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전염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다. 이러한 이유는 전국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하지 않는 교회가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전망’이 되고 최근에 주일 예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논쟁’인 것을 볼 수 있고 주일 예배를 하는 교회의 신자는 두려움과 고민을 하며 참여할 것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대구에서 제일 큰 교회가 2주간 주일 예배를 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 대한 ‘반응’이 다양한데 어느 댓글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배의 소중함을 모르는인간들 초대교회사 공부만 해보면 알텐데 ㅉㅉ 무식이들”이라는 글을 작성한 자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신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데 ‘기독교의 역사’를 잘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역사에서 ‘전염병’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본다면 역사신학자 이상규는 ‘파라볼라노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성경에는 언급이 없으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중요한 한 가지 칭호가 있었다. 그것이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였다(F. L. Cross andE. 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Univ. Press, 1977), 1029-30.). 그 의미는 ‘위험을 무릎 쓰는 자’라는 뜻이다.

251년 말에는 엄청난 전염병이 유행했다. 이때는 데시우스의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에 의해 희생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병은 종교에 상관없이 수많은 이들의 인명을 앗아갔다. 부유한 이교도들은 달아났으며 전염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다녔다. 도시에는 죽은 이들의 시체가 쌓이고 있었다.

키프리안의 전기 작가인 폰티우스에 따르면 키프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저들의 소명에 신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Pontius,Vita Cypriani, 9.)

키프리안의 설교는 전염병이 돌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었다. 키프리안은 마태복음 5:43-48의 말씀을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 속에 적용하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과는 다르게 행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최근에 자신들을 핍박하던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동료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실천했다. 이들에게 영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파라볼라노이’였다. 감염될 위험 앞에서도 병든 이를 돌보았던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했고, 이 위기상황을 통과하면서 이교도들은 기꺼이 신자가 되기를 자청하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와는 달리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Rodney Stark, TheRise of Christianity, 81ff. 26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있었던 이와 유사한 사건에 관해서는 Eusebius,HE 7.22.2-10을 보라.).”

그리고 역사신학자 옥성득도 ‘전염병과 신앙’에서 “초대교회와 전염병 - 시리아에 출병했던 군인들이 가지고 온 천연두로 인해 로마 제국 내 500만 명이 죽어간 안토니우스의 전염병(Antonine Plague, 165–180 AD) 때, 초대 교회는 환자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돌보았고, 그 결과 교회는 성장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키프리아누스의 전염병(Plague of Cyprian, 251–266 AD)은 접촉을 통해 전염되면서 치사율 50%를 기록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로마 제국의 관리나 부자는 전염병이 유행하면 감염자를 피해 도시를 떠났다. 기독교 공동체만 뒤에 남아서 서로를 돌보며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사랑으로 간호했다. 예수께서 나환자를 돌보며 고치신 길을 따라갔다. 결국 많은 교인들이 천국의 소망을 안고 함께 죽었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하게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교회 신자들의 ‘전염병’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파라볼라노이(위험을 무릎 쓰는 자)’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모여 ‘주일 예배’를 하고 예배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성찬식’도 하였다는 것은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에서 알 수 있고 이러한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깊이가 있게 ‘신앙적 사고’로 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 전염병이 엄청난 영향을 주기 전에 중대형교회 목사와 실천신학자의 ‘설교’에서 전염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면서 중국의 기독교 탄압, 한국의 간통죄 폐지 등이 문제라 하는데 지금 일어난 한국의 엄청난 전염병을 무엇이라 할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의 전염병을 구약에서 논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보는 관점이 있는데 정식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성경 해석학’은 신약으로 구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구약학자 페일스(화란 아펠도른신학대학교 교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신약에서 일시적으로 분리가 되는 것, 심판적 구원이 일시적으로 분리가 되는 것을 신약에서 발견합니다. 더 이상 심판과 구원이 하나의 행동으로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원의 복음이 있고 이때는 구원 받을 만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연약함을 고치는 자로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다른 면으로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으로 끝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심판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임할 것이고 그다음에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요한아, 네가 맞다 내가 고치고 있는 이 사람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게 하는 이 구원의 일을 보아라.”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심판에 대해서는 다음에 할 것이다 심판이 아직 아니라는 것을 다음에 알 것이지만 그러나 내 생전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자면 이사야 61장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지금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내 자신이 그 보복에 나를 희생의 제물로 드리겠고 그리고 모든 악인에 대한 보복은 마지막 날에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을 간단하게 바른 이해로 논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면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방법이 심판이었고 참고로 ‘구약의 영적 원리’는 죄, 심판, 회개, 구원의 ‘반복의 원리’지만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사 61장)’가 선포되어 일시적 분리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최후 심판으로 ‘영벌’을 받는다는 것이다(마 25:31-46; 계 20:11-15).

그래서 구약학자 박유미(총신대학교 구약학박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바르게 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는 질병이나 태풍이나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나 심지어는 인간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대형 사고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경솔하게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나 자연재해나 질병에 대해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대부터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라고 생각하며 이를 잠재우기 위해 제사하고 제물을 드리는 등 다양한 종교 행위들을 했다. 인간의 종교는 이런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성격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폭력적인 무서움에 두려워하며 굴복하고 굴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원이 있다. 기독교인은 비록 죄인이고 부족하지만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신 놀랍고 믿을 수 없는 사랑에 감격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은 재앙을 내려 두려움으로 인간을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 모두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무한한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심각한 질병이 있거나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고 말하며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우리가 배우고 알던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 미신적 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의 고난의 현실에서 율법 신앙과 번영 신앙이 지배하고 비성경적인 중대형교회를 추구한 한국교회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눅 13:4-5).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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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