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10): 2부 1장의 리티머, 크랜머, 튜레틴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비성경적인 청교도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의 신앙이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2부 1장의 마지막 부분,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자 휴 라티머(Hugh Latimer, 1485-1556),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노선의 신학자인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 국교회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 신인협력구원 사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있으나 유럽 대륙의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에는 도달하지 못한 반쪽의 종교개혁이었다. 이신칭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구원을 위해 율법의 선행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와 성화주의로 귀결되어 진다. 그런 신학의 근본에는 타락 후에도 인간에게 여전히 자기의 구원을 추구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알미니안 신학이다. 

알미니안 신학은 영국 국교회 안에 안정되게 자리 잡았다. 1700년대에는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647년, 메사츄세츠 식민지의 보스톤에 설립된 하바드 대학에서도 알미니안 신학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미니안 신학을 경계하는 회중파 청교도 목사들이 1701년에 코넥티컷 식민지에 또 다른 신학교로서 예일 대학을 설립하였다.

1703년에 출생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바드 대학을 나온 아버지의 인도를 따라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예일 대학에도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워즈가 졸업하기 직전 해의 졸업식에서 학장이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에 대한 자신의 우호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 사건은 예일 대학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전체를 흔드는 큰 소동이 되었다. 학장은 물러났고 예일대학에서는 알미니안 신학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고,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 다음 해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을 대표하여 알미니안 신학을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에드워즈를 일찌감치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에드워즈의 대표작 <원죄론>(Original Sin, 1758)도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 관을 기술하는 존 테일러(John Taylor)의 논문 <성경적 원죄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조사>(the Scripture-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 1740) 때문에 탄생했다. 테일러의 위험한 작품이 뉴잉글랜드의 많은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므로 에드워즈는 부득이 ‘해독제’를 만드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저술했다.

그랬던 에드워즈 자신도 알미니안 신학을 부지중에 추종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을 키워낸 회중파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의 저주를 먼저 선포하여 사람에게서 구원의 이전 단계로서 '영적 각성'을 일으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영적 각성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과 준비로서 스스로 예배, 기도, 회개, 선행, 철저한 율법 준수에 힘쓰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성령의 회심시키는 은혜를 준비하고 간절히 사모하여야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님의 때에 구원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구원을 기다리는 과정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과 일주일, 어떤 사람에게는 몇 십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고, 반대로 사람이 깨닫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알미니안 신학이다.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은 영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알미니안주의를 무식하게 여기고 강력하게 대적하였으나 회중파 청교도들 속에서 나오는 알미니안주의는 아름답게 여겼다.

신 교수가 알미니안 신학을 중심 신학으로 삼고 발전한 영국 국교회의 초기 개혁자 두 사람의 칭의 신학을 소개하는 이유를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알미니한 신학은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율법의 선행을 중요시하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그릇된 칭의 개념을 더욱 더 쉽게 용인하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영국 국교회의 개혁자 라티머의 말을 인용하였다.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치 전혀 죄가 없는 것처럼 간주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부터 죄와 악을 취하시고, 우리에게 그 분의 거룩과 의와 공의와 율법의 성취, 그리고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수여하십니다 ...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우리가 계명을 모두 성취한 것처럼 우리를 위한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휴 라티머의 말/신 교수의 책 75 페이지)

라티머의 말 속의 ‘율법의 성취’, ‘마치 우리가 계명을 모두 성취한 것처럼’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여 의를 얻었다는 주장을 반영하는 내용들이다.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것처럼, 성경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해서 얻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성경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성취)이 죄인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된 율법의 정죄를 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살면서 모세의 계명들을 100% 정확하게 지키셨다는 차원에서 ‘율법의 성위(완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많은 율법 조항들을 이수하였는 매우 자세하게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가 많은 모세의 계명들을 어떻게 순차적으로 실천하고 이수하였는지 보여주는 내용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유아 시절에 어머니의 품에 안기시어 율법대로 할례를 받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성전에 나갔다는 내용 정도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율법의 정죄를 대신 받으시고 죽으시어 더 이상 우리에게 율법의 정죄가 소용없게 만드셨다. 이 차원에서 성경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성취)’이라고 한다.

칼빈도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의 성취(완성)을 설명했다. 구약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되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성취)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6.2.)

서철원 박사도 그리스도가 대신 피 흘려서 죄를 해결하신 것이 곧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지키므로 의를 얻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이 아니다. 율법의 요구 곧 범죄하므로 그 죄 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따라 피 흘림으로 죄 값을 갚아 용서를 가져오셨다 ... 그 면에서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서철원, 그리스도론, 147)

그러나 신호섭 교수는 그릇된 청교도 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성취)을 이해하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죄를 없이하여 죄에 대한 율법의 정죄을 따라 죽으심으로 더 이상 율법의 권세가 살아있지 못하게 만드심이 '율법의 성취(완성)'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율법에 대해 완전하신 삶을 사시어 의를 획득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의 성취(완성)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가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어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신학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신호섭 교수는 라티머의 칭의론을 다음과 같이 능동순종 개념으로 평가했다.

“영국의 선도적인 종교개혁자 라티머가 그리스도의 실재적이고 적극적인 의의 전가를 주장했다는 것은 명백하다.”(75 페이지)


신호섭 교수는 영국 국교회의 개혁자 크랜머의 말도 인용했다.

“이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속전가가 지불되고, 모든 율법이 성취되며,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만족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제 진심으로 그 분을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속전가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통해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크랜머의 말/신 교수의 책 76 페이지)

크랜머의 말은 능동순종 교리의 전도사인 신 교수에게 최고의 선물인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율법적 순종의 삶(율법의 성취)으로 죄인에게 필요한 적극적인 의를 획득하였고, 십자가의 피(속전가 지불)로 죄의 용서를 얻으셨다는 크랜머의 주장을 지지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과연 그런 주장을 직접 지지하거나 그렇게 유추하게 만드는 내용을 성경에서 단 한 줄이라도 찾을 수 있는가? 크랜머의 말 천마디보다 성경의 단 한 줄을 찾아낼 수 있어야 진리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신 교수가 능동순종 개념을 지지하는 성경의 말씀을 단 한 줄이라도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신 교수는 지금까지 항상 "누구도 능동순종 사상을 지지하였다"라는 유형의 말만 반복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방식은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신 교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스위스에서 활동하였고, 칼빈과 베자의 신학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튜레틴의 말도 인용했다.

“성경의 모든 곳에서 말하는 바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한 그리스도의 삶의 순종과 죽음의 고난을 지칭한다.”(튜레틴의 말/신 교수의 책 78 페이지)

튜레틴도 명백하게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성경의 모든 곳에서 말하는 바’라고 하였으나, 과연 성경이 그의 주장을 인정할까? 필자가 아는 한, 성경 어디에도 튜레틴의 그 주장을 입증할 내용이 없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은근한 암시라도 성경에 나오면 누가 필자에게 알려주기 바란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성경은 튜레틴의 칭의론이 틀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사도 바울의 칭의 신학에서 벗어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투레틴의 다음의 말을 보면, 그는 칼빈의 칭의 신학에서도 멀리 벗어났음이 확실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호와 우리의 의’가 되시고,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해 우리에게 전가되는 순종을 지칭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이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을 통해 나타난, 그리고 수동적인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순종인 것이다.”(튜레틴의 말/신 교수의 책 78 페이지)

튜레틴의 이 말은 칼빈의 칭의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다. 그가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 안에 처음부터 본질로서 존재한 의의 전가 때문이 아니라 아담을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 즉 그리스도의 무죄하고 완전하신 삶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튜레틴의 이 주장은 성경이 가르침도 아니고 칼빈의 가르침도 아니다. 신 교수가 자신의 책 2부 1장의 칼빈 부분에서 인용한 칼빈의 칭의론을 다시 돌아보자.

“그(바울)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칼빈의 로마서 주석/신 교수의 책 68 페이지)

칼빈은 성육신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였던 의가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에게 전가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튜레틴은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칼빈의 칭의 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리고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을 통해 나타난, 그리고 수동적인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완전한 순종’라고 말함으로 칼빈이 가장 경계했던 율법적 칭의론으로 치달았다.
 

맺는 말

신 교수는 성경을 읽지 않았고 성경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기존의 학설들과 주장에만 의존하여 청교도 신학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개념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종교개혁 완성자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강요>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칼빈과 <기독교강요>를 이용하려다가 자주 오용하였다. 결국 개혁신학의 원천인 성경과 중요한 기준인 칼빈의 <기독교강요> 등에 나타난 신학에서도 벗어나고 말았다. 개혁신학의 원칙에 대한 서철원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종교개혁은 모든 믿음의 내용들을 성경에 근거시켰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성경을 신학함의 원리와 근거로 삼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므로 성경의 권위를 신적 권위로 받는다. 신학함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고 믿음의 내용도 다 성경에서 도출하고 성경대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성경을 신학의 원천과 원리로 고수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메이는 것을 바른 신학함의 원리로 삼는다.”(서철원, 신학서론, 131-132)

“신학은 개혁교회의 신학, 즉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규범과 근본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신학 전개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 물론 고대교회이 교리를 기본 진리로 받아서 신학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서철원, 신학서론,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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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