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14): 2부의 조나단 에드워즈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청교도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의 신앙이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2부 3장(제목: ‘후기 개혁주의 전통)에서 소개되는 첫 번째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신 교수의 책과 종교개혁 신학 연구에서 자주 등장하는 다음의 용어들을 독자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자주 나온다.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개신교 스콜라주의(Reformed Scholasticism)
후기 개혁주의(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

1)개신교 정통주의는 칼빈 사후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들 속에 자리 잡은 칼빈의 신학이 자리잡는 과정과 관련된 용어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치열하고 뜨거운 교리 논쟁이었고, 종교개혁 신학이 문서화되어진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교리 논쟁과 신학 연구에 지친 사람들이 독일을 중심으로 신앙의 실천과 체험을 추구하는 경건주의(Pietism)를 일으켰다. 

이 무렵에 확립된 신학을 '정통신학'이라고 하고, 정통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들을 ‘정통교회’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이단대책하는 분들이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주요 5개 교단, 즉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에다 이 개념을 적용한다. 5대 교단에 속하지 않으면 정통교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여 거짓 방언과 추가적 성령의 세례를 추구하는 교회들, 그리고 WCC를 지지하고, 천주교와 교류하고,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믿음)이고 완성은 사람의 성화로 이루어진다는 행위구원론을 수용하는 교회들, 관상기도-영성 사상을 수용하는 교회들과 그런 목회자들은 정통교회, 정통신학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복음주의(자)라고 하면서 누구나 다 정통이라고 한다.   

개신교 정통주의 때부터 이미 심각한 문제가 잉태되었다. 종교개혁 교회들 속에 자리 잡은 신학이 과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일치하는가에 관한 논란이 일어났다. 가장 빈번하게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회중파 청교도들과 장로교 청교도들이 전체 영국에 하나의 개혁된 교회를 세우려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품고 만든 웨민고백서 7, 19장에 기술되어 있는 회중파의 핵심 사상 행위언약이다. 그리고 장로파와 완전히 결별하고 제 길로 간 회중파 청교도들이 그 이후에 만든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1658) 11장에서 공식적으로 기술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정통교회의 정통신학으로 자리 잡은 많은 교리들 가운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상이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논란이 진즉 일어났다. 

신사도 운동을 일으킨 플러신학교의 교수 피터 와그너와 기독교 신학의 배교의 분야에서 두개의 수레바퀴라고 일컫어지는 학자가 미국의 칼빈신학교에도 있었다. 그는 리차드 멀러(Richard A. Muller, 1948- )라는 사람이었는데,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부터 현재의 개혁신학의 교리들이 모두 같은 내용의 신학이라고 주장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사실 그 분의 신학의 성장 과정을 보면, 개혁신학을 잘 배우고 훈련 받았다고 인정할 만한 사실이 없다. 그런 사람이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칼빈신학교를 대표하는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칼빈신학교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례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칼빈신학교와 이 학교를 운영하는 CRC 교단은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계승하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성안수를 진즉 허용했고, 오순절 운동이나 WCC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천주교의 세례와 자신들의 세례의 의미가 같다고 확인하는 세례협정문도 이미 오래전에 맺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미국의 개혁 교단들의 모임에서도 회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칼빈신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멀러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박영돈(고신 은퇴), 김병훈(합신), 김은수, 안상혁(합신), 이성호, 임원택, 한병수, 우병훈(고신), 박재은 등이 활동하고 있다.

2)개신교 스콜라주의라는 말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수행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스콜라주의는 원래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중세 천주교 신학자들의 신학의 방법이었다. 중세의 천주교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인간의 이성의 사유와 사색이 중세 천주교 신학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중세의 명상 신비주의와 이성의 사색을 중시하는 스콜라주의를 배격했다. 칼빈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에만 근거하는 신학을 추구했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내용을 사색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기독교강요, 1.21.13)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더욱이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1.4.14)

그러나 칼빈 사후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를 이끌었던 신학자들은 다시 중세 천주교의 신학 방법 스콜라주의를 도입했다. 천주교 신학자들처럼 이성의 사유와 추론을 신학의 수단으로 삼는 개신교 스콜라주의를 형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행위언약'과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들이다. 이런 교리들을 지지하는 가르침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청교도 선후배들이 떼로 합창하였으나, 그들 가운데서 행위언약과 능동순종의 성경적 근거를 찾아 설명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먼저 한 사람이 그것을 말하면 뒷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강력한 신념이 되었고, 마치 앵무새들이 된 것처럼 똑 같은 소리를 반복하였다. 

3)후기 개혁주의라는 말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리차드 멀러와 그 제자들이 더욱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인 것 같고, 칼빈 사후부터 시작된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부터 형성된 개혁신학의 흐름을 의미하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을 계승한 그의 후계자 데오도르 베자, 또는 베자에게서 배운 잉글랜드 회중파 청교도의 조상 윌리엄 퍼킨스 등의 인물로부터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인데, 신호섭 교수는 1703년에 신대륙에서 출생한 대표적인 회중파 청교도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능동순종 개념을 소개하였다. 이미 그 이전의 인물들의 능동순종 사상을 앞에서 소개하였기 때문인 모양이다.
 

뉴잉글랜드에서 피어난 이단의 꽃 조나단 에드워즈

에드워즈의 능동순종 사상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다. 에드워즈는 이만희가 한국 교회에 미친 악영향보다 그 당시 뉴잉글랜드와 이후 전 세계의 교회에 훨씬 더 심각하고 영구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이만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불과 10-20만에 불과하다. 나머지 5천만 이상의 불신자 국민들과 교회 출석 국민들은 이만희를 욕하고 싫어한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이단의 꽃 에드워즈를 싫어하고 경계하는 불신자 국민들과 교회 출석자 국민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수년 전 KBS 방송 9시 뉴스는 에즈워즈의 집안을 미국의 위대한 가문으로 소개하기도 했으니, 에드워즈의 거짓 복음이 미치는 엄청난 영향은 이만희 정도와 비교할 일이 아니다.

필자의 말로 에드워즈의 신학이 교회를 죽이는 신학이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며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에드워즈를 아름답게 소개한 대표적인 연구자 양낙홍 교수의 470 페이지 분량의 에드워즈 연구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부흥과개혁사, 2017)의 마지막 470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구원론으로서보다 성화론의 교과서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인과 한국 교회에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될 것이요 하나님의 교회에 새로운 위대한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양낙홍 교수)

위 내용은 양낙홍 교수가 470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의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를 마치면서 마지막 페이지에다 쓴 마지막 문장이다. 양 교수는 에드워즈의 구원론이 잘못되었다고 보았고, 그의 구원론을 우리가 성화에 적용한다면 큰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구원론이 비성경적이면 당연히 칭의론도 비성경적이었을 것이다. 

에드워즈 세미나를 열고자 애쓰는 정부홍 목사는 최근 뉴욕 목사회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에드워즈가 칭의를 하나님의 선언을 넘어 실제로 완전하게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그리고 어떤 면에서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고 에드워즈가 가르쳤다고 강의하여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에드워즈의 칭의론에 그 정도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양 교수가 에드워즈의 구원론을 성화에 적용하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실질적으로 신인협력구원론 또는 구원을 위한 사람의 중대한 역할을 가르쳤으므로 나오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에드워즈 신학이 이단적이었다고 평가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에드워즈의 구원론을 성화에다 바꾸어 적용해야 한다고 양 교수가 마무리하였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 에드워즈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으므로 양 교수 자신도 편하게 살고자 그리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전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적각성을 일으키신다고 가르쳤다. 영적각성이 일어나면,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영혼의 비참함을 깨닫고 부지런히 구원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청교도 회심준비론에 절어서 목회하였다.

에드워즈가 자신의 거짓 부흥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놀라운 회심이야기>를 보면 전부다 그런 내용들이다. 먼저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여 영적각성이 일어나게 되면, 아직 죽은 영혼의 사람이지만 자기의 불행한 영혼의 운명을 깨닫고 구원을 얻기 위해 스스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목회자(청교도들은 영혼의 의사라고 했음)에게 찾아가 신앙과 구원에 대해 상담하고, 고넬료처럼 자선활동에 힘쓰면서 구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구원을 준비한다고 에드워즈는 가르쳤다. 구원 받지 못한 불신자가 자신을 준비시키면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실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이상웅 교수의 총신대 박사논문의 출판물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부흥과 개혁자, 2009) 242 페이지에는 다음과 내용이 나온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증하지 않지만, 구원에 이를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호세아 6장 3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은 부지런히 그리고 항상 그리고 끈질지게 회심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통상적으로 성공을 약속하신다.’라고 말한다 ... 이 주제와 관련된 50편 이상의 설교들을 연구해 본 존 거스트너는 22편 이상의 설교 가운데서 에드워즈는 (구원의) 추구 결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고한 것을 볼 때, 에드워즈가 회심의 추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 알 수 있다.”(242 페이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한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나오는가? 에드워드는 구원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 짧게는 몇주 길게는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런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은 알미니안주의에서 가능한 이론이고 천주교에서 지금도 가르치는 사상인데, 왜 한국의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에드워즈를 역사상 최고의 지성과 영성을 가진 신학자였다고 각색하고 숭배하기만 했을까?

양낙홍 교수의 제안대로 에드워즈의 구원론을 성화 분야에 바꾸어 적용한다고 하자. 그러면 에드워즈의 성화론을 어디로 보내야 할까? 에드워즈의 성화론은 괴상한 성령신비주의였다. 에드워즈가 성화를 칭의와 함께 시작되어 일평생 지속된다고 본 것은 좋았으나, 괴상한 성령의 임재를 ‘신적인 빛’이라고 부르면서 그 자체가 성화를 증진시킨다고 가르쳤던 것은 이단 사상이었다. 괴상한 성령이 임재하여 사람을 눕게하고, 몽롱하게 하고,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그의 주변에서 많이 벌어졌다. 오늘 날의 신사도 사이비들의 집회에서 벌어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는 현상들이었다. 에드워즈는 그런 것을 제일 강렬하게 체험한 자기 부인을 최고로 성화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이런 성화론이 성경적이고 정상인가?

에드워즈의 제일 심각한 점은 성령론이었다. 그의 성령론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자리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해 죄 용서 받은 신자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처로 삼으심이 곧 성령강림-성령세례라는 라는 사실을 설명하여야 정상적인 성령론이다. 에드워즈를 괜히 뉴잉글랜드의 이단의 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기능이 빠지면 성령은 귀신이 된다. 에드워즈에게는 성령이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한다는 핵심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의 성령은 귀신이었다. 그의 귀신들은 자주 하늘에서 강림하여 부흥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 귀신들의 역사로 울고, 쓰러지고, 황홀함을 느끼고 ... 결국 뉴잉글랜드에 귀신의 열매가 가득해졌다.

에드워즈는 이런 문제를 바로 잡겠다고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을 썼는데, 문제는 그런 귀신들을 불러들인 원흉이 바로 자신이라는 고백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는데, 귀신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의 <신앙감정론>은 그런 차원에서 쓰여진 작품이었는데, 한국의 에드워즈 우상교 신자들은 <신앙감정론>도 좋은 책이라고 아우성이다. 에드워즈를 연구한 탁월한 역사학자 조지 마스덴은 에드워즈의「신앙감정론」이 출판될 무렵 에드워즈의 대각성으로 인해 뉴잉글랜드 사회와 교회가 이렇게 망하였다고 설명했다.

“특별히 뉴잉글랜드의 교회의 상황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각성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은 교회들을 분열시켰다. 사람들은 목회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경멸했다.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신앙훈련은 무너졌다. 거짓된 신자들(광신자들)은 사탄이 만들어 낸 거짓된 속임수들에 열광하였다. 사람들은 참된 경건한 신앙을 멸시하였다. 모든 종류의 사악한 죄악들이 최고조에 이르렀다.”(George M.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247)

에드워즈를 괜히 뉴잉글랜드에서 피어난 이단의 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치면 이용도 같은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숲에 가서 명상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보고, 삼위일체를 눈으로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신비주의, 즉 귀신 역사로 신인합일의 영성을 구현하는 이단이었다. 에드워즈를 괜히 뉴일글랜드의 이단의 꽃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신호섭 교수는 대체 이런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자신의 능동순종 거짓 신학을 위해 인용하는 것인가. 어차피 거짓 신학이므로 거짓 부흥사(이단)을 이용하는 것인가? 신 교수는 에드워즈도 능동순종 사상을 가졌다고 다음과 같이 그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가 형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과 형벌을 받으셔야 하는 것처럼, 상급을 획득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셔야 할 필요성이 동일하게 제기된다 ... 우리가 상급을 취득하기 위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성취되어야 하며, 형벌을 면하기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정확히 동일하게 제기된다.”(에드워즈의 말/ 신 교수의 책 122)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도록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가 천국에 가도록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켰다는 에드워즈의 신학은 자신의 사변일 뿐이고, 그 앞의 청교도들에게서 들은 대로 앵무새 같은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가르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 확보하신 소극적 의의 목적은 죄책과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일뿐, 죄인에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수난은 의무로부터 구원하고 죄인을 무관심의 상태로 남겨 두지만, 그리스도의 적극적 의는 죄인에게 천국과 영생을 확보해 준다.”(에드워즈의 말/ 신 교수의 책 123)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영혼이 지옥에는 가지는 않으나 천국에 못가고 허공을 떠돌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의 존 오웬도 같은 주장을 했었는데, 에드워즈가 오웬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였던 것 같다. 이런 주장은 성경과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내용이다. 성경은 죄 없으시고 완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를 죄에 대한 배상으로 드리고 우리와 연합하시므로 우리를 의롭게 하였다고 가르친다.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6)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맺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서 피어난 가장 화려한 이단의 꽃이었다. 능동순종 신학이 비록 거짓 신학일지라도 그런 이단까지 끌어들여서 뭘 해보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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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