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전염병’으로 인하여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를 하기에 한국교회도 교단과 중대형교회들은 ‘주일예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중형교회는 주일예배를 유튜브를 통해 동영상 설교하고 헌금은 계좌로 보내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예배인가를 논한다면 분명하게 절대 아니고 인본주의적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대형교회의 원조인 어느 교회의 ‘대응방안’은 바람직하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 상황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누구를 원망이나 비난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계기가 되고 기본적으로 예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첫 번째 본질로 생명처럼 소중한 예배이고 한번 중단된 예배는 쉽게 재개되기 힘들고 자칫 예배 중단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교회공동체가 와해되거나 회복이 힘들 정도로 약화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 교회의 입장은 매우 성경적이며 기독교 정통적이고 올바른 교회론과 예배학적 입장이지만 현실적 문제는 이 교회는 ‘크기(출석 신자들의 숫자)’로 인하여 아이러니하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의 크기가 왜 문제가 되는지에 유익한 글은 조직신학자 신광은이 쓴 <메가처치 논박>에서 다음과 같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크기가 무슨 상관이냐,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지,” 이 말을 달리 하면, ‘교회의 크기’와 ‘교회가 바로 서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조금 유식하게 말해서, 교회의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혹은 양은 빌과 무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워낙 대중적이어서 자명한 진리나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바로 이 그릇된 관념 때문에 메가처지를 비판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가 “교회가 커서 사랑이 없다, 권력과 재정이 집중된다, 기업화 되어 간다, 세속화 되어 간다”라고 비판하면, 이렇게 변명한다. “그것은 교회의 크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이럴게 대답하곤 한다. “복음이 올바로 전해재지 않기 때문에, 설교가 성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또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어도 크기가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메가처치의 변호사로 자처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꼭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작은 교회는 성서적인가?” 분명히 해 두자.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 (중략) ... 20세기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물질의 성장을 통해서만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려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물질주의와 성장주의는 성서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며,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이다. 모두가 성장하고 싶어한다. 학생은 공부를 더 잘하고 싶어하고, 정치인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고, 세일즈맨은 실적을 더 많이 올리고 싶어하고, 기업은 매출을 더 많이 늘리고 싶어하며, 국가는 경제 성장률을 더 높이고 싶어한다. 모두 다 성공하고 싶어 미쳐 돌아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교회도 더 크게 성장하고 싶어 난리다. 성장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욕망과 교회의 욕망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런데도 메가처치 교인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존하기 위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고,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변명해도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 교회가 기업과 똑같이 매출을 늘리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스스로 영적인 체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아, 어째서 교회는 아직도 자신이 바알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개닫지 못하는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

이러한 주장에 도움이 되는 글을 역사신학자 이상규도 ‘파라볼라노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다음과 같다.

“4세기 이전의 기독교회는 탄압받는 집단으로서 공개적인 회집이나, 전도, 증거가 불가능했고, 온전한 신자들만의 은밀한 예배와 교제를 나눌 뿐이었다. 그들은 공개되지 않는 곳에 모였고(행12;10-17), 공개적으로 전도하지도 않았다. 이브 콩갈(YvesCongar)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인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선교에 대한 저명한 연구가인 노버트 브록스(Norbert Brox)는 초대교회에 선교명령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즉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문헌 속에는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순교자였던 키프리안(Cyprian)은 그의 저서 <에드 큐리눔>(Ad Quirinum)에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 제3권에는 새 신자들을 위한 신앙생활에 필요한 120항의 거룩한 교훈을 담고 있는데, 형제들끼리 서로 도와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은 있지만, 전체 교훈 중에서 불신자들에게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의 구절은 단 하나도 없었다(Cyprian, Ad Quirinum, 3, preface, 9, 120.).

이처럼 전도하거나 증거 하는 일을 권면하지 않았던 것은 공개적인 증거가 불가능했고, 그럴 경우 심각한 희생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로마제국 하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순정한사랑의 실천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형상화했기에 그 실천적 사랑은 힘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한 결론은 ‘대형교회’는 절대로 성경적이고 기독교의 정통적인 참 교회가 아닌 철저하게 ‘인본주의적 교회’의 모습이다(대형교회는 일반적으로 성인 1000명 이상이고 중형교회는 성인 300명 이상이고 초대형교회는 성인 1만명 이상이고 한국교회의 90% 이상은 성인 100명 이하).

그래서 현재의 초대형교회부터 시작해서 행하는 교회 버스 운행, 위성 예배, 녹화된 설교 사용, 이웃 초청 잔치, 유명인 간증 집회, 각종 프로그램 운영, 문화센터 운영, 지성전 운영 등은 분명하게 성경적이고 정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닌 철저하게 인본주의적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적 행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밀라노 협약(주후 313년) 이전의 초기교회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목사와 출석 신자 간에 인격적 관계(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 인원이 150명)가 되고 ‘바른 목회’가 가능하다. 즉 부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가 신자와 인격적 관계로 하는 것이 목회라 할 수 있기에 신학대학의 ‘목회학’ 강의에서도 1개의 교회에 1명의 목사와 100명 신자를 논한다.

그러나 중대형교회는 신자 숫자가 많기에 목사와 신자, 신자와 신자 간에 인격적 관계가 불가능하여 주일예배도 ‘극장식 예배(비인격적 관계)’가 된다. 그리고 작은교회(성인 100명 이하이고 사실상 평균은 50명 이하)에 비해서 신자 수가 많아서 ‘전염병’에 더 위험이 크기에 ‘주일예배’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천주교 236년만에 ‘일제 셧다운’한다고 하는데 정부 요청에도 대형교회 66% “주일 예배 중단 안한다”, 일각에선 교회 예산이 주일예배 헌금으로 마련되기 때문 해석도 나오는 것”이라는 기사 내용에 중대형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반성하여 예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칼뱅은 “교회의 우수성은 다수로 구성되지 않고 순결에 있다.”와 미국 칼빈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였고 역사학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은 교회>의 저자인 루스 터커는 “교회의 존재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깊이다.”라 한 표현은 의미심장하고 칼뱅이 말한 ‘순결’과 투커가 말한 ‘깊이’는 바른 설교와 바른 성례전이고 세상 가치관(“숫자가 진리를 앞선다.”)에 물든 목사와 신자들이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성인 2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는 반드시 ‘분립 개척 선교(출석 신자들을 작은 교회로 파송 또는 부목사나 목사를 청빙하여 출석 신자들과 함께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를 하는 것이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섬기는 실제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위기’는 한국교회에 ‘기회’가 되기에 중대형교회부터 교회 성장(Church Growth)을 추구한 것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여 현재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비만’을 다이어트를 하여 ‘건강한 교회(Church Health)’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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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