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김 삼 목사 방언 비판(1)

글을 시작하며

<방언은 왜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에서 김 삼 목사는 방언(영언)을 옹호하는 논리를 펴기 전에 “성경은 100% 믿어야 옳다”는 말로 시작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김 삼 목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 자신은 방언을 말하면서 성경이 아니라 수학의 ‘확률’ 논리로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 김 삼 목사의 글을 보라.

“그런 학설이 사실이라면, 지난 1980년대에 뉴욕 한인교계를 휩쓴 성령운동으로 영언을 하기 시작한 수많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은 다 가짜 신자들일 것이다. 논리상으로 그렇지 않나. 모 대형 장로교회의 목회자는 미국인 강사 D.G. 목사를 방문하러 호텔에 들렀다가 객실에서 영언이 터졌다. 80년대 당시 교파/교단을 초월한 수많은 신자들이 영언을 하고, 은사와 병 고침을 받고, 그 결과 교회가 부흥 성장하는 꿈(?) 같은 역사들이 일어났다. 은혜의 '대박' 또는 허리케인이었다.” 1)

김 삼 목사는 여느 방언 옹호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방언을 하기 때문에 방언은 진짜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필자에게 “방언기도는 한국교회의 대세인데 ... 아마도 방언을 하는 사람과 또 방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리고 방언을 하지 못하더라도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여기는 사람들을 합치면 어림잡아 한국교회의 신자의 80% 이상 될 텐데, 당신이 ‘방언기도는 거짓 은사다’라고 방언을 반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수학적이며, 그래서 실용적이기는 하겠지만 결코 성경적이지는 않다. 위의 김 삼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그가 글을 시작하면서 자신 있게 선언한 “성경은 100% 믿어야 옳다”는 말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100%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 삼 목사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맞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인 ‘다수’라는 수학적인 논리에 맞추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수학적인 ‘다수’의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는 김 삼 목사의 방언 옹호는 궤변에 불과하다. 오히려 성경은 김 삼 목사의 논리 근거와는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따라가는 것을 경계하도록 가르친다. 그럼에도 김 삼 목사가 계속 다수가 방언을 한다는 것을 근거 삼아서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100% 믿는다고 하는 자신의 성경에서 적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의 말씀은 지워야 할 것이다.
 

100% 믿어야 하는 성경이 김 삼 목사의 방언(영언)을 지지하는가

김 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안하지만, 성경엔 '영언이 현대에 있을 수 없다'는 유의 언급이 눈 씻고 봐야 없다. 다 학계의 헛소리다! 마르쿠스복음서(맑) 16:17을 보라. 믿는 이들 곧 신자들에겐 다 따르는 5대 표징 중 엄연히 영언이 포함돼있다. 그런데 5대 표징은 '믿는 이들에겐' 이라는 조건부 단서가 붙어 있다. 안 믿는 이들에겐 안 따른다는 얘기다”

위에서 “‘미안하지만, 성경엔 "영언이 현대에 있을 수 없다’는 유의 언급이 눈 씻고 봐야 없다”는 김 삼의 말은 미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전12~14장에서 고린도교회에 성행했던 거짓방언이었던, 소위 ‘영언’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전14: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로 설명되어지는 고린도교회의 ‘영언’을 비판하기 위해서 고전12장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정의한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바울의 언급은 교회의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언급할 성령의 은사, 그 중에서도 특히 방언의 은사에 대한 설명이다. 바울이 언급한대로 방언은 ‘성령으로만 할 수 있는 말’이며, 그 말의 주된 내용은 “예수를 주”로 선포하는 복음, 즉 ‘하나님의 큰 일’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하게 하는 방언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예수를 주”로 선포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전14:2의 방언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으로”, 즉 방언을 하는 자가 “자신의 영으로” 하는 것이므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은사와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다 고전14:2의 방언은 “예수를 주”라고 선포하는 메시지 대신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이므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일 수는 결코 없다.

2.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는 바울의 언급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임을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모든 은사, 즉 방언의 은사까지도 교회(교회의 지체들)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성령의 은사이다. 그렇다면 방언은 사람에게 말해야 하는 은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교회(지체들)의 유익을 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전14:2의 방언은 결코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물론 거짓방언을 하는 자들이 자신이 하는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전12장에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은사의 정의, 즉 교회를 위하는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3.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11)는 바울의 언급은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의 뜻대로, 즉 그의 주권대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은사를, 예를 들면 사람들이 방언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은사 받음에 왜 성령의 주권적인 간섭이 필요한가 하면 몸의 지체가 다양하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몸 된 교회에도 성령의 은사들이 다양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있어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뜻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폼 나는 은사만을 구할 것이므로, 한국교회처럼 어떤 특정한 은사에 쏠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게 설 수 있도록 그 교회에 맞게 성령의 은사들을 적절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의 방언의 은사들만 판을 치고 있는 한국교회, 특히 오순절 교회들은, 온 몸에 입만 가득히 있는 기형적인 교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한 이유는 그 교회에 기형적으로 방언만 많이 있다는 것은 그 은사들이 성령의 주권대로 주신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판을 치고 있는 교회들은 결코 주님의 몸 된 참 교회일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김 삼 목사의 “‘미안하지만, 성경엔 "영언이 현대에 있을 수 없다’는 유의 언급이 눈 씻고 봐야 없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김삼 목사가 운영하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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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삼 목사가 내세우는 막16:17은 방언(영언)을 지지하는가

김 삼 목사는 막16:16-18을 손수 번역하고 그것을 근거로 “믿는 이들 곧 신자들에겐 다 따르는 5대 표징 중 엄연히 영언이 포함돼 있다”고 하면서 방언이 마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즉 성경의 지원을 받는 것처럼 말한다. 다음은 그가 번역한 막16:16-18이다.

"또 그분(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온 세상으로 들어가 모든 피조물(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오! 믿고 침례/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죄를 받을 것이오. 그리고 믿는 이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악령들을 내쫓고, 새로운 말(=영언)을 하고, 뱀들을 집어 올리며, 혹시 무슨 독극물을 마셔도 그것이 그들을 해칠 수 없고,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오.'"(맑16:16-18, 사역)

김 삼 목사는 먼저 막16:9-20을 마가가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후대에 더해진 것이라는 사실에 강력하게 반발한다. 물론 자신이 주장하는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막16:9-20은 후대에 더해진 것으로, 거의 100%에 가깝게 입증된 사실이다. 실제로 본문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피면 마가의 글이 아니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그렇지만 필자는 김 삼 목사가 좀 더 공부하기를 바라면서 이 부분은 지면 관계상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소위 마가복음의 “짧은 결말과 긴 결말”에 대해 상세히 다루어 보겠다).

막16:9-20은 원문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초대교회의 신앙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 본문은 나름대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또 김 삼 목사가 목에 핏대를 새우며 주장한 일부의 것들은 필자도 인정한다. 왜냐하면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는 과장법이므로, 문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새 방언을 말하며”가 김 삼 목사의 주장대로 설령 마가가 쓴 원문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새 방언’은 결코 고전14:2의 방언과 같은 ‘영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막16:15-18을 전후문맥에 유의하면서 다시 보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명령은 15절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이다. 그리고 16절~18절까지는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 직접 관련된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새 방언”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하심으로써 ‘새 방언’이 인간의 언어임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행2:4을 보라.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김 삼 목사는 마가복음 원문이 아닌 말씀을 인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인용한 “새 방언을 말하며”가 결코 방언(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아마도 “성경은 100% 믿어야 옳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저급한 신학 수준에서 나온 엉터리 이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아래의 그의 주장을 보라. 얼마나 그의 신학 수준이 유치한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로부터 소아시아, 유럽 일부까지만 기독교가 퍼진 초기교회 당시에도 이런 권능이 필요했다면, 온 세계에 신자들이 퍼져있고 죄악은 과거보다 더 극에 달해있고 마귀는 과거보다 더 극악하게 설쳐대는 지금, 그때 필요했던 권능이 왜 이젠 더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령의 권능 없이, 성경책 하나만 갖고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얘긴가? 말이 안 되는 논리다“

위의 김 삼 목사의 논리는 방언을 주장하는 모든 자들의 공통된 논리로서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 얼른 들으면 제법 논리적이고 사리에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하게도 김 삼 목사가 ‘100% 믿어야 한다’는 성경과는 100% 거리가 먼 엉터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김 삼 목사의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말 강화를 하시면서 김 삼 목사가 말하는 권능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으로 말씀하시면서 경고하셨다(마24: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그런데 김 삼 목사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예수께서 종말 강화 도중 갑자기 하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는 말씀을 잘 새겨야 들어야 한다. 왜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능력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미혹할 때,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능력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 주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종말의 때에 주님의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 때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때에도 없어지지 않는 말씀의 능력으로 교회는 없어지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가짜 교회들에서는 거짓은사들이 난무하는 능력의 난장판이 될 것이며, 참 교회들은 말씀의 능력으로, 핍박하는 거짓 교회들에 의해 순교하면서까지 끝까지 순결하게 신부의 믿음을 지킬 것이다. 김 삼 목사는 다시 한 번 유념하라! 마지막 때에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능력은 초자연적인 화끈한 은사들이 아니라 끝까지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글을 마치며

김 삼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마지막 때를 계시한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들로 가득 찬 교회들이 참 교회로 그려져야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일곱 머리와 열 뿔”(계17:3)이 있을 만큼 성령의 은사에 버금가는 놀라운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참 교회는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말씀을 전하는 권세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때의 참 교회는 두 증인 노릇(계11: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을 끝까지 하다가 김 삼 목사가 말하는 그 능력이 출중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해, 김 삼 목사가 말하는 그런 능력이 없는 참 교회는 죽게 된다(계11: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이것이 마지막 때의 참 교회의 최후 승리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곧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믿음을 지키며 말씀을 선포하다 죽은 교회를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참 교회는 다시 살아나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계11:11-12/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따라서 김 삼 목사가 말하는 ‘100% 믿어야하는 성경’대로라면, 마지막이 가까이 올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붙드는 교회는 주님의 참 교회일 것이며, 거짓은사들을 가지고 능력이 많음을 자랑하는 교회들은 거짓 교회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거짓 교회들은 적그리스도의 전신(前身)으로 끝내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거짓 교회들이 적그리스도의 특징인 놀라운 능력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거짓은사들이 난무하는 교회들은 부흥이라는 위장막을 쳐놓고 그렇게 자꾸 커지고 또 커지고 있나 보다.

마지막으로 김 삼 목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책 하나만 갖고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얘긴가?”는 김 삼 목사의 질문은 참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반역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의 능력이며, 하나님 그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이 마귀의 하수인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만으로 마귀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 각주 ---

1)"방언은 왜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인가"(https://truthnlove.tistory.com/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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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