 예수부활 사건의 역사적(History)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마28장). 그 당시 예수를 죽였던 유대주의자들(아마 바리새인들)은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에 불안을 느꼈든지 만의 하나라도 혹시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다가 예수의 부활을 사기 날조할 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미리 강하게 제기하였고, 절대 권력을 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인봉(印封)은 물론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로마 군대를 동원하여 철통같이 지키도록 한다.

그러나 부활 사건 당일 원인 모를 지진이 발생하였고 형상이 번개 같고 옷이 눈같이 흰 하나님의 천사가 예수 부활의 증언자로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고,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천사를 보고 무서워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그 천사가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보러 온 여자들에게는

“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으니 무서워말고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라고 하며 그의 빈 무덤을 예수부활의 제 1차 증거 자료로 공개한다.

이 기절초풍한 초자연적 사건을 몸소 체험한 로마군인 파수병들은 즉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공적으로 보고한다. 이런 기막힌 뉴스를 접한 유대교 장로회에서는 그들이 우려했던 예수의 육체부활이 실제 사실로 눈앞에 드러나자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의 악을 엄폐하고 부활의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고 혐오를 목적으로 로마 파수병들과 물밑거래를 공식 결정한다.

“파수병들이 잠자는 동안에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갔다”라는 시체도적설을 사회 여론에 흘리는 댓가로 엄청난 거액의 뇌물을 지불했을 뿐아니라 병사들이 잠잤다는 근무 태만, 명령불복종 등의 위반 행위에 대해 어떤 책임도 전적으로 장로회가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예수 부활은 새빨간 거짓이다. 빈무덤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기 때문이다” 라는 얼토당토 않는 가짜뉴스 유언비어가 입에서 입으로 선동질을 하였다(마28:15). 어처구니없게도 힘없는 제자들은 감히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인봉(印封)까지 뜯어내고 시체를 도적질했을 뿐 아니라 "죽은 예수가 살았다“고 함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는 거짓 뉴스로 누명까지 뒤집어 씌워 꼼짝달싹 못하게 위협하여 사실상 원천 봉쇄를 당했음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마태는 예수부활과 빈 무덤 기사의 일단이 돈·권력·종교적 교조주의에 눈이 먼 한 집단의 모략과 음모의 선전 선동술에 의해 실제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 자체가 역(逆)으로 예수 부활의 진실성을 더욱 공고히 입증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한다.여기서는 단지 마태복음에 나타난 증거만을 예시했을 뿐이다. 혹자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추종자였기 때문에 사실이든 아니든 부활을 변증하고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가 전혀 아니었던 한 외부인, 바로 사도 바울의 증언을 들어 봐야한다. 그도 처음에는 유대인들 사회에 퍼진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모독한 에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아직도 그런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라고 떠들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예수쟁이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유대 최고회의가 인정하는 체포영장을 쥐고 살기등등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이상한 빛 때문에 그는 땅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윽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된다(행 9:1~30). '예수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실상(reality)을 목도하는 순간 유대교의 골수분자였던 사울의 뇌리에는 아마 여러 상념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스쳤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끝장난 그 나사렛 예수가 아닌가?'

'부활한다고 큰 소리쳤지만 부활은커녕 세간(世間)에 “시체도적설”이 역사적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교권주의자들의 음모와 조작이란 말인가'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린 그 예수가 부활하셔서 지금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니'

그렇다면 그분이 나사렛 이단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단 말인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었는데 정반대로 그분을 핍박하고 있다니 이게 왠 말인가?'

다메섹 도상의 사건 이후 철옹성 같은 그의 전통도, 가치관도, 종교도 '오직 예수'를 위해 모두 다 배설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사울의 회심사건(turning point)은 그가 고백한 대로 당대에 가장 늦게 발생되었던 명백한 “예수 부활”의 산 증거라 말할 수 있다(고전 15:8). 문제의 초점은 예수의 역사적 상대화, 예수 신앙의 상대화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히고 기독교 신앙의 마지노선인 ‘오직 예수’의 신앙을 왜곡,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history)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최후·최대의 적, 사망권세를 물리치시고 정복(V-Day)의 노획물로 빈 무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며("My victory is yours!") 부활 신앙을 힘차게 격려하신다. 빈 무덤은 이 지구촌의 어느 인생도, 어떤 종교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의 것이다. 빈 무덤은 재림의 나팔 소리에 창세 이후 무덤 속에 있던 모든 인류가 부활로 호출되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상(icon)이기도하다(요 5:29).

그래서 빈 무덤은 영광스럽고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영의 사주를 받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 부활을 거부하려고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요란한 기교를 부린다 해도 결국 말 바꾸기일 뿐, 성경 진실의 본질을 결코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실로 2000여 년 전 저 나사렛 예수가 나의 죄 때문에 죽었다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인가?

그럼에도 전혀 의심 없이 믿어지는 예수 부활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이요, 신비 중의 신비다.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했고, 사건의 진실과 정의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더욱이 빈 무덤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도 예수부활을 거부하기로 작심했던 자들이나 성경의 많은 신비적인 사건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요리조리 해석학의 머리를 굴리며

"부활을 2000년 전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지 말고, 날마다 생활 현장에서 정신적인 부활로 승리의 삶을 사는 것"

"예수는 정말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것일까? 빈 무덤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한가?"

라고 과소평가함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에 기록된 예수 부활사건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인 증거와 사료의 기록을 불신(不信)하고 인멸(湮滅)하려는 교회 안팎의 현대판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우리 주님의 따끔한 경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전지전능의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 그가 부활할 만한 능력도 없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이 참이요, 성경의 모든 증거도 참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도 참 역사적 진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 (막12:24)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 39,40, 마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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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