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올려주신 찰스 피니에 내용 잘 보았습니다. 주변의 청교도 파들이 찰스 피니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찰스 피니의 사상과 청교도-에드워즈의 사상은 완전히 다릅니까? 

 

<답변>
참 좋은 주제를 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둘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작업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유사성이 있어 보입니다. 

1. 알미니안 신학

찰스 피니의 펠라기우스-알미니안 사상을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1)아담의 원죄가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했고,
2)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죽으셨음을 부정했고,
3)하나님의 예정과 택자에게 미치는 불가항력적 은혜를 부정했고,
4)사람이 회개, 기도 등에 힘쓰면 성령도 역사한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주권을 부정했고
5)부흥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들면 부흥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찰스 피니가 미국과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 속으로 펠라기우스의 망령이 살아나게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에드워즈-청교도 파들이 찰스 피니를 비판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해주면,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강하게 반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와 청교도 파들도 일단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전적으로 표방하기 때문입니다. 에드워즈의 유명한 작품 <원죄론>(Original Sin,1658)도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으로 아담의 원죄와 우리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존 테일러(John Taylor)의 책에 대한 대응작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은 구원에 대한 알미니안 사상을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알미니안주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죄인을 향한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무시무시하게 전하면 사람이 ‘영적각성’을 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영적각성은 구원이 아니고 사람이 그때부터 자기의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 시작하고 노력하는 태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영적각성이 도래하면 가정 먼저 자신이 죄인이며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했음을 깨닫고 심히 슬퍼하기 시작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교회에 다니면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신앙에 대해 영혼의 의사인 목회자에게 상담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속한) 성령의 강권적인 회심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 그 자체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속했다고 하므로 칼빈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영적각성에 도달한 사람이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구원을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고 분투한다고 하므로 알미니안 신학의 핵심도 갖추었습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에드워즈-청교도 파들은 찰스 피니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인데, 회심준비론을 가정 정교하게 발전시킨 사람이 에드워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혹은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구원론 특히 회심론 부분에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청교도 구원론, 특히 청교도 회심론을 절정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에드워즈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종교감장론>은 이러한 청교도 회심론의 결저판이자 최종판입니다."(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 28)
 

2.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한 성령론

찰스 피니와 에드워즈-청교도 파들의 공통점인 비성경적인 성령론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올바른 성령 이해를 위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령을 능력이나 부흥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장 큰 실책입니다. 성부와 언제나 떨어지지 않으시는 성령, 성자와 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구약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다음의 말씀이 성취었을 의미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2:23)

성령이 오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으므로 부활하시어 원래의 계시던 곳으로 가신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 자신이 지상에서 십자가로 이루신 일들을 보고 하셨습니다(히 9:24). 십자가로 이루신 일, 구속을 지상의 신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자기를 대신할 성령을 자기의 이름으로 보내실 것을 아버지께 요청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어난 일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입니다.
 

1)성령강림

성령강림은 십자가의 구속을 적용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요청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지상에 보내신 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지상에 강림하신 성령은 처음 창조 때부터 일하신 성령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을 적용하시려고 오셨다는 차원에서 구약의 성령과는 기능과 역할에서 다른 분입니다. 신약의 성령은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적용하시려고 오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시어 '주의 영', '예수의 영', '예수'라고도 호칭됩니다. 

성령강림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성령론 정립을 위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들이 기도하여 성령강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흥을 열망하니까 하늘에서 성령이 부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단 한번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처럼, 성령이 그때 강림하고 나중에 제자들이 간절히 기도하니까 사도행전 4장에서 또 강림하고, 이후 시대마다 또는 새로운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갈 때마다 성령이 하늘에서 강림하였다고 가르치면 결국 거짓 성령신학으로 빠집니다. 모든 잘못된 성령신학은 그런 식으로 성령강림이 반복된다고 합니다.
 

2)성령세례

성령세례는 지상에 강림하신 성령이 믿는 사람들 각자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행 1:4), ‘약속하신 성령’(2:33)을 받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 받음’, “성령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에 관하여 잘못된 신학으로 빠지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성령세례가 반복된다고 합니다. 처음 예수 믿고 중생할 때의 성령의 역사와 이후 능력을 얻게 하는 성령의 임재의 역사를 구별하여 가르칩니다. 오순절-신사도 운동의 성령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의 성령론은 거의 동일한데, 오순절 운동은 성령세례를 내세우고 신사도 운동은 의도적으로 성령세례 개념을 기피하고 대신 성령의 기름부음을 내세웁니다.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나 그런 부류로 묶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조금 완곡한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그때 나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무슨 체험인지 물어보면, 결국 이런 것들입니다. 거짓 방언, 등줄기가 후끈해지고 이마에서 땀이 나는 온기 현상, 핑그르르 돌면서 쓰러지는 현상, 환상 같기도 상상 속의 그림 같기도 한 어떤 것이 보이는 현상, 이전의 죄들이 생각나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유별하게 고백하고 반성하는 현상,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광란의 현상 등입니다. 아주사 거짓부흥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성령세례(기름부음)의 전형적인 현상들입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괴이한 체험을 합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의 성령의 임재와 이후의 능력을 주는 별도의 성령의 임재(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구도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결국 성령을 왜곡하는 이단사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3)성령충만

성령충만은 성령세례가 이루어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령세례, 즉 성령이 임재한 사람은 동시에 성령충만해 집니다. 성령이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지배하시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즉시로 성령의 지배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의 지배하심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령이 오신 목적대로 실천하며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진리을 따라 예수 믿게 하시려고 성령이 곧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길은 진리의 말씀, 즉 성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없거나 성경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미혹의 영의 장난입니다. 성령은 오직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중시하지 않고 기도와 정성으로 성령충만을 얻는다는 것은 큰 속임수입니다. 이단들과 다른 종교인들도 영적인 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은 올바른 신학자들이 이미 정립하고 가르친 내용입니다. 서철원 박사님의 <성령신학>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장로교회들과 장로교 신학교들만이라도 이런 책을 중시하고 붙들었으면 한국 교회는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송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청구한 것이고, 구속 때문에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이고 다른 길이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없이는 성령의 파송과 강림은 전혀 불가능하다.”(서철원 박사, 성령신학, 88)

“성령은 그리스도와 분리하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그의 구속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되어 왔고, 그의 신인 위격을 통해서 오시게 되었다.”(서철원 박사, 성령신학, 89)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이미 담지 되었던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의 육체에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 계속해서 그의 거주를 확장하여 당일 3천명 남자에게로 확대하여 여자를 합치면 일만명 선에 이르렀다. 며칠 후 다시 성령의 거주는 확장되어 5천명의 남자를 추가하였으니 여자를 합치면 일만 오천명이 되어 며칠 내에 이만 오천 명에서 삼만명 선에 이르렀다. 성령의 거주의 확장은 모든 종족들에게 진행되어 역사 끝에 이르러서는 가장 큰 나라가 되어 인류의 다수를 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 성령은 인류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주거를 정하실 때 언제든지 예수 이름으로만 거주가 확정된다.”(서철원 박사, 성령신학, 96-97)

“성령 강림은 성령세례로 약속되었고(행 1:5), 아버지의 약속으로 지목되었는데(행 1:4), 성령충만으로 결과하였다. 성령세례의 약속이 성취되면 성령세례로 기술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충만(행 2:4, 9:17, 13:52)으로 묘사되고, 또 성령이 임하시는 것으로(행 1:8, 19:6), 하나님이 성령을 주심으로(행 5:32, 11:17, 15:9), 성령받음, 성령 내림으로(행 8:15-17, 10:44) 기록되었다.”(서철원 박사, 성령신학, 101)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성령강림과 성령세례가 이루어졌고, 성령강림은 우주적인 단회적 사건이고, 성령세례는 개인적인 단회적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참된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고, 만일 그 사람이 더욱 더 열심을 내며 성령에 대하여 주장하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성령파 무속인으로 단련되게 됩니다.   

 

찰스 피니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분리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 어느 날 숲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자신의 자서전에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강한 성령세례를 받았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한테서도 그런 일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는데, 정말 순간적으로 전혀 뜻 밖에 성령께서 나의 온 영혼과 몸을 관통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내게 임하셨다.”(찰스 피니, The Memoris of Charles G. Finney, 23. 박용규, <세계부흥운동사>, 436)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만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살아있는 어떤 사람을 보는 것과 꼭 같았다. 그 분은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를 자기 발 앞에 꺼꾸러뜨릴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그 분이 내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생생한 현실인 것 같았고 나는 그 분 발 앞에 엎드려서 그 분께 내 영혼을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울었고 비록 흐느끼는 음성으로나마 할 수 있는 대로 죄를 자백했다.”(임승안 교수(나사렛 대학의 총장)의 논문 “팔스 피니 입장에서 본 성령 은사의 지속성”)

찰스 피니의 이런 체험은 인정할 수 없는 거짓 체험이고 위험한 신비현상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오순절-신사도 운동에서 놀라운 성령세례 또는 기름부음의 은혜라면서 환영합니다. 
 

에드워즈와 청교도들도 성령에 대해 유사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명칭이나 표현이 달랐을 뿐입니다. 에드워즈가 찰스 피니처럼 숲에서 기도하다가 체험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 180-81)

에드워즈의 이 체험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입니다. 중세 신비주의 명상가들이 가장 중시했던 신인합일 신비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오순절-신사도 운동의 성령세례 또는 기름부음 체험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 시대에는 성령세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때이고, 찰스 피니 시대에는 성령세례 개념이 서서히 일어나는 초기였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령세례라는 말을 쓴 적이 없고 찰스 피니는 성령세례라고 한 것입니다. 후대의 사람인 찰스 피니의 신비적인 성령세례 사상이 어느 정도 에드워즈와 청교도들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찰스 피니와 에드워즈-청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과 성령강림-성령세례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령 신학이 비성경적인 방향으로 발전됩니다. 에드워즈의 책 <구속사>를 보면,  성령이 구약의 에녹의 시대부터 종말의 때까지 수시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여 부흥을 일으키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들과 페이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구약의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이 성령을 획기적으로 부어주었다(188, 189).
2)광야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에게 성령이 획기적으로 부어졌다(255).
3)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다(297).
4)오순절 날에 성령이 쏟아 부어졌다(338).
5)구약의 에스라 시대에 성령이 부어져 부흥이 일어났다(346).
6)세례 요한의 사역에도 성령이 놀랍게 부어졌다(409).
7)오순절 날에 성령이 획기적으로 부어졌다(473).
8)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사람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졌고, 방언, 예언 등이 나타났고,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475).
9)에베소에도 성령이 부어졌다(493).
10)대각성 당시 뉴잉글랜드에 성령이 괄목할 정도로 부어졌다(563).
11)종교개혁 초기에 성령이 놀랍게 부어졌다(565).
12)마지막 종말의 시대에 성령이 획기적으로 부어질 것이다(594).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오순절 운동 부흥사 조용기를 중심으로 성령이 일했던 것처럼, 대각성을 일으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성령이 일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정상적인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집회에 참석하여 쓰러지고, 기운이 빠지고, 황홀해 하고,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과 조용기의 집회에 이미 예수 믿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거짓 방언과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청교도 신학자들 가운데 성령에 관하여 에드워즈와 전적으로 다른 성령 신학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성령-부흥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매료된 사람들 가운데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의 오류를 분별하는 사람은 극 소수 보았으나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성령 신학을 비판하는 사람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찰스 피니와 에드워즈-청교도들의 성령론은 대동소이합니다. 
 

3. 유사한 완전성화

찰스 피니는 신자가 지상 생애 동안에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때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렇지 않았으나, 많은 청교도들이 행위언약 하의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언약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과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자격과 조건은 결국 성화로 집약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칼빈도 성화를 중시했으나, 구원을 받는 것과 성화를 직접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성화는 언제나 일평생 동안 진행되는 구원의 열매이지, 성화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보면 성화가 구원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인지, 아니면 구원 받게 만드는 원인이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청교도 두 사람의 말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내 앞에서 걸으라 그리고 너는 완전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으시다. 이것이 약속이시고 그는 우리에게 그와 더불어 완전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는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부족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는 자들의 완전한 소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신실하고 완전하라는 것이다."(존 프레스톤)

"인간이 이 약속을 믿고 자신의 무지의 욕정으로 산다면 언약의 참여자가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믿는 자는 이렇게 하도록 해보라.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참으로 믿으면 그 믿음의 결과는 따르게 되어 있다 ... 왜냐하면 그 믿음은 성화와 거룩한 삶의 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존 프레스톤)

존 프레스톤의 말은 오직 믿음으로 의를 얻어 영원한 구원을 얻는 성도에게서 성령의 점진적 성화가 나타난다는 성경과 칼빈의 가르침을 넘어섰고, 찰스 피니의 완전성화로 완전한 칭의를 받는다는 주장과 유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정의 마지막 결과인 우리의 성화는 모든 다른 것들의 진정한 시금석이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효과적으로 소명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되었는지 말이다. 또한 우리는 진정으로 의로워졌는지를 알 수 있다."(존 다우네임)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당신의 시기에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롭다 한 자들을 거룩케 하시고 구원하신다."(존 다우네임)

선택되었음을 성화를 통하여 알 수 있고 의롭다하신 자를 거룩하시고 만들고서 구원하신다는 존 다우네임의 말도 성경과 칼빈의 칭의 신학을 넘어섰고, 찰스 피니의 완전성화로 완전한 칭의를 받는다는 주장과 유사합니다.

청교도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칭의-성화론을 주장한 사람은 리차드 백스터였습니다. 백스터는 예수 믿을 때 1차적 칭의를 얻으나, 이후 거듭나서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동안 철저하게 회개하고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였는지 다시 평가하는 2차적 칭의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차 칭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결국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져야 최종적 구원에 도착한다고 한 것이니, 찰스 피니의 완전성화 사상과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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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