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III. 헨리 조지에 대해 

1. 국내에 소개된 헨리 조지

헨리 조지가 국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과거 야당이었던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홍사덕 전의원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경제학자로서 헨리 조지를 국내 방송과 언론에 소개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헨리 조지는 그저 일부 (경제)학자들이 알고 있는 많은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헨리 조지가 기독교계에 알려진 것은 누구보다 성공회 사제였던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가 <신앙계>와 저서 등을 통해 줄기차게 헨리 조지의 토지법을 소개한데 기인한다. 대 신부의 칼럼과 도서들을 읽고 고왕인 박사가 <헨리 죠지 협회>를 만들었고 전국에 헨리 조지 관련 스터디 모임들이 생겨났다. 특별히 대구·경북권 (경제)학자들이 헨리 조지에 대해 유난히 관심을 보이면서 노무현 정부 청와대로 입성했다가 지금은 은퇴한 경북대 이 모 교수가 노무현 정부 경제 골격을 구상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보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홍사덕 전 의원이나 헨리 조지를 국내 소개했던 대천덕 신부는 정통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아니었다. 헨리 조지 자신도 정통한 신학자나 경제학자가 전혀 아닌 독학으로 경제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신학이든 경제학이든 독학하여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대 신부의 글이나 헨리 조지의 주장이 마치 절대적 성경적 주장인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어떤 주장이든지 늘 찬반의 그늘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바른 믿음에 근거한 신앙적,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독학의 경제전문가였다. 공식 교육은 14세까지가 전부였다. 따라서 그리 복잡한 경제 이론이나 용어들이 그에게는 필요 없었다. 그가 원고 없이 즉흥 연설에 능한 뛰어난 연설가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의 쑨원(孫文)이나 톨스토이가 소설 부활에서 헨리 조지를 언급했다고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탁월하고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대단한 집중력과 통합의 예술성을 요구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경제의 지휘자가 된다는 것은 다채로운 경제적 변수와 사회적 상황들을 유기적으로 잘 융합해야 하는 종합 예술가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세속 정부든 경제 컨트롤이 쉽지 않다. 경제학의 이 같은 심오한 속성에 비해 헨리 조지의 경제학은 너무나 소박하고 단순하다. 왜 그럴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헨리 조지의 사상

헨리 조지의 주요 사상은 주로 그의 대표 저서인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1879)에 녹아 있다. 국내에서는 경북대 행정학과에서 39년간 근무한 후 2015년 2월 정년 은퇴하고 석좌교수로 있는 김윤상 교수의 헨리 조지 해설서와 1997년 출간된 <진보와 빈곤> 완역본, 그리고 이 번역본을 세밀하게 재번역한 개역판이 있다. 김 교수는 이 책들을 통해 헨리 조지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 교수는 신학자는 아니기에 성경의 희년과의 연관성에 대해 접근하지는 않는다. 학과는 다르나 같은 경북대 교수였던 이정우 교수와 같은 대구지역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 그리고 대천덕 신부, 뉴스레터 <요벨>을 내던 고왕인 박사 중심의 “헨리 죠지 협회”, 이를 계승한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일명 “성토모”) 등을 거치면서 헨리 조지 사상은 국내에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관련된 몇몇 단체들이 연합하여 ‘희년함께’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본고는 희년과 비견되는 헨리 조지 사상에 국한하여 살펴볼 예정이기에 주로 이들 해설서와 역본을 중심으로 희년과 비교되는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진보 속의 빈곤의 문제

이 책에서 헨리 조지는 산업혁명 이후 생산력은 증가했음에도 왜 임금은 최저 생계 수준에서 머물러있는가에 대한 정치 경제학적 질문을 한다. 헨리 조지는 생산력이 증가하는데 왜 임금은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지 고민한다. 즉 물질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왜 빈곤과 부수적 문제들이 생기냐는 질문이다. 물질적 진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하기 위해 헨리 조지는 토지, 노동, 자본, 부에 대한 정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지대, 임금, 이자, 이윤에 대한 용어 정의도 한다. 그러면서 헨리 조지는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는 임금기금설과 맬더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으로 진보와 빈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임금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임금기금설은 사실 옳지 않다. 또한 맬더스의 인구론도 이미 농업선진화 등으로 인해 그 효용성의 오류가 인정된다. 헨리 조지도 빈곤의 원인이 생산력 감소에 있다는 맬서스 이론을 수긍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헨리 조지는 토지사유제야 말로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 지주가 토지가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물질적 진보의 혜택이 노동과 자본에 돌아가지 못하는 점을 주목하였다. 따라서 진보와 함께 나타나는 빈곤을 타파하려면 지대의 개인 소유를 합법으로 보장하는 토지사유제를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미 토지사유제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를 공유화할 필요까지는 없기에 단지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가치인 지대를 정부가 환수하고 다른 조세를 면제하는 지대조세제(land value taxation)을 실시하면 된다고 했다. 이것은 이렇게 단일 조세제의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생산이 증대될 뿐 아니라 분배 정의가 이루어지고 모든 계층에 이익이 되며 나아가 더 높고 고상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찬 신앙과 경제학에 대한 옥스퍼드 선언>(The Oxford Declaration)은 빈곤의 원인이 단지 토지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며 복잡하다. 그것들은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자연환경에 행하는 악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빈곤의 원인은 문화적인 태도와 사회, 경제, 정치, 종교의 제도에 의해 취해지는 행동 즉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자원을 낭비하게 하며 경제적 생산에 장벽을 세우거나 일에 대한 공평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행동 등을 포함한다. 이들 빈곤을 생겨나게 하고 지속하게 하는 힘들은 세계적, 국가적, 지역적, 개인적인 차원에서 작용하고 질병, 정신·육체적 장애, 고아, 노년 등으로 인해 빈곤해지기도 하고 안전과 자연 재난에 의해서도 생겨난다. 이만큼 대단히 복잡한 요인들이 섞여있다.

분배의 문제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12-1984)도 지적한 바 있다. 산업혁명 시대 노동집약적인 사업이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생긴 것은 사실인데 쉐퍼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노동의 착취를 위해 노예 제도를 방치한 것과 어린이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당연히 희년과 연관 짓지는 않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토지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땅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우주의 주관자요 섭리자이며 주인이라는 성경의 보편적인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헨리 조지 사상이 희년을 반영한 것이 아닐지라도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진보 속 빈곤의 문제에 대한 탐구조차 거부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토지 사유제의 문제

‘임금은 자본에서 나온다’는 임금기금설과 인구 증가로 설명하는 맬더스의 인구론에서 찾으려는 기존 경제학을 비판하며 헨리 조지는 토지사유제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토지가치를 차지하고 토지 투기까지 조장하는 토지사유제는 곧 진보와 빈곤을 유발하는 진정한 요인이므로 토지 사유를 폐기하고 토지 공유제로 급진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헨리 조지 토지법의 요지였다. 다만 토지사유가 관습화된 나라에서는 토지 사유를 허용하되 해마다 토지의 연간 임대가치인 토지대금을 정부가 환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다른 모든 조세는 면제해도 되며, 그렇게 한다면 생산은 자연히 늘고 분배정의는 실현되고 인류는 더 고상한 문명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토지와 자본의 사유화를 모두 금하고 공유화해야 한다고 본 반면 헨리 조지는 토지만 공유하자는 입장이었다. 즉 공산주의는 토지와 자본을 모두 몰수해 국가 소유화하는 반면 헨리 조지의 지공(地公)주의는 자본은 사유화하고 토지만 공유한다. 헨리 조지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사상, 정치경제적 논쟁을 자주 벌인 이유다. 

이 같은 토지 공유가 희년의 정신은 물론 아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더 강한 법을 요구하시는 데 토지 문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소유의 완전한 포기(눅14:33)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과 호의를 강하게 요구한다. 사실 여기에 희년의 정신이 들어있다. 온전한 회복을 암시하는 희년의 법은 “자본은 소유하고 토지만 공유하는 헨리 조지의 토지법”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3) 시대적 산물로서의 헨리 조지 사상

대학 교양 수준의 경제학 원론만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이 같은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마르크스의 사상처럼 산업혁명 이후 사회와 산업경제의 모순 속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빈곤 문제의 해결과 경제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헨리 조지의 토지 공유제는 유물론자들의 사상처럼 경제전문가들의 많은 경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배경이 빈약했던 것에 비해 대단히 급진적이고 일부 독창성을 가졌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은 헨리 조지의 시대보다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토지가치를 반영한 세금을 다양한 방법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헨리 조지의 사상을 일부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일부 권위주의 정부는 헨리 조지보다도 더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경향이 있다. 헨리 조지가 오직 토지 가치 세금만 거두면 된다고 본 반면 오늘날 세속 정부들은 부가가치세, 부유세, 소득세, 환경세, 토지세, 건물세, 종합소득세, 양도세, 법인세 등등 온갖 세금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갖 세금에 눌린 오늘날의 보통 시민들을 보면 헨리 조지는 뭐라고 말할까? 토지 가치는 늘 상승할 거라 보고 토지가 늘 토지 사유자들의 착취 수단으로 여겼던 헨리 조지가 세금과 역전세 난등으로 오히려 토지 가치가 급락하여 파산하는 재산가들이 발생하는 오늘날의 현상들을 보면 뭐라 했을까? 물론 토지 가치를 반영한 세금도 조지의 독창적 주장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 이론이 부분적 타당성을 가지고 경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처럼 헨리 조지의 (정치) 경제학도 그런 부류인 것이다. 
 

(4) 경제에 대한 세속 정부의 고민

기독교나 세상 정부가 헨리 조지 사상을 문자적, 급진적으로 무조건 반영하지 않는 이유는 생명체와 유사한 경제 체제에 헨리 조지 식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생명이 한 가지 운동법이나 약으로 건강해지거나 치유될 수 없는 것처럼 경제도 복잡한 유기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복잡 요소가 작용한다. 그 복잡 요소란 자연 요소와 인간 요소이다. 토지는 환경오염, 가뭄, 홍수, 지진,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 재난을 통해 토지 가치가 급격하게 변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들 바뀌는 토지 가치를 재평가하고 세금을 매겨야 할 장본인인 동시에 스스로 토지 가치를 전쟁이나 폭력이나 쓰레기나 오염을 통해 황폐화 시킬 수도 있는 당사자다. 인간의 탐욕과 죄악은 얼마든지 본래의 토지 가치를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변덕스럽고 탐욕적인 인간적 요소가 개입된다는 점이 토지 가치를 변동시키는 핵심적 요소인 셈이다. 전 UN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 1938-2018)이 임명한 경제 발전 문제에 대한 세계 23인의 고문(Adviser) 중 한 사람이었던 고 박을용 박사(전 한동대 부총장)의 경제 발전론 근간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상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토지의 경우 본질적으로 자율적 시장 기구에 전적으로 맡겨둘 수는 없다. 공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지가 상승은 토지에 대한 어떤 제도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세속 정부가 어떤 식으로 든 토지에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개입하는 이유다. 세속 정부는 어떤 정부라도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공익을 확보하려 든다. 토지 소유자와 잠재적 수용자의 권리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것은 세속 정부의 대단한 테크닉을 요구한다. 그만큼 헨리 조지 시대보다 세상은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후반 토지 공개념(土地 公槪念)이 처음 주장되고 논의되었을 때에 용어마저도 토지소유권의 공개념 내용에서부터 토지의 공적 개념, 토지의 공익 개념, 토지재산권의 공개념 등으로 다양하게 개념 정립이 시도되었던 것처럼 토지 속에도 그 개념에서부터 복잡한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토지가 생산수단 및 생산요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상품으로 이해하여 사유재산제를 보호하려는 자유주의 토지사상 즉 자본주의 토지사상이 있는 반면, 토지를 생산수단으로서의 일반상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토지를 국가 소유 아래 두어 국가가 관리하고 개인은 다만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바탕만 인정하는 사회주의적 토지사상도 있다. 사유재산제가 가져온 빈부격차, 인간소외, 투기 등의 부작용을 권위주의 정부가 깊숙이 개입하려는 토지사상이다. 이때 생산 수단인 토지의 사유는 전면적이고 일시적으로 혁명적 방법으로 없애게 된다. 이렇게 해서 권위주의 정부는 토지 몰수로 불평등한 사회문제를 철저히 일거에 소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역사는 토지를 국유화했던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순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창조주가 아닌 정부나 독재자라는 또 다른 권력이 토지뿐 아니라 모든 이권에 관여하여 독점, 착취하면서 오히려 사회는 더욱 큰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이끌어내었다. 북한의 일부 백두혈통이나 공산귀족들이 토지와 권력을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것이나 상하이, 북경과 같은 중국의 대도시들이 자본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의 대도시보다도 부동산이 폭등하고 권력을 가진 공산 귀족들의 재벌화는 토지제도만 바꾸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헨리 조지의 예측을 멀리 벗어났다. 그런 중국을 헨리 조지의 토지법이 실현된 곳이라고 우리도 따라야 한다고 칭송한 모 정당 대표도 있었다. 사유재산제가 갖는 사회적 모순을 사회주의에서와 같은 혁명적 방법이 아닌 점진적 방법으로 토지에 대한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도모하는 정부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정상적인 정부는 이 같은 개량주의적 형태를 띠는 게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5) 토지 관리의 주체 문제

토지를 공유화한다 해도 그것을 다루고 관리하는 주체는 바로 탐욕의 인간이다. 즉 토지를 하나님이 아닌 진보든, 보수든, 자본주의든, 공산주의자든, 사회주의든, 개량주의든, 대주주든 공산독재자든 인간은 스스로가 또 다른 사유화의 도구로 토지를 다룰 뿐이다. 오늘날 토지 공유화가 문자 그대로 가장 잘 유지되고 있다는 중국이 과연 고상하고 평등한 나라가 되었는가? 중국 최고 도시 상하이 뒷골목을 가보라! 필자는 상하이 뒷골목을 보면서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1960년대 우리 사회 어두운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큰 충격을 받았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풍경이 1960년대 고향의 과거로 들어간 듯한 포근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큰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상하이 뒷골목은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만일 그래도 중국 토지법을 그리워하는 미숙한 정치인이 있다면 차량으로 스쳐가듯 보지 말고 직접 도보로 다니며 중국 최대도시 뒷골목을 직접 다녀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국이 과연 세계 최고의 토지공유제로 고상한 도덕적 국가가 되었는가? 외국 기업에 대한 불평등 조약, 특허·저작권 무시, 주변 국가에 대한 강대국으로서의 강압적인 정치경제적 위협, 저임금, 비도덕적 수출 물품들의 반출,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종교, 사이버 통제와 억압 등 다양한 억압과 꼼수로 잠시잠간 성공한 듯 보이는 개발독재의 모습 아닌가? 

또 다른 토지 공유국가 북한의 토지법 제 2장 토지소유권은 “나라의 모든 토지는 인민의 공동소유로서 그것을 누구도 팔고 사거나 개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이 같은 공동소유가 생산물의 증산이나 자유롭고 부요한 사람에 어떤 혜택을 주었나? 북한 정권은 여전히 언론, 출판, 결사, 집회, 종교, 거주 이전, 심지어 일부 정치, 직업 선택, 여행 자유, 결혼 자유조차 없는 억압정권이 아니던가? 북한 경제는 부흥했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토지와 자본만 공유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공산주의나 공산주체 귀족이 토지의 주인이 된 나라의 참상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자본주의 논리로 본다면 공산 주체 귀족은 토지를 모두 공유화하고 인류 기본 자유까지 억압하는, 자본주의 재벌하고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악덕 대재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 토지 공개념 만사형통주의의 위험성-토지와 관련 없는 (고)소득 문제

토지만 공유화 하면 된다는 사상은 경제가 생물 같다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미숙함이라고 필자는 본다. 이제 세상과 사회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공간영역이 발생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말 그대로 이전의 패러다임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토지보다 훨씬 더 큰 이윤을 제공해주는 사이버 영역, 주식 상속, 금융 소득, 특허·저작권·인세 수입에 대해 토지가치세 만능주의자들도 당황하고 있다. 일명 ‘흙수저’ 출신이 토지 없이 게임 개발과 주식 상장만으로 단숨에 재계 10위권에 대거 진입하는 시대다. 5천년 바둑 지식은 단지 36 시간 만에 ‘슈퍼 알파고’에게 파악되어 인류 최강 기사에게 연전연승하는 시대다. 선배 의사에게 억압당하며 어렵게 배운 의학 지식이란 쏟아지는 새로운 수만 편의 논문과 정보 속에 인공 지능의 정보와 발전의 1만분의 1도 따라잡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인공 지능에 능한 보통 사람이 웬만한 의사 못지않은 의학적 판단력을 가진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의사,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의 지식이 인공지능만 훨씬 못하니 국회의원, 의사, 법전문가, 세무전문가를 모두 공유화하여 인공 지능과 디지털 기기에 능통한 단순 공무원으로 모두 대체해야 한다면 이들 전문가들이 수긍할까? 사실 이들 영역도 토지와 다를 바 없다고 보고 공유 영역으로 포함해야 유토피아가 온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괴물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IV. 나가면서

성경은 근본적으로 토지법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알리고 인간의 근본적 타락과 영원한 회복의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헨리 조지의 토지법에 대해 헨리 조지가 기독교인이므로 그의 토지법도 성경적이라고 우기는 것은 대단히 단편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토지에 대한 언급을 보여주는 희년의 본질도 토지법이 아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성된 영생의 소망으로서의 희년을 보여준다. 안식년과 희년을 포함하여 성경은 경제학에 도움을 줄만한 무슨 대단한 비결이 숨어있는 그런 책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안식년과 희년뿐 아니라 유월절, 나팔절, 속죄일,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등을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는 이유는 이들 절기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슨 토지법을 찾으려 하면 안 되는 이유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려는 포괄적 세상 이해와 인간 이해를 통해 성경적 토지법과 세상 경제학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말하려는 중심 본질도 아니다. 탁월한 구약 학자 브루거만(Wa;ter Brueggemann, 1933-)이 땅에 대한 신학을 전개하면서 희년 제도와 토지법이나 헨리 조지 등을 연결 지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역자인 강성열 교수는 이 점을 아쉬워하였으나 브루거만은 땅의 성서적, 신학적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땅의 법 속에 예수 자신을 묶으려는 제자들을 향해 땅의 법(토지법) 개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소유 포기를 설파한 바로 그 본질이다.

본고를 통해 토지단일세를 부과하고 토지사유화 금지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헨리 조지 사상은 산업혁명 시대의 산물이었을 뿐 4차 혁명 시대에는 전혀 맞지도 않을뿐더러 성경적 사상은 더더욱 아님을 살펴보았다. 헨리 조지 사상이 시대적 산물이었기에 헨리 조지 이전에도 성경적 원리(하나님의 섭리)는 작동되고 있었고 헨리 조지 사상이 없이도 기독 공동체는 미숙한 가운데서도 복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주로 척박한 갈릴리 나사렛에서 세상적, 물질적 변혁을 시도하지 않고 영생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기독교 사상에 만민이 부요함을 누릴 수 있는 만능 세상법이란 없다.

토지 공유가 만민에게 좋은 차, 좋은 휴대폰, 좋은 저택, 좋은 가정을 선물하지도 않는다. 다른 방식의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 뿐이다. 인간은 각자 기능도 다르고 달란트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며 탐욕과 죄성 속에서 아무리 좋은 토지법을 가지더라도 또 다른 다양한 불평등을 키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독 종말론은 인간 종말에 대해 부정적이다. 땅의 산물(땅의 토지법 등)이 아닌 은총의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토지공유법은 인간 질병의 문제, 지적 호기심의 문제, 영생의 문제, 죽음의 문제, 죄의 문제, 탐욕의 문제, 심판의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인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문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헨리 조지 토지법만 있으면 다 된다는 정치인이 있다면 정말 자신의 무지와 무식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희년에다가 헨리 조지를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헨리 조지는 남들이 생각지 못했던 탁월한 급진적 경제 사상을 창안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성경 희년은 전혀 아니었다. 이제 관성적으로 헨리 조지의 사상이 성경적 토지사상이요 희년의 모형이라는 집착은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고 본다.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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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