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올라갈 리차드 멀러의 책 서평의 글을 위한 준비하는 내용이다).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기독교 세계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을 은혜와 영생이 없는 상태로 창조했다고 한다. 아담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되었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고 해도 영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아담의 창조를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은혜와 영생 안에서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본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즉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으면 그 상태로 지금까지 영생을 누리면 대대손손 하나님의 복락을 누렸을 것이라고 본다. 창조 당시의 아담을 이렇게 보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이다.

이렇게 보건 저렇게 보건 그것이 기독교 신앙 이해에 문제되지는 않는 것일까? 아담이 영생이 없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해석의 가장 큰 난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바로 이어지는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 처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게 창조된 아담이 스스로의 노력(행위, 율법)으로 완전 상태로 진입하여 영생을 얻었어야 했으나, 아담이 그것에 실패하였다고 하나님이 회개도 용인되지 않는 영원한 저주를 내리셨다는 원죄 설명이 부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은혜와 영생 안에서 완전하게 지으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 백성되게 하셨는데, 아담이 언약을 파기하였으므로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고 해석해야 전체 성경에 맞고 자연스럽다.

2)임시적이고 불완전하게 지어진 아담이 자신의 노력(행위, 율법)으로 영생을 얻어어야 했으나, 실패하여 저주 받았다는 해석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유발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아담의 자리에서 완전한 행위(율법)를 이루시어 자신과 우리 모두의 영생의 자격을 획득했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를 믿어야만 한다. 그 결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 거룩, 구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파괴된다. 대신 그리스도의 율법 준수라는 행위가 우리의 의라고 믿게 되므로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칭의를 주시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크게 훼손된다.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해석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아담이 영생할 수 있는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태초의 아담이 영생과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불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주장이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만물과 최종적으로 아담을 지으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스스로 만족하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아담을 지으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곧 죽어야 하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아담이 우주와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왕이 될 수 있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친히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아담이 살아있는 영혼, 즉 영생하는 영육의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영생이 없는 임시적 생명으로 창조된 아담이었다면 성경이 아담을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사도 바울도 원래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원히 살아있는 영혼, 즉 죄의 오염이 전혀 없어 영혼의 의지와 성품이 순수한 인격을 통해 그래서 발현되는 상태로 영생하는 사람으로 창조되었다고 분명히 이해하고 명시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하여 죽자, 살려주는 영으로 그리스도가 오시었다고 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하나님께서 완전한 은혜와 영생 안에서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또 하나의 명확한 증거는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 나무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아담이 자기의 욕심대로 살고자 결단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아담이 그리하면 더 이상의 회개가 용납되지도 않는 영원한 저주에 처해진다는 하나님의 경고의 상징이었다.

그러면 생명 나무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아담이 매일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매일 먹어서 생명을 연장해야 했다면, 그 나무는 일용한 양식을 주는 나무이지 영생과 연관된 나무가 아니다. 생명 나무에 대해서는 칼빈이 적당하게 잘 해석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다시 돌려)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기독교강요, 4.14.12)

에덴 동산의 생명 나무는 아담에게 주어진 성례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원히 보장된 영생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나님은 생명 나무를 통해 아담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살면 은혜와 영생이 다함이 없이 영원한 것임을 언약하셨다.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똑 같이 가르친다.

“언약백성이 받을 상급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 상급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다. 언약체결의 근본목적은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긴 자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함께 두신 것은 언약을 지켜 하나님 섬김을 잘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인간론, 152)

서철원 박사의 말은 아담이 하나님을 계속 섬기면 처음에 받은 영생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면 앞으로 언젠가 영생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생 안에서 창조된 완전한 하나님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기독교 신앙이 바르게 설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에서 행위계약으로 아담과 하나님의 관계를 기술하였고, 대요리문답 20항에서는 반대로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대로 영생을 지금까지 누렸을 것이고, 그 사실이 생명 나무로 언약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 다음의 21항에서는 아담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하여 완전하게 창조된 상태로부터 벗어나 타락하였다고 설명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에 언약 신학에 대한 혼선이 심했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교도 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담이 완전한 영생이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을 드러내는 신학은 등장하지 않았다. 아담이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존재의 도약과 격상을 경험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청교도 운동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다음의 칼빈의 말을 보면, 어거스틴도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지금까지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창세기를 해석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기독교강요, 2.1.4)

아담은 교만하여 하나님 섬김을 거부했으므로, 즉 하나님 백성되기를 거절했으므로 영생의 은혜가 사라졌다는 것이 정통 신학의 상식이었다. 이와 같이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비틀어서 뒤엎은 사람이 회중파 청교도들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이다. 왜 퍼킨스는 이런 못된 일을 했을까? 그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
 


1564년,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Matthew Parker)가 여왕에게 올린 보고서(논문? 책?)에서 국교회의 공동기도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Puritans’(청결한 사람들), ‘Gehnnial’(지옥의 사람들), ‘Presbyterian’(장로교주의자들), ‘Precisian’(까다로운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중에서 ‘Puritans’이라는 단어가 여왕과 국교회를 압박하는 개혁자들을 부르는 대표적인 호칭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국교회 감독들에게서 가장 미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은 영국 국교회에 장로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국교회의 감독제도가 약화되고 장로제도가 도입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개혁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박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교도들이 개혁운동은 고사하고 영국에서 설 자리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부득이 개혁운동의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

더 이상 국가 권력을 상대하는 종교개혁 전략은 불가능해졌고 일반 대중이 스스로 종교개혁을 이루어가게 만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그 작업의 선두주자가 회중파 청교도의 조상 윌리엄 퍼킨스였다. 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 토마스 카트라이트 등의 칼빈의 장로교 제도를 주장하였던 개혁운동이 회중파 청교도 퍼킨스가 앞장서는 신학과 사상의 개혁운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퍼킨스의 신학과 사상이 이슈가 되는 개혁운동의 출발점은 행위계약(언약) 사상이었다. 퍼킨스는 행위계약 사상을 수립함으로 아담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완전한 생명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였다. 성경대로 가르치고 믿었던 어거스틴, 칼빈 등의 정통 신학의 창로론과 원죄론도 파괴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성경 말씀과 칼빈의 예정신학이 강조되면 영국의 국민들의 신앙이 나태해지고 느슨해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개혁운동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방해가 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도움 없이 개혁운동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영국 국민들이 스스로 자기의 구원을 위해 투쟁하게 만드는 새로운 신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퍼킨스는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지 않고 불완전하게 창조하신 아담이 스스로 노력하여 영생을 얻도록 정하셨다는 행위계약 신학을 만들었다.

1580년대 말, 퍼킨스가 이 작업을 하기 전에 이미 몇 사람들이 자연언약 등의 명칭으로 비슷한 개념을 말하기도 했으나, 현재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행위계약 사상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퍼킨스였다. 퍼킨스가 도입한 행위계약이 곧 청교도들의 원죄론이고, 그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사상은 청교도들의 구원론이다. 그리고 행위계약 사상에 근거하여 성도들에게 신앙교육하는 회심준비론은 청교도들의 목회 실천신학이다.

서철원 박사는 청교도 신학에 의해 왜곡된 창세기의 아담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칼 바르트에 의해 더 넓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행위언약에 매이면 발트 신학에 귀결하는 것이 필연적인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발트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교제의 대상자를 갖기 위해 사람을 지으시고, 그와 교제하신 후, 그를 자기의 존재에까지 끌어올려 자기의 존재에 동참하게 하신다 ... 하나님은 이런 완성된 인간 존재를 가지시기 위해 처음 창조시 그를 파편적이고 임시적으로 지으셨다. 이 임시성의 제거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루시고 그 성육신을 통하여 신인합일을 성취하신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칼 바르트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하셨다고 했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존재의 임시성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셨다고 했다. 바르트는 인간의 불행이 아담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해 비롯되었음을 감추어 버리고 대신에 하나님이 처음부터 아담을 부족한 자로 창조했다고 왜곡했다. 서철원 박사는 불행하게도 개혁신학의 대가인 헤르만 바빙크에게서도 청교도 신학의 인간 창조 이해, 그리고 칼 바르트의 인간 창조 이해와 유사한 내용이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개혁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도 그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할 때 인간이 임시적으로 창조되어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주시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가르치므로 발트 신학에 귀결하도록 개진하였다. 이런 신학적 귀결들은 행위 언약의 잘못된 설정헤 기인한다.”(서철원, 하나님의 구속경륜, 14)

서철원 박사의 지도하에 칼 바르트 신학을 비판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얻은 나의 사랑하는 친구 고경태 목사도 아담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으로 창조되었고 영생을 위해 반드시 존재의 격상이 필요했다고 이해하는 청교도 신학의 아담 창조 사상을 수용했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가령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무죄한 상태로 영생하기 때문에 영생할 수 있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최종 목표는 창조된 상태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갖게 될 부활한 상태 이름이 영생이고 최종 목표이다.”(고경태 목사)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 성경에서 벗어나고 신앙이 성경대로 짜여 질 수 없다.  청교도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다수가 아담이 불완전하고 임시적인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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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