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목사가 가르치는 침묵수련은 불교 등의 묵언수행과 같아

2014년 11월 18일(화)에 ‘아주사 퍼시픽 신학대학원’(Azusa Pacific Seminary) 주최로 목회자, 신학생들을 위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강준민, 노진준, 김한요, 미국의 한인 교회에서 이름이 잘 알려진 이 세 명의 목사가 강사로 나섰다. 그 날의 강의들을 요약하는 기독교 인터넷 신문 ‘뉴스앰’(newsm.com)의 “고통은 먼저, 즐거움은 나중에”라는 2014년 11월 21일 기사를 보았다. 맨 처음에 강의한 강준민 목사의 강의 내용을 요약하는 기사를 읽어보니 그 내용이 좀 의아했다. 강준민 목사가 강의한 내용 중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대략 정리해 보려고 한다.

강준민 목사

 

강준민 목사는 왜 ‘영성’에 집착할까?

“이민목회는 어렵지만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목회 목회자의 영성 관리가 중요합니다. 오늘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나누어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목회자의 영성 관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관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강준민)

강준민 목사는 강의의 서두에서 이민교회 목회자들은 ‘영성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영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궁금했다. 대체 영성이란 무엇일까? 영성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는 강준민 목사는 무엇을 영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의 말 속에 영성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었다.

“영성관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관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강준민)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 곧 영성관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읽으니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더 적합한 말이 이미 성경에 수 없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경건’이라는 말이다. 성경의 저자들이 수 백 번 이야기하는 경건이라는 개념이 이럴 때 쓰여지면 안 되는 것인가? 경건이라는 지극히 성경적인 언어와 개념이 이미 있는데, 왜 꼭 별스럽게 영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강준민 목사는 그날의 강의에서 목회자들에게 마음관리, 시간관리, 분노관리, 변화와 갈등관리, 유혹관리, 언어관리, 정체성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성경의 저자들이 많이 가르치고 언급한 경건이라는 개념으로는 목회자들에게서 그런 것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영성이라는 말을 내세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경건이라는 말을 제쳐두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영성이라는 말을 새로 도입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영성이 목회자의 인격과 품성이라면, 리더십은 뭔가 성취하는 것, 사명을 이루는 것,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둘의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강준민)

강준민 목사는 또 그날 강의에서 목회자의 인격과 품성이 곧 목회자의 영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도 좀 이상하다.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품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설명한다면, 그것도 경건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품성을 닮은 신자를 경건한 신자라고 성경이 누누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뭣 때문에 경건이라고 하지 않고 영성이라고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의 인격과 품성의 성장의 목표는 언제나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시어서 친히 우리의 모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을 닮아가는 신자의 인격과 품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삶이 경건한 삶이라고, 그런 성도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수 없이 말씀한다. 예수님을 닮은 인격과 품성을 표현하기에 경건보다 더 좋은 개념이 또 있으면 누구든지 말해보라! 경건을 이야기하는 다음의 성경 말씀들을 보자!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행 2:5)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 8: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행 10:7)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성품과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을 경건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러면 경건보다는 영성을 표방하는 강준민 목사 등의 기독교 영성 운동가들의 사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경건이라 하지 않고 굳이 영성이라고 하려면, 영성이 경건보다 더 신실하고 적합한 성경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수긍할 수 있는 이론을 보지 못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넒게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과의 관계, 신자의 변화된 인격과 품성을 경건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영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인 중대사는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 속에 담겨있는 뜻이다. 경건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속에 비성경적인 개념을 품고 있다면 안 될 일이고, 영성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하나님께 합당한 신실한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이다.
 

영성 주창자들의 공통점은 침묵, 명상

그런데 문제는 영성을 표방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그런 안심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상, 영혼의 고요, 침묵 등을 진리탐구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고 수행정진하는 세상 종교들의 사상과 철학의 흔적이 경건보다는 영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매우 진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지 그저 어떤 용어를 좋아하냐? 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영성을 강조하는 유명한 목사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면밀하게 관찰하면 더욱 더 이런 심각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문에 소개된 강준민 목사의 강의의 내용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

“말을 아무리 아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기적으로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침묵으로 말씀이 무르익어야 그 말씀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정 시간 동안 침묵의 시간을 위해,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대침묵, 소침묵의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강준민)

말을 아껴야 목회가 잘 된다고 하는 강준민 목사의 강의는 매우 성경적인 것 같다. 성경의 도처에서 악독한 말, 성급한 말, 저급한 말, 교만한 말, 쓸모없는 말을 단속하고, 혀를 길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자주 발견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

그러나 이 점을 생각해 보자. 말과 언어를 길들이기 위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정기적으로, 빈번하게 침묵하면서 수행하라고 가르쳤는가? 말씀(설교)이 목회자 속에서 무르익기 위해 침묵하며 영성수련하라고 강준민 목사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사도와 어떤 선지자의 말 속에서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을까? 성경계시를 존재의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에는 이런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없다. 과연 언제부터 기독교가 신자들의 영혼이 말씀과 함께 무르익도록 침묵하는 수련을 권장했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이런 말들은 인간 속에 이미 구원과 진리가 자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세상 종교들의 관점이다. 영지주의-뉴에이지 백그라운드를 공통으로 하는 모든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인간의 내면에서 미세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명상하고, 참선하고, 행동과 말을 멈춘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세상 종교들의 진리탐구의 방식은 고요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서, 자기들의 경전과 주문과 기도문을 암송하는 방식으로 자기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가꾸는 것이다. 불교인들의 묵언수행을 비롯한 힌두교, 뉴에이지 추종자들, 도교, 티벳 불교 ... 모든 종교인들이 그렇게 수련하는 것은 자기 속에 진리와 구원의 불꽃이 내재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고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라고 가르치는 성경은 전혀 말없이 고용하게 수행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강준민 목사는 왜 침묵하는 훈련으로 목회자의 영혼 속에서 말씀이 무르익어야 어려운 이민 교회 목양이 잘된다고 하는 것일까? 다음의 영상을 보며 강준민 목사가 그 날 참석한 목사들에게 권장하는 침묵하는 연습과 실제 사찰에서 단기간 시행하는 불교인들의 묵언수행의 내용과 효과를 비교해 보자! 놀랍게도 강 목사가 강의에서 강조한 마음관리, 분노관리, 유혹관리 ... 등의 목회자의 영성관리를 위한 침묵연습과 불교인들의 묵언수행이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준민 목사에게 성령충만 개념은 어디있나?

기독교인의 영적인 성장과 변화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힘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말씀이 영적성장의 수단이고 목표이다. 타락한 죄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의 조명과 도우심이 있으므로 가능해진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비결은 침묵을 통해 고요함과 정적 속으로 영혼을 몰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기독교인의 영적성장은 바람도 없는 조용한 그늘에서 소리없이 커가는 버섯 종류와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사모하는 마음을 따라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동성 속에서 영적성장이 일어난다.

그런데 왜 강준민 목사는 영적성장이 불교인들이 추구하는 고요함과 영혼의 정적을 통해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의 능력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죄인들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음으로 진행된다. 그때 성품과 품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언어관리 능력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인데, 왜 강준민 목사는 침묵을 통해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성령충만이 신앙과 삶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인격적 통치가 활성화되어, 신자가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으로 언어관리, 시간관리, 물질관리, 유혹관리, 분노관리 ...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질을 얻을 수 있다. 성령충만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바르게 읽고, 깨닫고,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과 삶의 특징은 말씀과 성령 안에서의 역동성이다. 바울과 베드로와 사도행전의 모든 제자들의 신앙과 삶을 보라! 그들은 기도와 말씀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동성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강준민 목사는 침묵을 통해 누리는 영혼의 고요와 정적으로부터 생명의 능력이 나온다고 가르치는 것일까? 강준민 목사는 이민 교회의 상황에서 좋은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사도들처럼 기도와 말씀을 따라 역사하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타락한 죄인에게 주신 복된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기 위해 마땅히 우리 신자들이 힘써 진행해야 할 것들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은 없고, 뜬금없이 ‘고요한 영혼’, ‘대 침묵’, ‘소 침묵’, ‘침묵으로 말씀이 무르익고’ ...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것이 ‘다른 복음’(고후 11:4)아니라면 무엇이 다른 복음일까?
 

유진 피터슨을 좋아하는 강준민

강준민 목사의 영성 개념은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성운동가들은 인간에게 처음부터 신실함과 선함과 신성이 내재되었다고 보는 이교도들의 종교수련으로부터 영향받았다. 기독교는 초월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구원의 은혜에 의존하므로 “주여! 내게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하나님을 향해 간구한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은 이미 인간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으니 눈을 자기의 내면으로 집중하라고 한다. 자기의 내면을 더 보기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이 조용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 불교, 티벳 불교, 힌두교, 뉴에이지, 영지주의, 도교... 모든 종교들은 고요한 영혼을 추구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영혼이 고요하지 않고 어떻게 신자들을 고요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유진 피터슨)

▲ 유진 피터슨

강준민 목사는 강의 중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말도 소개했다. 유진 피터슨도 이방 종교와 기독교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뉴에이지 사상가라고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가 번역한 성경 <The Massage>에는 뉴에이지 사상이 반영된 흔적이 많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한다.

뉴에이지 성향을 가진 유진 피터슨이 ‘목회자의 영혼이 고요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으로 향하는 명상영성의 고요한  영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영혼이 고요해지면, 그 다음에는 인간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고요한 음성을 듣게된다. 기독교 명상 영성운동가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영혼이 평안하고 건강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주 그럴싸한 가르침이나, 사실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심각한 이단사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의 내부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의 말씀으로 자기의 뜻을 드러내셨다. 기독교에서는 기록된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신자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을 깨달아서 삶과 신앙에 적용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결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직접 계시의 음성이 나오지 않으므로, 고요한 영혼이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뉴에이지 영성가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모두 추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강준민 목사는 유진 피터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목회자의 영성관리에 대해 설명했다. 정말 명상을 통해 영혼이 고요해져야 정말 목회가 잘되는 것일까? 목회를 가장 잘했던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유진 피터슨과 강준민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침묵을 통해 영혼을 고요하게 만들어서 큰 믿음의 능력을 발휘했었는가? 사도행전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영혼은 고요한 영혼이 아니었다. 생사가 오고가는 살벌한 상황 속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분주하게 뛰었고, 성령은 그들보다 더 열심히 그들을 보호하시면 일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고요한 영혼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담대한 영혼’이 되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성도의 영혼은 고요해지지 말고 기도와 말씀으로 담대해야 한다. 유진 피터슨과 같은 사람은 아주 그럴싸하게 기독교 속에다 이방종교 사상을 배합하는 위험한 사람이다. 성도들은 영혼의 고요함을 추구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되고 성령과 함께 일하는 담대한 영혼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을 좋아하는 강준민

“사역자는 사람들을 만날 때 과거는 죽이고 새로 만나는 사람처럼 만나야 하며, 특히 분노를 조심해야 한다.”(헨리 나우웬)

강준민 목사는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말도 인용하면서 목회자가 영성관리를 위해서는 분노를 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고, 특히 분노를 조절해야 한다는 헨리 나우웬이 한 말은 좋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헨리 나우웬 또한 기독교 속으로 다른 종교의 명상사상을 배합한 뉴에이지 사상가라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 헨리 나우웬(1932-1996)

도교, 티벳 불교 등의 명상하는 동양종교에 심취되었던 로마 천주교의 신부 토마스 머튼에 의해 현대의 천주교 안에 명상하는 영성이 형성되었다. 기독교 안에서 토마스 머튼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뉴에이지 명상 영성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오늘 날 기독교 안에 명상, 영혼의 고요 ... 등을 말하는 유행이 생겨났다. 많은 전문가들이 토마스 머튼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안에 뉴에이지 영성을 전파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리챠드 포스터를 지적한다. 강준민 목사는 왜 이런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일까? 서로 사상이 비슷하고, 영적으로 같은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자신이 타고난 동성애자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헨리 나우웬이 타고난 동성애자이면서도 동성애 욕구를 실천하지 않고 종교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일평생 싸웠다는 사실을 높이 칭찬한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논리이다. 하나님은 동성애를 무척이나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분이다. 성경이 경고하는 많은 죄악들 가운데 더욱 더 심각한 것이 동성애이다. 만일 헨리 나우웬이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동성애 욕구와 성향을 능히 고쳐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동성애 욕구와 성향이 제거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료하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도 동성애가 심각한 죄성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가 동성애 욕구를 한 번도 실천하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으나, 헨리 나우웬이 타고난 동성애자로서 동성애 죄악을 범하지 않았다고 하여 진정한 영성의 대가라고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는 현상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또한 헨리 나우웬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거짓된 사상을 전파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신자들과 비신자들을 함께 모아서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책 <Life of Beloved>에서 천국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있는 등의 만인구원론 사상을 기술하였다. 기독교 내에서 명상하는 뉴에이지 영성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서 이와 같은 다원주의 성향이 농후하게 드러난다. 왜 그럴까? 명상영성은 비기독교적인 사상이고, 다른 영이 역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배타적인 경건으로 무장된다. 그것이 성령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성경적인 명상영성가들은 여지없이 ‘다른복음’(고후 11:4)의 길로 나아가는 특징을 보인다. 그것이 거짓 영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스캇 펙을 좋아하는 강준민

“훈련이란 고통을 먼저 선택하고 즐거움을 나중에 누리는 것이다”(스캇 팩)

강준민 목사는 강의의 말미에서 심리학자 스캇 팩(M. Scott Peck)의 말도 인용하였다. 스캇 팩의 말이 그릇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역시나 스캇 팩이라는 사람도 많은 비성경적인 철학과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이므로 기독교 목사가 좋아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에 스캇 팩이 쓴 책 두 권 <아직도 가야 할길>, <끝나기 않는 여행>을 읽었다. 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결국 기독교, 힌두교 등의 종교들을 같은 영적인 종교로 간주하고 있는 그의 견해가 기술된 내용을 보고서, 신학교의 교수님이 그 책을 추천했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더 흥미로운 사실을 보았다. 2006년에 출간된 스캇 팩의 <스캇 펙 박사의 평화만들기>(김민예숙 역, 열음사)라는 책에 관한 내용이 불교의 인터넷 신문 <법보신문>에 실려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그 불교신문이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었다.

“의사로서는 드물게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한 스캇 펙은 집단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형성을 이론화하는 등 평화로운 공동체 형성의 기초를 다지는데 노력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위협과 분쟁의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부산 미타선원을 출가와 재가가 어우러진 명실공히 사부대중 신앙공동체로 이끌고 있는 하림 스님도 이 책에서 사찰운영의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

과연 스캇 펙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도들이 전한 사상과 믿음으로 무장된 신실한 성도가 쓴 책이라면, 이렇게 불교신문에 소개되고 더 나아가 고명하신 불교의 스님이 “사찰 운영의 지혜를 얻었다!”라며 무릎을 치며 좋아하기까지 할까? 고요한 영혼을 만드는 명상의 영성을 전파하는 강준민 목사는 어째서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인용하는 것일까?

불교 스님이 스캇 펙의 사상에 반했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다분히 불교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스캇 펙의 이런 면들이 주목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많이 드러났다. 어떤 연구자는 “스캇 펙의 복음을 그리스 신화와 불교가 가미된 정신의학과 기독교의 혼합물이다.”라고 평가하였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범신론과 뉴에이지의 가르침을 좇아 인간이 곧 신이라고 가르쳤다고 비판하였다. 강준민 목사는 왜 이런 사람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것인가? 비슷한 사상과 유사한 영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 스캇 펙의 책을 즐거이 읽고 있는 부산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 http://m.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624에서 캡쳐 정이철 목사 /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담임, 바른믿음 대표, 성경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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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