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 신자들이 하는 유머가 있는데 성령님께서 지상에서 유일하게 가보시지 않은 곳이 딱 하나가 있는데 바로 ‘성 베드로 성당’이라 하는데 우리 개신교회로 패러디를 하면 성령님이 가보시지 않은 딱 한 곳은 ‘초대형교회’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크기에 세뇌가 당한 자들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는 것인가를 논한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사실상 초대형교회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했어도 ‘거짓 교회’인 것을 중세교회와 현대교회의 문제들이 보여 주었다. 특히 20세기에 등장한 초대형교회는 분명하게 ‘올바른 신학’을 추구하지 않고 인본주의를 추구하고 인본적 전도와 교육을 행하고 은사주의를 추구하여 성장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전 세계를 대표하는 초대형교회들이 얼마나 ‘복음신앙’이 아닌 율법신앙과 번영신앙(한국에서 표징으로는 율법은 많은 종류의 헌금과 맥추감사주일이고 번영은 송구영신예배와 추도예배 그리고 긍정의 힘)으로 교인들을 세뇌를 시키고 무뇌아(no brain)가 되게 하였는지를 잘 표현한 것이 “모여라, 돈 내라, 짓자 그리고 세습”인데 이러한 ‘거짓 신앙’의 모습은 사실상 중대형, 초대형교회(중형은 출석 성인 300명, 대형은 천명, 초대형 만명 이상)에서 잘 볼 수 있는 것을 세상과 기독교 언론의 기사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교회의 분립 개척을 선언하여 칭찬을 받은 초대형교회 목사가 “교회가 커질수록 위험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위험성을 피해가면서 건강하게 한국교회를 섬기는 대형교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철저하게 ‘가진 자의 논리’이고 솔직히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본적 사고’라 할 수 있다. 즉 ‘교회의 크기 자체가 분명하게 위험성’이 있는 이유는 교회의 크기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기에 교회는 크기가 아니라 깊이(순결로 복음의 진리 추구, 전체 신자들의 인격적 관계가 ‘그리스도의 몸’의 은유)를 추구해야 하기에 반드시 교회 분립 개척도 ‘30개’가 아닌 더 ‘세분화’하여 자신의 초대형교회가 전체 신자들의 인격적 관계가 되는 100명의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하지 않으므로 솔직히 ‘명예욕’을 추구하는 ‘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사실상 올바른 이해는 칼빈주의)를 추구한다는 신학교에도 선교학 교수들이 ‘교회성장학’을 가르치고 풀러 출신들이 교수로 있다는 것 차제가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교가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개혁주의에서는 선교학이 아니라 ‘전도학’으로 표기해야 옳다.

그리고 장로교회 목사라 하면서 풀러를 비롯하여 복음주의 계열(시카고 트리니티), 침례교 계열(남침례, 고든콘웰, 리버티 등), 감리교 계열(에즈베리, 보스턴 등)과 심지어 세대주의 계열(달라스, 탈봇 등)에서 박사를 한 자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시공간의 한계로 사실상 불가능하고 개혁주의가 결여가 된 것을 볼 수 있고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비개혁주의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들이 ‘교회성장학’을 추구하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성장학’에 대한 핵심을 논하면 도널드 맥가브란(1897–1990)이 신학화를 하였는데 미국식 ‘실용주의’가 바탕이기에 성장이 가장 우선이고 이 방법을 위해서 ‘사회학’을 교회성장학의 중요한 이론으로 삼기에 결국은 ‘문화인류학’도 중요하게 보기에 결국은 선교학을 대표하는 풀러나 시카고 트리니티는 ‘선교학(Missiology)’으로 표기하지 않고 ‘문화간 연구(Intercultural Studies)’ 전공으로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선교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고 교회성장학의 목표는 깊이가 아니라 넓이로 철저하게 빠른 시간 안에 숫자적 성장을 추구하므로 인본주의가 되는 것이고 추구한 교회는 ‘거짓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않은 ‘자의적 해석’으로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사도행전 2장 47절(새번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인데 여기서 그는 ‘더하여’를 성장(growing)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맥적으로 보아야 하고 성경 해석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단지 47절만을 볼 것이 아니라 42-47절을 보아야 하고 본문은 교회의 성장이 핵심이 아니라 초기교회가 무엇을 행하였는지를 전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도 소제목으로 “신도의 공동 생활”이라 하였고 영어 성경인 ESV도 “신자들의 교제(The Fellowship of the Believers)”하였다. 즉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성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데 맥가브란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여 오직 성장으로만 본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가 중요하게 본 47절의 올바른 이해를 ESV 스터디 바이블(부흥과개혁사)에서는 “이는 또다시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언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참된 회개와 믿음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라 하는데 올바른 해석으로 잘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올바른 이해로 전도를 잘 전해준 조직신학자가 바로 제임스 패커로 “전도는 하나님의 일 100%, 인간의 일 0%”이고 왜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는 바로 전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성장학은 성경 해석부터가 잘못되었기에 ‘거짓신학’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을 가르치거나 전공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고 어리석은 것인데 신학자들이 문제로 삼지 않는 것은 그들도 ‘도긴개긴’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해석 방법인 ‘원독자 중심의 문맥적 해석’을 추구하기 위해서 신학자와 목사는 부지런히 올바르게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데 행하지 않으면 인본주의와 사변적 신학 사고 아니면 은사주의를 추구하여 자신도 모르게 이단적 사상을 추구하거나 만들어 거짓신학과 거짓설교를 하여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고 악령의 힘으로 순결과 깊이가 아닌 크기를 추구하여 거짓교회도 만들고 자신만이 아니라 거짓신자들도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마 15:14, 갈 1:6-9, 벧후 2장). 즉 이단의 동의어가 ‘거짓교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사실상 기독교 밖의 이단보다 더 위험하기에 잘 분별해야 한다(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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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