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 독서(8): 2부 1장의 칼빈 부분

신호섭 교수의 <개혁주의 전가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이다. 구원의 진리를 왜곡하는 비성경적인 사상이 최고의 엘리트 개혁신학이라고 포장되어 확산되고 있고, 하루 속히 바로 잡아야 우리 모두의 신앙이 살기 때문이다. 오늘은 신호섭 교수의 책 2부 1장의 칼빈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호섭 교수는 16세기 인물인 칼빈이 17세기의 청교도 신학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미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수동순종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칼빈이 칭의에 대해 십자가로 말미암은 죄 용서 이상의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했다. 신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주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인용하였다.
 

다음은 신 교수가 가장 먼저 인용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하나님께서 그저 은총 가운데 우리를 의로운 자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용인(acceptance)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칭의가 죄의 사면(remission of sins)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로 옮겨 주시는 전가(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2./ 신호섭 교수의 책 66 페이지)

신 교수가 이 내용을 근거로 칼빈이 칭의를 죄 용서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가르쳤고, 칼빈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삶에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의가 발생했다는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개념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비약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옮겨 주시는 전가’라는 칼빈의 표현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를 전가하여 주신다는 청교도 신학의 능동적 순종 교리와 같은 것으로 볼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칼빈이 의의 전가를 말한 <기독교강요>의 다른 내용을 필자가 찾아보았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기독교강요, 3.11.4)

여기서도 칼빈이 의의 전가를 말했다고 해서, 신 교수가 바라는 대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는 완전한 삶을 통하여 의를 얻은 후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언제나 의의 전가를 가능하게 만든 원인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였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다음은 신 교수가 자신의 능동적 순종 신학을 위해 인용한 <기독교강요>의 내용들이다. 신 교수는 이런 내용들이 자신과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사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고 인용하였으나, 사실상 오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주의하여 보다시피,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풍성함과 보고(riches)를 소유하게 된다."(기독교강요, 3.11.13/신 교수의 책 66 페이지)

이 내용도 단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다는 내용이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 얻은 의를 전가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값없는 죄 사함에 완전한 의를 결부시키면서, 죄가 가려진 사람들이 복되고, 하나님께서 불법을 사하신 사람, 곧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언한다. 곧 바울은 그 사람이 본질적으로 의롭게 때문이 아니라 의를 전가 받아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복되다고 판단하고서 그의 복된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11.11/신 교수의 책 66-67 페이지)

이 내용도 십자가로 죄 용서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의의 전가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과연 어떻게 죄를 제거하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해결하셨으며, 또한 어떻게 의를 얻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푸시게 만드셨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분이 복종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위한 의를 이루셨다고 대답한다."(기독교강요 2.16.5/신 교수의 책 67 페이지)

이 내용은 신 교수에게 가장 이로운 내용으로 보인다. 이해하기 애매한 면이 있으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함으로 의의 전가가 가능했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신 교수의 핵심적인 주장을 증명하는 내용이 아니다. 위의 칼빈의 말들은 단지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의의 전가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없애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자들'(기독교강요, 3.11.13/신 교수의 책 66 페이지)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고 십자가의 피로 속죄를 이루어냈다는 내용이 아니다. 
 

다음은 신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인용한 칼빈의 로마서 주석이다.

“그(바울)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족시키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한 의를 생산하셨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칼빈의 로마서 주석/신 교수의 책 68 페이지)

이 내용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죄인을 살릴 의를 얻어 전가하였다고 주장하는 신 교수를 오히려 곤란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신 교수가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거짓 신학을 단 방에 무너뜨리는 내용이고, 칼빈의 칭의 신학의 핵심이 담겨있는 내용이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는데 바로 이 그리스도께 본질로 속한 의가 우리에게로 전가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존 칼빈)

그리스도가 아담과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모세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키신 삶으로 의를 얻어 전가하였다는 청교도 신학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칼빈의 칭의론이다. 칼빈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율법과 아무런 관련 없이 죄인들을 의롭게 만드시기에 처음부터 충분하신 분이라는 내용이다. 죄인을 살리는데 필요한 의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였다고 칼빈은 가르쳤다. 의가 그리스도 안에 본질로서 존재하였으므로 죄인을 위해 필요한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만 했다는 청교도 신학을 칼빈이 일거에 짓밟아 버리는 내용이다.

모름지기 신학을 하려면 칼빈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칼빈의 칭의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쉽게 설명하여 준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만드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 처음부터 존재한 의를 전가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칭의론인데, 구약 성경에서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1)

“그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5,16)

구약 성경은 성육하실 자를 '의로운 종', '의로운 가지'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자기 안에 본지로서 존재하는 의로 죽은 하나님 백성을 살리는 분, 그래서 다시 살아난 하나님 백성들이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고 칭송하게 된다고 예언했다. 청교도 신학의 능동순종 사상이 맞다면, 구약 성경은 장차 성육신하실 자를 '흠이 없는 율법적 삶을 사신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고 예언했을 것이다. 신 교수는 칼빈의 의도를 왜곡하였다. 칼빈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철저한 율법준수와 흠이 없는 순종의 삶으로 의를 얻으시어 전가하셨다고 가르친 것처럼 변조하였다.
 


다음의 신 교수의 결론적인 말들이다.

“따라서 우리 아닌 다른 이가 우리 대신 의를 수여해주어야만 한다. 칼빈은 그의 명작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을 행하시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강조한다.”(신 교수의 책 68 페이지)

“우리는 칼빈의 모든 저작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언급이나 인용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후기 개혁주의 신학의 술어로서, 칼빈은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칼빈이 후기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런 식으로 구별하여 사용했던 순종의 개념을 배격했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칼빈이 후기 개혁주의자들이 시도했던 이런 구별의 본질을 상세히 진술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신호섭 교수, 69 페이지)

“하나님의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행해진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행하신 죽음의 구속적 사역뿐만 아니라 생애 가운데 행하신 완전한 순종 역시 우리의 구원에서 본질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여겼다.”(신호섭 교수, 70 페이지)

칼빈의 말들의 진의를 찾지 못하고 왜곡한 신 교수는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용서를 이루시고 우리를 받아주신 그리스도를 믿어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의의 전가를 왜곡하였다. 신 교수는 칼빈의 말들을 곡해하면서 모세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키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의 전가를 받는다고 바꾸었다. 그것은 성경이나 칼빈이 한 번도 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사상이다.

 

맺는 말

칼빈이 성경 주석들과 <기독교강요>에서 자주 말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성육신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순종이다. 칼빈은 십자가에서 극치를 이룬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순종으로 우리의 반역죄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시어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리를 받으시어 연합되어주시니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신 교수가 인용한 칼빈의 로마서 주석(68 페이지)과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대한 주석(70 페이지)에도 그렇게 설명되었다.

그러나 신 교수는 칼빈도 청교도들처럼 그리스도가 율법에 순종하는 완전한 삶을 통해서 얻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였다고 왜곡했다. 신 교수가 왜곡한 부분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신 교수의 신학을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 목회자들이 의심 없이 믿거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라며 박수치고 있다. 100명의 이만희 류가 힘을 합하여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을 신 교수는 존경받고 명예를 누리면서 해 버렸다. 더 나아가 정통 개혁신학을 수호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로 알려지고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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