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위치한 산티아고가 순례길로 유명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면서 주목받게 된 이곳은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기까지 했다. 이후 이곳은 가톨릭 신도들은 물론 종교에 상관없이, 삶을 성찰하고 진리를 알고 자신을 찾기 원하는 사람들의 로망이 되었다고 한다.

순례자들이 지나는 이 길에 불교문화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9만여평의 부지에 법당, 부도탑, 정원, 불교유물 전시관이 들어서고 40미터의 대형불상이 들어선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적지에 불교 시설을 추가해서 이곳을 세계인들의 영성 탐구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의 기대하는 바다.

세계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화합이 있어야 한다면서 종교들 간에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어 왔다. 종교들이 어떤 모양으로 화합하고 혼합하더라도, 기독교는 홀로 거룩(separated)해야 한다. 그것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유일한 진리로서 한 가지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벽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진리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진리를 따라갈 수 있는 어리석고 나약하고 죄악된 존재로 본다.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타력종교’라고 불리운다. 반면, 불교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깨달은 것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해탈하고 스스로 구원하므로 ‘자력종교’라고 불리운다.

사탄은 피조물에게 다가와서 창조주처럼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이후에도 사탄에게 미혹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진리는 팽개쳐버린 채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고 선악을 분별하겠다며 불교와 같은 종교를 만들어냈다. 세상은 자신을 만드시고 가르치시고 복주시고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생각하고, 불교나 불교와 혼합된 뉴에이지같은 자력종교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다음은 과거 스님이었던 목사님이 밝혀준 불교에 관한 진실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그것의 자체 모순과 부조리를 드러낸다.

불교의 교주는 기원전 6세기 경 살았던 석가라고 알려진다. 그는 인생의 생로병사에 깊은 회의를 갖고 질문하며 수행한 결과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깨달음을 기초로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불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졌다. 불교는 석가가 깨달은 사상을 배우고 따르는 종교이자 또한 그처럼 부처가 되기 위한 종교다.

부처란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라, ‘(진리에) 눈뜬 사람’이라는 뜻으로 존경받는 한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다. 석가도 자신을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자처했다. 그의 제자인 박카리가 스승에게 예배드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예배받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은 단지 ‘깨달은 사람’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불교는 신적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으로서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가까운 사상이다.

불교 수행의 최고 목표는 부처가 되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인데, 열반은 해탈의 상태를 말한다.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탈하고 열반에 들어가고 부처가 되어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해답은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끈을 자르는 것이다. 법화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집착하는 마음’은 모든 욕구와 욕망인데 모든 욕구와 욕망을 버리면 고뇌가 사라진다고 한다. 가정생활을 영위하면 애정과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열반에 이를 수 없고 부처가 될 수 없으므로 출가주의를 가르친다. 출가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교가 추구하는 최고 선이 되는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다. ‘열반’이라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는 ‘꺼져버린 상태’라는 뜻이다. 마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열반은 거센 바람에 의해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과 같다.

어느 날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 만한 실마리가 그대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즉 열반은 윤회라는 생존의 틀 밖으로 나간 것이므로 열반에 들어간 자가 존재하는가(살아있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죽었는가)라고 물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열반이란 윤회와 분리된 상태로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석가가 가르친 열반의 본래 의미다.

무아(無我), 무상(無常), 공(空)이라는 세계관을 갖는 불교는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욕구를 버리라고 가르친다. 선에 관심을 갖지 말고 선을 행하지도 말라는 말과도 같다. 이와 관련해서 불교 지도자와 인도의 썬다 싱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불교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욕구라 해도 그것은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려 할 때도 (알던 모르던) 좋은 갚음을 받으려는 목적 의식이 있다.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때문이다. 인생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의 욕구는 거기에 따르는 갈망과 불만이 함께 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욕구도 사악과 한 가지로 제재해야 한다. 이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곧 열반이다.”

그의 말을 듣고 썬 다싱은 이렇게 말했다.

“사는 자가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욕구없이 살 수 없다. 욕구없이 존재한 자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생명없는 자일 것이다. 감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욕구가 일어난다. 영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야 말로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욕구를 완전히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도 죽여 버리는 일이 된다. 욕구를 제거하는 것은 파괴요 구원이 아니다. 만약 완전한 구원이 욕구를 버리는 것이라면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벌써 욕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하고 물을 말리려고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이처럼 불교가 추구하는 열반은 구원이 아니고 죽음과 멸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교는 바로 이런 것을 위해서 수행하며 일생을 바치고 있다. 그래서 불교계 안에서도 열반의 상태가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다른 해석을 말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 무(無)에 불과한 것이라는 해석과는 정 반대로, 열반에 대한 제2의 해석은 환희와 행복과 영생의 세상이다. 기독교의 천국 개념과 유사하다. 이런 식으로 불교는 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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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