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크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뉜다. 여기서 ‘승’은 사람을 미혹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가 주는 ‘탈 것’을 의미한다. 소승불교가 석가의 가르침인 원시불교를 토대로 하는 반면에, 대승불교는 석가 사후 수백 년이 지나고 새로운 경전이 만들어지며 신흥 불교로 일어났다. 여기에는 석가의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론’이 학자들 사이에서 주장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여러가지 면에서 기독교와 흡사하다. 대일여래나 아미타불 등과 같은 신적 존재를 믿는다. 인간의 죄 문제를 강하게 인식하면서 멸죄 사상을 칭송하는 ‘참회멸죄사’라는 것도 생기게 되었다. 정토 혹은 불국토라는 천국과 같은 개념의 사후 세계관도 있다.

대승불교는 누구든지 '남무아미타불'을 외우면 정토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남무는 ‘귀의한다’ 또는 ‘믿는다’는 뜻이고 '아미타불'은 신적 존재다. 즉 신적 존재인 아미타불을 믿고 귀의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기독교의 구원신앙과 유사하다. 불교사의 권위자인 알티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교리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 불교는 카슈밀이나 네팔에서 전례된 것으로, 아미타불 사상은 당시 그 지방에 영향을 주었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승불교의 말법(末法) 사상에는 미륵이라는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있다. 석가의 가르침이 실행되지 않는 혼란한 말법 시대의 어느날 미륵이라는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해서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의 신앙과 유사하다. 불교사의 권위자인 A. E. 골든에 의하면, “인도어로 ‘마이트레야’, 중국어로 ‘미르어’, 한국어로 ‘미륵’은,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다.”

대승불교는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석가를 신격화해서 섬긴다. 그들이 섬기는 석가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죄인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이 되어 오셨던 예수님과 고스란히 닮았다. 법화경에 의하면, “사람들은 석가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가는 영원 전에 이미 부처가 되었다. 그럼 왜 세상에 태어나서 수행했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인도의 유명한 종교학자 아만드 샤에 의하면, “대승불교는 그리스도의 사도인 도마의 복음에 대항하기 위해서 석가를 성인에서 구세주로 승격시켰다.“ 즉 석가를 신격화해서 영원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석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기독교에 밀리지 않기 위해 기독교의 예수님을 모방했다는 말이다. 대승불교의 조상이라 불리는 용수(AD 150년~250년경)는 금강보살로부터 ‘관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으로 이전의 불교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용수가 받았다는 관정도 기독교의 세례와 유사한 모습이다.

유신 사상(하나님), 정토 사상(천국), 멸죄 사상(구원), 미륵보살 사상(구세주), 관정 의식(세례) 등은 석가의 가르침인 원시불교에는 없었던 것으로 몇 백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혹자는 기독교가 불교의 표절종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증언했다시피 오히려 그 반대다.

기독교의 메시야 사상은 메시야가 오시기 훨씬 이전인 구약시대부터 있어 왔다. BC 500년 대 70년 간 유대인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포로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교류했던 동방나라들이 그들의 메시야 사상을 배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 그 당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불교도 기독교 신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진리에 가까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전혀 아니다. 그들이 부르고 의지하는 대상은 창조주와 구원주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 석가모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숭배를 인간에게 하고 있으니 당연히 사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철은 1987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와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

성철은 1989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는 급기야 이렇게 말했다.

“천상천하에 독존 무비한 부처님의 처소는 험악하고도 무서운 저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모시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 중생계가 한이 없으니 부처님의 지옥생활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부처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받기 위해서 스스로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성경말씀을 그대로 닮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이시므로 삼일만에 부활해서 다시 하늘로 승천하셨다. 반면 지옥에 간 부처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처지도 아니고 구원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사탄의 거짓말을 따랐던 죄로 모두 함께 영원토록 고통받을 뿐이다.

성철은 1993년 11월 다음과 같은 열반 송을 남기고 죽었다.

“나는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다.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성철은 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들 중에서 불심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섬기는 부처를 사탄이라고 했으며, 그가 지옥에 있다고 했으며, 자신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죽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영안이 열려서 진실을 보고 진리를 말한 것처럼, 불교란 지옥에 있는 부처를 믿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거짓되고 허탄한 종교다.

불교가 신성시하는 것으로 사리가 있다. 수행이 높은 스님들의 몸에서만 나온다고 알려지는 사리는 그것의 많고 적음으로 수행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알려져왔다. 의학자들은 사리가 몸속의 결석이나 담석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분석은 할 수 없었다. 사리가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에서 사리를 신성시하여 내주지 않아서 그것의 성분을 분석할 기회가 없었던 때문이다.

불전에 의하면 석가는 화장 후 8말 8되나 되는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1993년 11월 4일 성철이 사망했을 때도 사리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는데 과연 그에게서도 2백여 과의 사리가 나오며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불과 두 달 후 경남 고성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조기순 할머니의 몸에서 성철스님보다 훨씬 많은 4백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해 바보라고 따돌림받으며 무종교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비불교인에게서 그렇게 많은 사리가 나오면서 사리에 대한 불교의 환상은 깨어지게 되었다.

불교가 신성시하는 여러가지 재 의식들이 있는데, 그 중에 죽은 이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49재가 있다. 석가 자신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으며 참선하는 스님들 대부분도 영혼이 없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세의 존재도 믿지 않을 것인데, 그러면서도 49재를 치뤄준다. 부모님이 극락에만 갈 수 있다면 모든 자녀들은 보통 백만원에서 수백만 원이 든다는 49재를 기꺼이 바치려고 할 것이다.

49재나 영산재 등이 죽은 자들을 위해 타인이 올리는 의식인데 반해, 예수재는 죽은 후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본인이 살아있을 때 미리 지내는 의식이다. 예수재를 지내는 이유는 죽은 후에 자식들이 자신을 위해 49제를 지낼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면서 항상 여섯 개의 세계를 돌아야 한다. 중생이 지은 죄업으로 가는 136 등급의 지옥 세계, 파율의 악업을 저지른 자들이 가는 굶주린 아귀 세계, 축생이 되어 가는 짐승 세계, 수라가 되어 가는 악귀 세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간 세계, 신들이 사는 극락 세계가 그것이다. 그런데 돈을 바쳐 재를 지내면 이런 무서운 세계들을 뛰어넘어서 구원받고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와 흡사한 로마가톨릭도 연옥이라는 비성경적 교리를 만들어내어 산자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외에도 대부분의 종교가 유사한 것을 말한다. 죽은 자가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는 자녀뿐 아니라 성직자들의 기도가 유효하다. 성직자는 기도해주는 댓가로 돈을 받는다. 텔레트 의식이나 구르유미 의식 등의 장례의식은 매우 비싼 것이었다. 앨런 윌킨슨에 의하면, “성직자들은 장례의식을 위해 많은 비용을 치르도록 유도했으며 생필품도 겨우 구할 정도의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한 의식에 드는 비용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불교의 일반적인 종교행위로 재수 불공, 치유 불공, 생남 불공, 부적 등이 있다. 부적을 구입한 출처를 조사해 보았더니 점쟁이나 무당이 30%인데 비해 암자가 45%였다고 한다. 또 불교신자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적을 지닌 사람이 1,852명으로 전체의 2/3에 가까운 숫자였다고 한다. 지금도 절에서는 왕생정토부, 금강부, 존제부, 관음부, 염불부, 당득견불부, 구도부 등 수많은 종류의 부적이 판매되고 있다.

불교의 근본 교리는 무구소욕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욕심이 없어야 한다. 불교는 바른 깨달음으로 자아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하므로 원래 불공 의식도 없었다. 이런 불교가 국가적으로는 호국불교로, 개인적으로는 기복불교로 변해 버렸다.

모든 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야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불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변할 수 없다. 성경은 천 여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이 40여명의 사람들을 통해 친히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므로 한 문장도 가감할 수 없는 완전한 진리다.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잘 지킬 수 없다고 해서 한 부분을 빼거나 더할 수 없다. 작은 무엇이라도 빠지거나 더해진다면 겉모습은 비슷할 지라도 이단이 되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이 된다.

한편 불경은 계속 추가되면서 서로 모순된 내용을 갖는다. 불경에 나오는 열반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 모든 것이 꺼져버린 것같은 공 세계라고도 주장하고, 환희와 기쁨의 세계라고도 주장한다. 성불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서로 다르다. 어떤 불경에는 사람이 부처가 되리라고 결심하고 나서 성불까지 걸리는 시간이 ‘삼아승기백대겁’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불경에는 단지 ‘3겁’(1겁은 43억 2천만년)이라고 기록되었다. 극락에 대한 가르침도 서로 다르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극락과 원각경에서 말하는 극락이 다르다.

무엇보다 불경은 너무나 많아서 평생 불교를 연구한 학자라도 다 읽을 수 없다. 불경은 부처가 45년간 설법한 것을 제자들이 구술해서 4차에 걸쳐서 결집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경전들이1885년 일본에서 출판되었는데, 경장(교법)의 대장경이 8,537권, 소장경이 778권, 율장(계율)의 대장경이 2,290권, 논장이 545권, 잡부들이 4,923권이었다.

이렇게 많은 불경의 내용이 서로 다른 이유는, 석가 자신의 생각이 이리저리 변했거나 또는 제자들이 각자 자기의 생각을 첨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쨋든 불경은 한낱 인간의 깨달음과 소견을 말한 것이므로 구원받고 생명주는 진리를 가르쳐줄 수 없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지고 그것을 묘사하는 장님들처럼 각자가 설명해주는 것이 다르다. 과연 그것을 다 결합하면 코끼리의 모습을 완성할 수 있을까? 그럴수록 점점 더 기괴한 짐승이 만들어질 뿐이다.

내 주변의 불교인 친구들은 불교의 허망하고 모순된 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죄짓지 않고 선행하며 살도록 노력하면서 마음에 평강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마음에 평강이 있는 이유는 도피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죄로 곪아진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여 보지않고 진통제를 먹어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주 하나님을 거절하고 혼자 힘으로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가르쳐준대로 아무리 수행하고 명상하고 염불하고 절하고 공양하고 재를 지내고 부적을 지녀도, 죄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강을 가질 수 없고 극락이든 천국이든 당연히 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꽃이 다양하듯이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리를 전하신다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진리가 있다며, 종교화합을 지지하는 장로님과 집사님과 심지어는 목사님들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도무지 모르고 믿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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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