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목사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글 캡쳐 사진
김삼 목사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글 캡쳐 사진

오늘은 김 삼 목사가 2008년 11월 30일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평생의 필수도구, 방언"이라는 제목의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 삼 목사는 다음의 성경 구절로 자신의 글을 시작하였다. 

"나는 여러분들 모두보다 더 방언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코린토A서 14:18, 사역)

김 삼 목사와 이 글("평생의 필수도구, 방언")을 대표하는 성구로 올린 위 구절은 1906년의 아주사 거짓 부흥으로부터 시작된 현대의 거짓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짜 신령한 은사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 간단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1)위 구절의 ‘방언’이라는 단어는 어떤 나라의 실제 언어를 의미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2)위 구절의 ‘말하기’의 원래 단어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실제 언어로서 의사를 전달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결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문자적인 의미, 문맥에 맞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김 삼 목사가 위 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주장하는) 영언을 더 잘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안쓰러운 일이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김 삼 목사가 계속 이렇게 나아가면 스스로의 정신적 데미지가 심해질 것이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위 구절에서 바울은 노력하여 습득했을 수도 있고, 노력하지 않았으나 성령의 지배하심으로 인해 성령이 시키시는 때에만 성령이 주시는 대로 복음전파를 위한 외국어들을 구사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실제로 바울이 그리스어, 터어키어, 히브리어, 로마어를 잘 구사했고, 서바나(스페인)에 가고자 소원한 것으로 보아 스페인어도 구사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방언을 전적으로 오해한 많은 사람들이 행전의 방언은 버젓한 외국어였고 코린토 교회의 방언은 일시적 현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분이신 성령님도 헷갈리실(?) 만한 이원론적 발언이 아닐 수 없지요.”(김 삼 목사)

위 내용에서 김 삼 목사가 주장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같은 방언이었다는 것이다.  김 삼 목사는 성령이 사도행전에서는 사람이 알아듣는 방언을 주시고, 고린도전서에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주실 정도로 헷갈리는 분이 아니다는 식으로 말했다.  김 삼 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동일한 방언이고, 그 방언이 자신도 하고 있는 영언이라는 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 삼 목사는 현대의 영언은 사람이 뜻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마귀도 뜻을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 그 뜻을 아는 영적인 모로스 부호라고 이전의 글에서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사람과 마귀는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뜻을 아는 모로스 부호가 아니었다.

“And how hear we every man in our own tongue, wherein we were born?”(행 2:8, KJV)(어떻게 우리 모든 사람들이 태어난 (이방의) 나라들의 언어를 듣게 되는 것인가?)

사도행전 2:8절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을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였고 뜻도 다 알아들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날의 방언이 한 종류였으나 성령께서 여러 사람들이 태어난 나라들의 언어로 들려지도록 역사하셨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성령의 지배를 따라 여러 이방 나라들의 실제 언어들을 말하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가 맞던지 간에, 김 삼 목사는 앞으로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의 영언은 같은 영언이었고, 지금 자신도 그 영언을 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 삼 목사는 자신의 영언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지구상의 어디에 있는지 찾아오기 바란다. 

“마치 교회가 처음부터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양 냄새를 풍기지요. 그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왜 주셨겠냐는 식으로 현대 방언을 백안시하는데, 아니 방언이 모두 알아들어야 할 언어라면, 성령께서 왜 방언통역의 은사도 동시에 주셨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김 삼 목사)

“그밖에도 방언은 (특히 통역이 곁들여질 때) 완벽한 축복/감사의 도구이며(코린토A 14:16), 마귀 군대와의 싸움에서 극히 요긴한 영적인 전략무기이기도 합니다(엪 6:18b). 뿐만 아니라 방언은, 각양 은사를 끌어당기는 자석 또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행전을 읽어 보시고 오순절 이후 그렇게 돼 왔음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김 삼 목사)

김 삼 목사는 지금 자신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영언을 통역하는 성령의 은사도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김 삼 목사는 자신의 영언을 녹음하여 그것을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나서기 바란다. 합동으로부터 다시는 그런 주장을 하지 말라고 강력한 경고를 받은 책 <지렁이의 기도>의 저자 새물결 플러스의 김요한 대표는 자신이 아주 영언을 잘한다고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 영언을 녹음하여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경남 진주 인근의 어떤 교회의 사모에게서 통역을 받았고, 또 남원 인근의 어떤 교회의 사모에게서도 통역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통역이 서로 달랐고 그 내용들을 스스로 공개함으로 되려 많은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만 받았다. 

김 삼 목사도 속히 자신의 ‘엘렐레레 오오요세 신노리세 히잇빠빠 우알라스 센노리세 신노리끼’ ... 하는 유창한 영언을 녹음하여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기 바란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면, 새물결 플러스 김요한 대표에게 전화하면 잘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통역을 받으면 꼭 자신의 ‘진리와 사랑’이라는 블로그에 올려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천천히 느끼면 될 것이다. 

김 삼 목사는 영언이 다른 은사들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그만하기 바란다.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깨달아서 다시는 같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교회를 위해서 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런데 김 삼 목사는 방언이 열리면 그 다음에 환상, 예언 등의 은사들이 끌려온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도를 닦아서 조금씩 도통해 진다는 이방 종교인들의 사상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주장은 성경적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지 사이비 은사를 정상으로 여기는 계룡산 계열 신학교 또는 나 홀로 신학교에서 가능한 주장이다.

“방언은 일회용 체험이 아닌, 요즘의 필수품인 휴대폰처럼 평생 동반적 체험이어야 합니다. 까닭이 뭐냐고요?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유일한 도구로 성령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지요.”(김삼 목사)

최근 <바른믿음>의 방언에 대한 글들을 읽고 자신의 방언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는 어떤 분은 필자에게 “그러고 보니 제가 기도할 때는 하는 말들이 기껏 ‘주여!’ ‘아버지!’ ‘랄랄라라’ ...이것 뿐이더라구요. 그것을 깨닫고 이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짓 방언에 속아 많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저는 진정한 기도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그 분은 방언기도가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기도이기는커녕 진정한 기도의 은혜와 멀어지게 만드는 속임수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혹시 김 삼 목사의 영언기도는 다른가? 본인은 영언 기도를 통해 어떤 풍성한 은혜와 어떤 신비한 영의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아마도 몇몇 분들은 구약인들은 그럼 어떻게 영적 비밀을 아뢰었고 방언을 전혀 하시지 않은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 비밀을 고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인들과 달리 신약인들 즉 우리들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고하시고 보혜사님을 보내 주신 대로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김 삼 목사)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보자가 되시어 자기의 피로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구원의 새 언약을 성립시키신 것과 김 삼 목사의 영언은 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리스도는 영언의 문을 여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는가? 예수님 자신이 원보혜사이셨고, 자신이 떠나시면 성령께서 다른 보혜사로서 오신다고 하셨다. 원보혜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김 삼 목사가 미친듯이 주장하는 영언이라는 것을 전혀 하신 적이 없다. 원보혜사께서는 오직 자신이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스라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일상의 언어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런데 원보혜사를 대신하려고 오신 다른 보혜사가 원보혜사께서 알지도 못했던 영언기도를 전파하신다는 김 삼 목사의 주장은 어느 신학 계보에서 나오는 말인가? 계룡산 쪽인가? 속리산 쪽인가? 김 삼 목사는  영언을 강조하며 지금은 ‘신약시대’ ‘교회시대’ ‘성령시대’ ‘복음시대’ ‘은혜시대’라고 강조했는데, 사람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그 뜻을 안다는 영언의 시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인가?

“통탄스럽게도 이것은 칼뱅을 비롯한 중단론적 입장의 대 학자들이 요엘 예언의 문맥을 제대로 알아 잡지 못한 탓입니다. 요엘 예언은 분명히 ‘주님의 크고 영광스런 날’이 이르기 전, 지구 종말현상을 곁들임으로써 방언을 비롯한 말세현상은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행 2:16-21).”(김 삼 목사)

요엘이 말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만을 의미하는가? 그 날이 어느 때인지 간에,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이어진다는 김 삼 목사의 주장은 어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인가? 묘향산 쪽인가? 금강산 쪽인가? 방언은 사도행전에서 불과 3회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 방언이 계속 이어졌다는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레네우스, 크리소스 톰, 어거스틴의 글 속에서 방언이 그 이전 시대에는 있었으나 그들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하나님이 사도행전 이후 시대의 교회를 잘못 운영하신 것인가?

“개혁가를 비롯한 대 학자들, 그리고 현대의 중/소 학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방언은 중단된 것이 아니지요.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맨날 열심히 써 먹어야 할, 최대의 무기요 영적인 도구요 그 무엇보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으로 친교할 '무선통신', '모르스 부호' 격인 방편입니다.”(김 삼 목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모든 성도들이 맨날 써 먹어야 할 것이 영언기도라면, 지난 2천년 교회의 역사와 모든 뛰어난 인물들은 신앙은 허탕이었다는 것이다. 폴리갑, 이레네우스, 어거스틴, 쯔빙글리, 루터, 칼빈, 웨슬리 ... 대체 누가 영언을 했는가? 김 삼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헛탕을 넘어서 맹탕들이었다. 요즘 필자가 깊이 연구하는 청교도들, 퍼킨스, 에임스, 십스, 오웬, 백스터, 굿윈, 맨튼, 에드워즈 ... 대체 누가 김 삼 목사가 주장하는 영언을 했는가? 2천년 동안 없었던 거짓 방언이 한국의 계룡산 기도원 같은 곳들을 전전하였던 미국의 이단 윌리엄 세이모어를 통해 불과 110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들불 같이 번졌고, 그 불이 번지는 곳 마다 엄청난 신앙의 배교와 타락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솔직히 제가 묻겠습니다만, 코린토 교우들은 그래도 이교적 배경에서 처음 갓 개종한 뒤라 잘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방언의 존재와 유용성을 믿고 활용하기는커녕 배격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수준이 높습니까? 아니면 코린토 교우들처럼 방언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수준이 높습니까? 대답 좀 해 보시렵니까?”(김 삼 목사)

김 삼 목사는 거짓 방언 문제를 야기했던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이 심각한 이단들에 미혹되어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켰다는 사실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있다. 김 삼 목사는 사도 바울이 거짓 방언으로 교회를 망치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주님이 예언하신 대로 성령님은 지상에 강림하셨고, 특히 마르쿠스복음 16:17,18에 예언하신 대로 그 첫날부터 방언은 새 언약의 사람들 곧 신약인들의 중요한 예배도구로 활용돼 왔습니다. 더구나 쉬카르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예언 그대로 사마리아 사람들도 참 예배자의 행렬에 참여하게 됩니다(행 8:4-25). 이 기막힌 성취를 눈여겨보지 못한다면 실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김 삼 목사)

김 삼 목사는 다음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가복음 16:17절의 ‘새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방언 현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왜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 뱀을 집어도 해를 받지 않고 독약을 먹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무슨 뜻인가? 성도들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권위있는 많은 사본학 연구자들은 중요한 신약사본들 속에는 마가복음 16장 17,18절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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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